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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모른다 / 남자도 울게 하라 ㅡ 조 재 은

그는 모른다 / 조 재 은 긴 시간 마주하고 살아온 그는 내게 초록빛이었다. 익숙한 실루엣과 빛깔을 보여 주던 그가 설핏한 저녁노을을 등지고 선 그날,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어선지, 해풍에 내 눈이 맑아져서인지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그를 향해 걸어가며, 짧은 거리는 멀게 느껴졌고 낯선 모습은 가슴에 서늘한 바람을 일으켰다. 더운 여름 햇볕을 피할 수 있는 숲 같고, 걷기 힘든 자갈길의 잔디 같아서 초록으로만 알았던 그에게서 수많은 색이 보였다. 바다 앞에 선 두 사람은 각자에게서 ‘타인’이란 그림자를 보았다. 그는 알고 있을까. 커피에 설탕과 크림을 세 스푼씩 넣어 커피를 죽처럼 먹던 내가 요즘 혀가 아리도록 진한 불랙커피를 마시는 까닭을, 새벽 3시 물컵에다 포도주를 넘치도록 부어 단숨에 마시는..

추천 수필 2026.10.17

호박잎에 모이는 빗소리- 박용래 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에서 / 남상숙

호박잎에 모이는 빗소리- 박용래 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에서 / 남상숙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저녁눈〉–박용래(1925∼1980) ) 우리 집 거실 탁자에 이 시가 있다. 소파에 앉은 손님이 눈으로 읽거나 낭송하면 내 시라도 되는 듯 양양했다. 말 집뿐만이 아니라, 집 안팎 눈 설거지로 아낙네는 동동거리고, 남정네는 헛간에서 농기구 정리로 분주하다. 밥사발 들고 아이 찾아다니는 어미처럼 눈발은 세상천지 예서제서 북적거린다. 대전문학관 박용래 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에서 이 시를 보았다...

추천 수필 2026.10.16

좋은 수필 / 김 태 길

좋은 수필 / 김 태 길 어린 시절을 보냈던 외가 사랑방에는 바둑판이 있었다. 어른들이 두는 것을 어깨 너머로 구경하다가 동무들과 장난 바둑을 두기도 하여 바둑의 초보적 기초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 그러나 조금 그러다가 말았을 뿐, 바둑에 몰두한 적은 없다. 교수 생활을 하게 된 뒤에도 동료들이 바둑 두는 것을 옆에서 관전한 적은 더러 있다. 그럴 때면 "김 선생의 바둑은 몇 급이요?" 하고 묻는 친구들이 있었다. 나는 그저 웃고 말았다. 언젠가 '문리대 교수 친선 바둑 대회'에 9급으로 나갔다가 1회전에서 나가떨어진 이야기를 굳이 할 필요는 없었다. 바둑이나 장기를 잘 두는 사람을 '기사(棋士)'라고 부른다. 한국에서 '기사' 행세를 하기 위해서는 한국 기원이 인정하는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

허무가 아닌 것을 찾아서 / 김 태 길

허무가 아닌 것을 찾아서 / 김 태 길 “인생은 허무하다.”이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라고 우겨대는 것만으로 허무가 달아나지는 않는다. 인생이 허무하지 않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남이야 믿거나 말거나 나 자신만이라도 납득할 수 있는 근거 비슷한 것이 필요하다.내가 몸과 마음을 온통 바쳐서 추구하는 목표가 있다면, 나의 삶은 허무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느낌이 무슨 논리적 근거가 될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은 지나친 추궁이다. 무엇 하나를 위하여 몸과 마음이 열중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지 않겠는가. 이를테면 우상(偶像) 하나의 존재만으로도 인생은 값을 갖게 될 것이라고 나 자신에게 타이른다.나의 첫째 우상은 어머니였다. 돈을 없애는 데 탁월한 소질을 ..

추천 수필 2026.10.13

망치를 든 남자 / 윤 온 강

망치를 든 남자 / 윤 온 강 사람이 살아가면서 수행하는 많은 역할 중에는 자기에게 맞지 않는 것도 꽤 있을 것이요,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는 역인데도 하는 수없이 맡아서 하는 사람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직업도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아닐까? 나는 자기 직업에 정말 만족해하는 사람을 별로 만나 보지를 못하였다. 다른 사람은 제쳐두고 나 자신도 내 직업이 적성이 맞는 것인지 자문해 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교단에 선 지 몇 달도 채 안 되어 이 직업이 내게 맞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긴 것은 전혀 엉뚱한 데서였다. 지금은 세월이 좋아서 성적일람표를 컴퓨터가 만들어 주고 있지만 그때는 그것이 교사에게 가장 큰 일거리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이 성적일람표를 나는 단번에 만들 수 없었다. 이름을..

