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미술관
주말이면 모여드는 친손자 외손녀들이 한바탕 북새통을 이룬다. 아직은 어린이집을 다니는 세 녀석들이지만 제 핏줄 아니랄까봐 모이기만 하면 죽이 잘 맞는 사촌지간 삼남매다. 그 중 장녀인 외손녀딸은 이래라 저래라 하며 의례 리더가 된다. 친손자는 중간에서 누나, 동생 밀 당을 하며 폼을 잡는다. 그래도 남자라는 것이다. 나도 시켜줘 잉~ 하며 언니 오빠를 졸졸졸 따라 다니는 막둥이 외손녀는 아직도 아기티를 벗지 못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위계질서에 따라 행동하는 걸 보니 기특하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한바탕 놀이마당이 끝나면 미술 시간이란다. 서재로 들어가 조용하다. 살며시 들여다보니 준비해 온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펼쳐놓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참 묘하다 아이들인데도 제 나이에 걸맞게 개성대로 생각하고 표현하는 게 신기하기까지 하다.
내년이면 초등학생이 되는 큰손녀, 긴 머리 소녀를 등장시켜 예쁜 옷을 번갈아 입히는 그림을 그리더니, 이제는 유치원에서 일어 난 일들을 이야기하듯 그린다. 그림 속에는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 침을 흘리는 표정이 있고, 소풍간 곳의 나무와 꽃도 그리고, 단짝 친구의 모습도 있다. 유난히 강아지를 좋아 하는 큰손녀는 수의사가 되겠다며 파란색 진료 옷을 입고 강아지를 치료 하는 그림으로 장래 꿈을 표현하기도 한다. 둘째인 아들 손자는 장난감을 만지기 시작하면서부터 고래나 상어 악어 등 바다 물고기를 좋아 하더니, 이제 큰 동물이 좋은지 수 억만 년 전에 살았다는 공룡의 영어 이름을 술술 외우며 그린다. 다른 장난감은 관심조차 없다. 동물이 최고라며 두 손 엄지 척이다. 영어에 관심이 많은 셋째도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가족들을 차례로 그려 놓고 영어로 읽는다, 제법 발음도 정확하다. 여섯 살이 되면 영어 유치원엘 가고 싶단다.
셋뿐인 손주들이지만 아롱이다롱이 이렇게 제각각 커가는 걸 보니 참으로 사랑스럽다. 내 자식들 키울 때는 예쁜 줄도 몰랐다. 멋모르고 키웠던 것 같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왜 좋아“라고 물으면 ”그냥 좋아요“ 합창을 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핏줄이 아닌가. 노년에 남편과 나는 손주 바보가 되었다.
주말마다 그려 놓고 가는 그림이 수북하다. 이 그림을 어떻게 보관해야 할까, 궁리 끝에 거실 벽에 부쳐놓기로 하였다. 한 장 두 장 부치다보니 벽 한 면이 빼곡하다. 동화 같은 가지각색의 그림들이 어린이 미술 전시회장 같다. 어느 날 지인 한 분이 다녀가며 “와! 애기들이 그림을 참 잘 그리네요. 꼬마 미술관에 온 것 같아요”라는 말 한마디에 귀가 솔깃 한다. 혹시 그림에 천재가 아닐까? 엉뚱한 상상을 하며 또 한 번 할머니 바보가 된다.
결혼을 하지 않아 무던히도 부모애를 태우던 자식들이었다. 그러나 때가 되니 큰딸이 혼인을 하자 시샘이나 하듯이 둘째인 아들도 곧 바로 결혼을 하였다. 이렇게 제 짝 찾아서 알콩달콩 아들 딸 낳아 잘 사는 것을 그 때는 왜 그리도 조급하게 생각했었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이치를 왜 몰랐던가. 자식들이 결혼을 못할까봐 혼자 애가타서 발을 동동 구르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멋쩍어 웃음이 나온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손주들이 무한한 미래에 대한 상상으로 동경과 그 꿈을 쫒아 노력하는 일들이 이어졌으면 한다. 내 인생의 뒤안길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들이 많지는 않아도 사랑하는 손주들이 있어 나는 행복하다. 먼 훗날 손주들이 내 품을 그리워하며 추억할 수 있도록 많은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겠다. 이제 손주들이 건강하고 아름답게 잘 자라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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