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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인문학 / 양 창 식

우연의 인문학 / 양 창 식 삶은 계획 위에 세워진다. 우리는 미래를 설계하고, 하루를 분 단위로 나누며, 목표를 세워 그것을 향해 걷는다. 계획은 삶을 질서 있게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세월을 돌아보면, 내 인생의 결을 바꾼 순간은 정작 그런 계획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뜻하지 않게 다가온 장면, 불시에 찾아온 사건, 이름 붙이기조차 애매한 우연의 순간들이 내 삶을 돌려세웠다. 우연은 무질서의 이름을 달고 오지만, 그것은 다른 차원에서 작동하는 또 하나의 질서일지 모른다. ​얼마 전, 그 질서가 나를 불러세웠다. 늦은 오후였다. 붉게 저무는 햇살이 도로 위를 덮고 있었다. 차창 너머의 건물들은 노을 속으로 서서히 녹아들고, 공기 속에는 하루의 피로가 부유했다. 나는 피곤을 달래려 무심코 라디오를 켰다...

추천 수필 2026.11.05

 벽(癖) / 이 은 희

벽(癖) / 이 은 희 곁님의 목소리가 벽을 타고 올라온다. 새벽에 펼친 책 위로 아침 햇살이 깊숙이 들어와 있다. 아래층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다. “내려가요.”라고 대답하고도 마음은 아직 쓰다 만 문장 끝을 붙든다. 이윽고 노트북을 덮고 계단을 내려간다. 내가 늘쩡거리는 성격은 아닌데 꽃 앞에서도 시간을 자주 놓친다. 아파트 24층 하늘정원에는 백여 종의 식물이 자란다. 꽃송이 하나를 살피다가 곁의 잎줄기로 눈길을 옮기면 어느새 한나절이다. 곁님이 불러야만 꽃 곁에 놓아둔 시간을 거두고 안으로 들어간다. 좋아한다는 말만으로는 모자란 이 마음을 옛사람은 벽癖이라 불렀다. 벽癖은 한 가지에 붙들려 다른 일을 잊는 버릇이다. 책에 빠진 이덕무와 꽃에 마음을 빼앗긴 ‘김군’을 떠올린다. 조선 지식인 박제가가 ..

추천 수필 2026.11.02

모딜리아니의 여인들 / 박 금 아

모딜리아니의 여인들 / 박 금 아 화살나무 숲 사이로 벌개미취 한 포기가 가느다란 줄기를 뻗은 채 흔들리고 있다. 바람에 꺾이면 어쩌려고 저토록 높이 자랐을까. 거친 화살나무 가지에라도 긁히면 또 어쩌려고 저리도 히뜩대는 걸까. 한쪽으로 갸웃한 얼굴과 길게 뻗은 목이 모딜리아니의 여인처럼 애처롭다. 꽃철이 다 지났건만 꽃망울조차 틔우지 못한 모습은 아직 눈동자가 그려지지 않은 여인의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모딜리아니는 얼굴을 다 그려놓고도 눈동자를 비워두곤 했다. 그의 그림 속 여인들은 눈을 감고 있거나 텅 빈 눈으로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있다. 그 까닭을 묻는 잔느에게 그는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되면 눈동자를 그릴 거야."라고 말했다던가. 길게 늘어난 얼굴과 목, 한쪽으로 기운 어깨, 눈동자가 비어 ..

추천 수필 2026.11.02

손톱의 문장 / 모 임 득

손톱의 문장 / 모 임 득 톡, 톡.손톱깎이의 입이 닫힐 때마다 작은 조각이 떨어진다. 달 모양의 조각들은 한때 내 몸의 일부였다. 나는 그것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는다. 길어지면 자르고, 거슬리면 다듬는다. 손톱은 늘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 몸에서 나온 손톱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손톱은 피부 아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란다. 몸이 만들어 낸 작은 세포들이 차곡차곡 밀려 올라와 손끝에 닿는다. 오늘 손끝에서 잘려 나간 것은 며칠 전의 내가 아니라, 몇 달 전의 몸이다. 그때 내가 얼마나 지쳤는지, 어디가 아팠는지, 손톱은 말없이 품고 있다가 느린 속도로 바깥에 적어 낸다. 오른쪽 엄지손톱에 세로로 패인 줄이 있다. 약간 올라온 곳도 있다. 몸이 크게 아프거나 오랜 치료를 견딜 ..

추천 수필 2026.10.29

떨켜로 나무는 옷을 벗는다 / 유 한 근

떨켜로 나무는 옷을 벗는다 / 유 한 근 이맘때면 춥게 느껴지는 계절이 어김없이 오곤 한다. 나는 춥게 느껴지는 계절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것은 당연히 그래야 하는데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의혹 때문이다. 그보다는 세상이 우리를 그렇게 느끼게 만들고 우리도 스스로 그렇게 느끼게 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세상이 삭막해져도 우리의 가슴들은 열정을 지닌 채 살아야 하는데도, 나부터 세상을 닮아 건조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를 의혹해하며 반성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들의 유년의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었다. 그러나 얼음지치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팽이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발가락은 얼어가고 있어도 마음은 뜨거워 볼을 달구곤 했다. 나무들이 옷을 벗고 있어도 오히려 포근하게 느꼈고 땅이 얼어 있어..

