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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의 교육 역사

일상에서

by 장대명화 2017. 4. 14.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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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교육기관

    영동향교(永同鄕校)

부용리 영동읍성 안의 성안마을 난계국악당 서쪽편에 위치하고 있다. 영동향교는 조선 선조(1567 1608)때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실된 것을 현종 1년(1660)에 옛 읍성 안에 복원하였다. 그 후 숙종2년(1676)에 지금의 영동읍 구교동으로 옮겼다가 영조30년(1754)에 다시 지금의 위치로 이건(移建)하였다.

영동향교 일곽은 현재 대성전과 내삼문, 명륜당, 외삼문, 전사청, 홍살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향교는 경사지에 동향하여 입지하였는데, 강학공간(講學空間)인 명륜당(明倫堂)이 앞에 배치되고 제향공간(祭享空間)인 대성전(大成殿)이 뒤에 배치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식 배치로 되어있다. 명륜당은 정면4칸, 측면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평면 구성은 좌우양측에 정면1칸, 측면2칸의 온돌방을 두고 중앙 2칸에 대청을 두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좌우에 풍판이 있다. 가구형식은 5량가이고, 단청은 모로단청으로 하였다.

대성전(大成殿)에는 공자(孔子)를 주향으로하여 사성(四聖: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과 이십이현(二十二賢;宋朝4賢,東國18賢)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매년 춘추로 석전제(釋奠祭)를 지내고 있다.

   황간향교(黃澗鄕校)

황간향교는 고려(高麗) 충혜왕(忠惠王) 년간(年間;1341∼1345)에 창건하였다.

그 후 조선 현종7년(1666)에 서쪽의 읍성안으로 옮겼으며, 영조28년(1752)과 고종9년(1872)에 중수(重修)하였다. 황간향교 일곽은 현재 대성전(大成殿)과 내삼문(內三門), 명륜당(明倫堂), 외삼문(外三門), 고직사(庫直舍), 홍살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밖에 전사청(奠司廳)이 있었으나 6.25때 소실(燒失)되었다. 이 향교는 동향하여 입지하였는데, 강학공간(講學空間)인 명륜당이 앞에 배치되고 제향공간(祭享空間)인 대성전이 뒤에 배치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식 배치로 되어 있다. 명륜당은 정면5칸, 측면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평면 구성은 좌우양측에 정면1칸, 측면2칸의 온돌방을 두고 중앙3칸은 대청을 두었다.

황간향교는 고려(高麗) 충혜왕(忠惠王) 때(1341∼1345)에 창건하였다. 그 후 조선 현종7년(1666)에 서쪽의 읍성안으로 옮겼으며, 영조28년(1752)과 고종9년(1872)에 중수(重修)하였다. 명륜당 전면에는 툇마루를 설치(設置)하였으며 온돌방의 전면으로는 함실아궁이를 두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좌우에 풍판이 있다. 팔각의 정자창(井字窓)을 설치하였으며 가구형식은 2고주 5량가이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주향으로 하여 4성(四聖:顔子·曾子·子思·孟子)와 22현(22賢;宋朝 4賢, 東國 18賢)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매년 춘추로 석전제(釋奠祭)를 지내고 있다. 건물 구조는 자연석 기단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원기둥을 세웠다.

 

   

* 현대의 교육기관 

  조양학당(朝陽學堂)  양산면 가곡리(柯谷里)

양산면 가곡리. 1910년에 현 양산초등학교의 모체인 사립 조양학교(朝陽學校)를 개교 할 때 지어진 건물이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건물 구조는 콘크리트 기단위에 주좌가 있는 원형주초를 놓고 그 위에 방형기둥을 세웠다. 바닥은 장마루이며, 천정은 연등천정이다.

가구형식은 무고주 5량가의 납도리집이다. 건물은 개교 당시 지은 학교 건물이라는 희소적 가치와 함께 건축양식에 있어서도 근대학교의 창립과정에서 초등교육시설의 면모를 조명할 수 있는 건축사적 의의를 지닌 귀중한 자료이다.

 

영동군 교육청 ; 1964.1.1  영동읍계산리697-12

충청북도 영동교육지원청 ; 1991.3.26 영동읍 부용리 42-5

 

 초등학교 설립 일자및 주소

황간초공립보통학교  1906.04.01   황간면 남성리 167-1

영동초등학교     1908.05.05  공립   영동읍 계산리674-4

이수초등학교    1946.11.15   공립 영동읍 계산리 485

부용초등학교    1965.3.5    공립   영동읍 부용리 225

화곡초등학교    1942.3.31 공립    영동읍 주곡리 44-1

양산공립보통학교   1910.03.25  

추풍령공립보통학교  1923.06.01

초강공립보통학교  1923.05.17 

상촌공립보통학교  1923.05.16

용산국민학교   1926.04.01  용산면 한곡리 213

구룡초등학교   1945.3.10     용산면 구촌리 141-1

양강공립보통학교  1930.04.15

학산초등학교     1932.05.23

매곡공립보통학교   1935.0520

구강초등학교     1944.03.31

용화공립보통학교   1935.05.25

심천초등학교 ; 1939.5. 1.