추천 수필 2026.10.07

영혼의 숨소리 / 조 병 렬

영혼의 숨소리 / 조 병 렬 교무실 창밖에 은행나무 세 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고개만 들면 보이는데, 크기도 같고 모양새도 흡사하다. 오래도록 저 나무들을 친구처럼 바라보며 함께 지내왔다. 몸과 마음이 지쳐 있거나 외로움이 밀려올 때는 나를 위로해 주고 가다듬게 해 준 고마운 친구로서 손색이 없다. 얼마 전까지 진녹색의 무성한 잎으로 건강미를 과시했던 나무들이다. 잎들이 줄기와 가지들을 모두 가려버린 오동통한 자태는 마치 르누아르의 '목욕하는 여인들'처럼 탐스러웠다. 조락의 계절로 접어들면서 저들은 서서히 변화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예사로 보았다. 으레 가을이 되면 은행나무는 노랗게 물들기 마련이고, 그 화려한 모습은 많은 사람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한 것으로만 여겼다. 그런데..

추천 수필 2026.10.06

천국의 작은 도서관 / 안 규 수

천국의 작은 도서관 / 안 규 수 당대의 거장 헤밍웨이는 소설『노인과 바다』의 첫 문장을 이백 번 넘게 고쳐 썼다고 한다. 단정한 문장 하나를 얻기 위한 그의 집요함은 경외심마저 불러일으킨다. 소설가 김훈은 『칼의 노래』의 첫 문장을 두고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 사이에서 고뇌했다. 조사 하나가 문장의 결을 바꾸고, 그 결이 작품 전체의 숨결을 결정한다. 수필은 어떠한 문학인가? 소설가 김홍신은 ‘수필은 내 흔적을 글로 나타내는 것이기에 잉크를 찍어 쓰는 게 아니라, 혼(魂)을 찍어 나를 밝히는 생각 증명서’라고 말했다. 수필 쓰기는 자신의 완성을 향한 영혼의 계단 밟기이다. 글을 쓰는 동안 내면의 모서리는 다듬어지고 자신의 결점은 보완되기 때문이다. 수필의 첫 문장은 밀봉된 세계의 문을 여..

추천 수필 2026.10.05

한 끼 식사를 할 때마다 / 김 학

한 끼 식사를 할 때마다 / 김 학 식탁에 올라온 밥과 국 그리고 갖가지 반찬들을 둘러본다. 끼니때마다 되풀이되는 나의 버릇이다. 오늘 아침에는 김과 김치, 생채, 콩나물, 시금치, 고추장, 깻잎김치, 멸치볶음, 쇠고기자장 등이 올라왔다. 밥은 오곡밥이요, 무를 빚어 넣고 끓인 황탯국도 나왔다. 끼니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반찬이 있으면 나의 식사 동작은 빨라진다. 국이 있으니 일단 밥을 몇 숟갈 국에 말아서 밥 한 숟갈에 반찬을 두세 가지씩 먹는다. 나는 끼니때마다 며칠 굶은 사람처럼 밥을 먹는다. 그래서 나랑 함께 식사를 하면 절로 식욕이 생긴다고들 한다. 나는 채소 반찬도 잘 먹고 생선이나 고기도 좋아한다. 싫어하는 음식이 거의 없다. 나의 식성은 전천후 잡식성이다. 나는 집에서나 음식점에서 식사를 ..

추천 수필 2026.10.05

<<커피가 우울증 위험 낮춘다? 정신건강에 좋은 음식 4가지>>

> 우울증(depression)은 우울한 기분과 흥미 저하가 지속되고 수면·식욕 변화, 피로감 등이 나타나는 정신질환이다. 발병에는 유전적 요인과 스트레스뿐 아니라 뇌의 신경전달물질 변화도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로토닌(serotonin), 도파민(dopamine), 노르에피네프린(norepinephrine) 등은 기분과 감정 조절에 관여하는 대표적인 신경전달물질이다. 이처럼 뇌의 기능과 기분을 조절하는 여러 요인 가운데 식생활도 주목받고 있다. 식품에 들어 있는 특정 성분이 신경계와 뇌 기능에 영향을 미치거나 우울감을 비롯한 정신건강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살펴본 연구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카페인처럼 신경계에 직접 영향을 주는 성분은 물론 안토시아닌과 에르고티오네인 같은 항산화 성분, 신..

쥐는 이렇게 말했다 / 해질녘 ㅡ 김 창 식

쥐는 이렇게 말했다 / 김 창 식 끈 떨어지고 줄 떨어진 구경꾼들이 둘러섰다. 쥐 한 마리가 뿔뿔 기어가자 작은 널빤지 벽이 나타난다. 생쥐가 다른 길로 접어드니 또 벽이 가로막는다. 실험용 쥐가 방향을 바꾼다. 그러자 알고 있었다는 듯 또 다른 방해물이 나타난다. 시행착오 끝에 작은 동물은 출구 쪽으로 향한다. 구경꾼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박수를 치려는 순간, 아차, 미련한 쥐는 방향을 틀어 출구로부터 쪼르르 멀어지더니 다른 곳을 헤맨다. 상황이 재개된다. 쥐 한 마리가 기어가자…. 상황은 되풀이된다. 쥐 한 마리가 기어가자 널빤지 벽이…. 쥐 한 마리가 기어가자 또 다른 벽이….바보 같은 쥐. 슬슬 짜증이 나려는 순간 설핏 의심이 든다. 쥐가 혹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출구로 향하는 길..

추천 수필 2026.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