미봉초등학교 ; 1944.5.10

 

영동대학교  

* 소재지 ; 충북 영동군 영동읍 대학로 310(설계리 12-1)

* 개교일자 ; 1994.3.8   영동공과대학  

* 교명변경(97.12.1) ; 영동대학교 

* 학교법인명칭 ; 금강학원 

* 초대-6대 이사장 ; 1-6대 김맹석  7대-김재규

* 총장 ; 1-2대 김재규  3대 안광구  4대 채훈관 -*대 송재성-  7대 채훈관

* 신입생 ; 1999년 851명 

* 학사 학위 수여 ; 1999년 180명  2003년 443명

* 영동노인전문병원 위탁운영 ; 2006년10월30일

* 영동국민체육센타 개관 2010년1월15일;   

* 2010.10.21 아산 제2캠퍼스 운영

* U1대학교로 교명 변경  영동군민이 반대하다.(2016)

 

중학교 설립일자

영동여자중학교  1943.4.12    *1987.3.1. 영동중학교와 통폐합

영동중학교     1946.8.9     공립     영동읍계산리 69-1

황간중학교     1946.7.30   공립    황간면 남성리526-1

학산중학교     1952..5.24   공립    학산면 서산리907-3

추풍령중학교  1954.7.12   사립    추풍령면, 리 산3

용문중학교     1964.2.22    공립     용산면 , 리   104

심천중학교     1964.12.12  사립    심천면 초강리378

상촌중학교     1965.3.3     공립      상촌면 유곡리 467

정수중학교     1969.11.18  사립    양산면 송호리 12-1

영신중학교     1972.9.13    사립     영동읍 매천리 458.1

 

고등학교 설립일자

영동농공업고등학교  1946.9.1  공립  영동읍 부용리 42-1

영동고등학교  1951.9.26  공립  영동읍 계산리 72-7

학산상업고등학교  1955.5.31    공립  학산면 서산리 902

황간고등학교  1974.7.1   공립   황간면 남성리 431

영동상업고등학교   1975.5.12    사립  영동읍 계산리 270

영동여자고등학교  1953.5.21 개교 ; *1987.3.1.  영동고등학교와 통폐합

 

 인물 임연상(林淵相)

황간군수로서 황간 초등학교를 1896.3.15에 설립인가를 받고 4.1일 개교하여 교장을 겸임.

1907년 영동군수로 부임하여 장덕근 송병윤이 설립한 사립계산학교를 1908년 영동보통학교로 인가 받고 교장을 겸임하였슴 (영동초등학교 100년사)

 

  장학회

1. 구암장학회 ; 설립자 - 이대현

                                출연금 -2억8300만원  

                                사무실-영동읍 부용리55-2 (학산영동로1187

2. 덕원장학회 ;  설립자 전주이씨덕원군파후예 이현경외 3인 이우정.이정만.이진영.

                                  장학기금 ; 18억원  (2003.12.3 현재)

                                  재단소재지 ; 서울 종로구 내자동 25-1    

 

   書院서원

*寒泉書院址한천서원터

한천정사가 있는 원촌리 서원말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長橋川(1:5,000 지형도에는 草江川으로 표기되어 있음) 변으로 현재 寒泉精舍와 宋尤庵遺墟碑가 있다.
이곳은 한천서원이 건립되기 전 深妙寺라 전하는 절이 있던 곳으로 조선시대 절이 폐사된 이후 이곳에 한촌서원을 건립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변에서는 통일신라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문양의 기와편들이 수습되고 있다.
이들 기와편들 중 고려시대 이전의 것들은 심묘사라 전하는 절의 건물과 관련된 유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의 기와편들은 절이 폐사 된 후 이곳에 건립된 한천서원의 건물과 관련된 유물로 보인다.
 서원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으나, 현재 宋尤庵遺墟碑와 寒泉精舍가 있는 부근에서 다량의 청해파문 기와가 수습되는 것으로 보아 이곳 주변으로 추정된다.

 

*松溪書院(송계서원)

매곡면에서 상촌면으로 이어지는 49번 국도를 따라가면 매곡과 상촌의 경계지점에 수원리 원촌마을이 나온다.
송계서원터는 원촌리 마을회관 뒤편 민가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주민들은 이곳을 서당터라 전하고 있으나, 주변에 松溪書院遺虛碑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곳이 송계서원터로 추정된다.
민가 주변에서 조선시대의 청해파문 기와편이 수습되고 있으며, 건물의 초석 및 기단석으로 추정되는 석재들이 흩어져 있다.
 송계서원은 조선 선조 3년(1570)에 지방 유림들이 선현을 추모 향사하기 위하여 창건하였으며, 고종 5년(186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철폐되었다.

 (黃澗縣邑誌 ; 황간현읍지 1923. 純祖23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 “松溪書院” 卽 鄕賢祠 在縣南二十里 慕賢村前 文莊公梅溪曺ㅇ 文穆公松堂朴英 節孝嵐亭金始昌 梧村 朴應勳 三槐堂南知言 一石朴惟棟 六賢腏享

송계서원은 향현사이다 황간현의 남쪽 20리 모현촌에 있다. 문장공 매계 조o. 문목공 송당 박영. 효자 람정 김시창, 오촌 박응훈, 삼괴당 남지언. 일석 박유동 여섯 어진분들을 배향하였다.

 

* 草江書院초강서원

광해군 3년 1611년에 건립되어 많은 인재를 배출 했다.

배향위는 상촌 김자수. 난계 박연. 읍청 박사종. 습정 송방조. 팔송 윤황. 야은 송시영. 중봉 조헌. 우암 송시열. 국당 박흥생이었다. 서원이 없어진 것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라고 한다. 터는 국가지정문화재 소석가옥 뒤편(북쪽) 100m지점으로 밭이 되어 있다. 기와 조각과 주춧돌이 많아 밭을 만들던 초기에 수고가 많았다고 한다.

“輿地圖書”(1757 영조 33년 간행)여지도서에 다음과 같이 실려있다.

草江書院 在縣西十五里大草旨 以中樞院事大提學蘭溪朴堧 挹淸朴嗣宗 忠顯公野隱宋時榮 文正公尤庵宋時烈 文正公八松尹煌 習靜宋邦祚 桑村金子粹 並享爲

초강서원은 현의 서쪽15리 대초지리(草江의舊名)에 있다. 중추원사대제학 난계 박연, 읍청 박사종, 충현공 야은 송시영, 문전공 우암 송시열, 문정공 팔송 윤황, 습정 송방조, 상촌 김자수를 함께 배향 했다.

“永同縣邑誌”(영동현읍지 1999년 간행) 다음과 같이 실려있다.

草江書院 ; 在 深川面 草江里 光海 辛亥建 ◉桑村金子粹 蘭溪朴堧 挹淸朴嗣宗 習靜宋邦祚 八松尹煌 野隱宋時榮 尤菴宋時烈

초강서원 ; 심천면 초강리에 있고 광해군 신해년에 세웠다. 배향위는 상촌 김자수. 난계 박연. 읍청 박사종. 습정 송방조. 팔송 윤황. 야은 송시영. 우암 송시열

화암서원(花巖書院)

 “鄕祠” 在縣西一里 顯廟丙午創建于 文顯公張沆 菊堂朴興生 翰林朴季愚 襄貞公張弼武 老孝子朴忍 三槐堂張智賢 幷享而祀焉 향사는 현의 서쪽1리에 있다. 현종 병오년에 창건하였다. 문현공 장항, 국당 박흥생, 한림 박계우, 양정공 장필무, 노효자 박인, 삼괴당 장지현을 함께 배향히고 제사지낸다.

 

     書堂서당* 楓川堂 풍천당 용산면 용산리 풍계사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태종 13년(1413) 右贊成 金宗敬이 창건한 강학당으로 그의 호를 따라 楓川堂이라 하였다.
 정면에 ‘楓川堂’이란 편액이 걸려 있고, 건물 안에는 1623년 宋煥箕가 짓고 金基準이 쓴 ‘楓川堂重修記’와 1976년 제작한 ‘重修記’가 걸려 있다.

 

* 孤栢堂 고백당

황간에서 상주시 모서면으로 이어지는 901번 지방도변의 금계리에 위치하고 있다.
앞으로는 錦上川이 흐르고 시야가 트여서 전망이 좋은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다.
고백당은 조선 중종 때 李友仁이 己卯士禍로 인해 벼슬을 버리고, 이곳 白華山 기슭에 은거하면서 후진 양성을 위하여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다. 자신의 號를 따라 ‘孤栢堂’이라 하였다.

 

* 四老堂사로당

49번 지방도로변의 노천리 내동마을 안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숙종 36년(1710)에 세워졌으며, 현감을 지낸 朴守謹과 그의 아우 3형제가 講學하던 곳으로 4명의 노인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四老堂이라 불리게 되었다.

 

*興學堂흥학당

49번 지방도로 변의 노천리 내동 마을 서쪽 끝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忠州朴氏 宗中에서 後孫들의 講學을 위하여 지은 집이다.
조선 중종 15년(1520)에 세워졌으며, ‘興學堂記’에 의하면 숙종 35년(1709), 영조 11년(1735), 고종 6년(1869)에 각각 중수하였다.

 

*三槐堂삼괴당

임산리 수산 마을 서쪽 끝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南知言(1507∼?)이 말년에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강당으로 자기의 號를 따서 三槐堂이라 하였다.
남지언은 조선 중종 2년(1507) 임산리에서 출생하여 향시에 일등으로 합격하였으나 士禍의 참상을 보고 복시에 나가지 않고 歸鄕하여 後學을 양성하였다.
삼괴당은 그의 아버지 南寅및 아들 南景孝와 함께 특출한 孝行으로 旌閭되어 三孝閣이 건립되었으나 불에 타 없어졌다 한다.
 건물의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현재의 건물은 純祖 2년(1802)에 重修한 건물이다.

 

* 옥계서당 (서당 터에 花樹樓화수루)

勿閑川과 高子川이 합류하는 지점의 서쪽편에 위치하고 있는 하도대리 돈대마을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조선 명종 원년(1546)에 고성 남씨 문중에서 건립하여 옥계서당이라 하여 후손들의 강학처로 사용하다가, 순조 4년(1804)에 현 위치에 옮겨짓고 그 이름도 花樹樓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대청마루의 중수기에 보면 ‘…옥계서당 동쪽에 작은 루를 세우니 화수루라…, 1546년에 병건, 1613년에 1차 중수, 숭정 3갑자 순조 4년(1804)에 중수하노라…’라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화수루는 처음 건립당시에는 서당 옆의 누각으로 건립되었는데, 차후에 옥계에서 하도대로 이건하면서 서당은 없어지고, 화수루가 서당의 역할을 병행하면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資風書堂(자풍서당)

68번 지방도와 505번 지방도가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505번 지방도를 따라 약 350m 정도 가면 도로 우측편(동쪽) 절벽 사이로 난 작은 소로가 있다.
이 소로를 따라 올라가면 평탄지가 나오는데 이곳에 자풍서당이 위치하고 있다.
 조선 초기 정종에서 태종 연간(1398∼1418)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조선 중기의 儒學者인 東川 李忠範(1520∼1598)이 중수하고 講學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豊谷堂’이라 하였다가, 광해군 6년(1614)에 寒岡 鄭逑선생이 이곳에 머무르며 ‘資法正風’으로 학문을 장려하였다는 뜻으로 ‘資風堂’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高塘里書堂(고당리서당)

금강이 초강천과 합류하면서 U자형으로 크게 곡류하는 남쪽의 고당리 날근이 마을 안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의 정확한 축조연대는 알 수 없으나, 興學堂 飜宅名錄과 丹陽李氏 春川府使公派譜의 기록을 토대로 하고 마을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1800년대 말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慕義堂모의당

晦峰公 裵後度의 후손들이 선대의 업적을 기리고 후손들의 강학을 위하여 지은 건물로 기호리 기호마을의 지금은 폐교된 금호초등학교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영조 1년(1725)에 건립하여 ‘敦話齋’라 불리어지다가 순조 15년(1815)에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철종 3년(1852)에 이름을 慕義로 바꾸었다.
慕義堂이라는 이름은 1856년에 붙여진 것이다.
‘慕義堂記’에 의하면 현재의 건물은 1899년에 건립하였으며, 1914년, 1935년경에 중수하였다.

 

* 先志堂선지당

영동천 변의 각계리 상각계 마을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고려말 충청도관찰사를 지낸 김자수 선생과 손자 김영년이 살던 곳이다.
유적으로는 선생과 그의 후손이 대대로 살았던 先志堂과 후손의 효자 정려각이 있다.
 金自粹는 고려 공민왕 23년(1374)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에 올랐으나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안동에서 숨어 지냈다.
그 후 조선이 개국된 후 태종이 형조판서에 오르게 하였으나 사양하였고, 자손에게 결코 무덤을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선생의 손자 김영년은 문종(재위 1450∼1452)때 강릉판관을 지내다가 관직에서 물러난 후 선지당에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며 후학 양성에 몸 바쳤다.
 선지당은 중종 때(1506∼1544)에 세워졌으며 순조 16년(1816)에 중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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