추천 수필 2026.10.29

슴슴한 호사 / 정 순 진

슴슴한 호사 / 정 순 진 중복 지날 즈음 여름밤에 산책을 나서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구수하고 달보드레한 향내가 달려든다. 벼꽃 향기이다. 막 패기 시작한 이삭에 희끗희끗 피는 벼꽃은 작고 보잘것없어 잘 눈에 띄지 않지만 향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아, 이 뭉근하고 구수한 내음. 방송에서는 열대야라고 시끄러워도 해만 지면 산책할 만하게 땅이 식는 이유는 물론 산이 가깝기 때문이지만 논도 한몫한다. 나는 평생 농사를 모르고 밥만 축내온 사람이지만 도시 변두리에 살게 되면서 논이 주는 아름다움은 느끼며 사니 이 또한 고마운 일이다. 논이 있어 백로의 우아한 날갯짓을 볼 수도 있고, 논이 있어 개구리의 열심한 염불소리도 들을 수 있다. 모내기 직후의 연두빛 어린 모가 튼실하게 자라 꽃을 피우고 낟알을 그..

추천 수필 2026.10.23

눈물, 그 소중한 기능 / 조 헌

눈물, 그 소중한 기능 / 조 헌 홀로 하는 늦가을 산행, 타박타박 하산하는 길이다. 갈색의 바짝 마른 낙엽들이 여기저기 무더기로 나부낀다. 빽빽한 전나무 숲을 빠져나오자 봉긋봉긋 수십 기의 무덤 사이로 가느다란 길이 호젓하다. 길이 거의 끝나갈 즈음, 그늘 밑 바위에 걸터앉아 쇠락의 섭리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숨 가쁜 행보. 버림의 의식이 저렇듯 아름다운 것인가. 다시 한 번 나뭇잎들이 우수수 날리며 무덤 위로 내려앉는다. 혼자여서일까. 아니 텅 빈 듯 소슬한 계절 탓이리라. 돌연 코끝이 매캐해지더니 느닷없이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전에 없던 일이라, 적이 당황하며 서둘러 눈가를 훔치고 빈 하늘을 쳐다본다. 늙은 남자의 눈물은 나이 탓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나이가 ..

추천 수필 2026.10.23

별이 내리네 / 김 정 화

별이 내리네 / 김 정 화 검다. 온통 검은 세상이다. 검은 나무들이 검은 숲을 만들고 검은 하늘이 검은 강물 위에 내려앉았다. 달마저 숨은 그믐밤, 강을 에워싼 맹그로브 숲의 바람도 잠이 들었다. 몇몇 여행자를 실은 나룻배 사공은 말없이 노를 저었다. 말레이 서쪽 반도 셀랑고르 강을 따라 반딧불이를 찾아가는 중이다. 어릴 때 내가 살던 외딴집 근처 강 숲에는 지천으로 반딧불이가 많았다. 전깃불이 없는 시골집에 강가의 반딧불이가 모여들면 나는 잠도 잊은 채 꼬리에서 반뜩이던 조그만 등불을 눈이 시리도록 올려다보았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개똥별이라고 부르고 윗동네 조무래기들은 까랑이라고 했다. 어른들이 부르는 반디나 개똥벌레가 반딧불이라는 것도 알았지만 동네 광자 언니가 이름 붙인 땅별이 가장 마음에 들..

추천 수필 2026.10.23

의자 /박 서 윤(2026 호미곶 흑구문학상)

의자 / 박 서 윤(2026 호미곶 흑구문학상) 상담실에는 의자가 두 개 있다. 하나는 내가 앉는 의자이고 다른 하나는 상담을 받으러 온 아이들이 앉는 의자다. 나는 매일 거기 앉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아이들은 힘들 때 찾아온다. 마음속에 쌓아둔 이야기를 내려놓고 조금 가벼워진 얼굴로 돌아간다. 다시 교실로 돌아간다. 친구에게 돌아가고 가족에게 돌아간다.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나는 그들이 돌아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앉았어도 결국 사람은 떠나고 의자는 남는다. 오래 앉았던 사람도, 울면서 손잡이를 붙잡던 사람도 떠난다. 마지막까지 괜찮다고 말하던 사람도 문을 열고 나간다. 의자는 아무도 붙잡지 않는다. 그저 비어 있을 뿐이다. 빈 의자는 그냥 빈 의자가 아니라..

추천 수필 2026.10.22

틀 / 정 명 숙

틀 / 정 명 숙 가두려고 하는 게 본질이다. 자신을 꼭 닮은 물건을 만들어 내야 직성이 풀린다. 사물이야 틀로 모양을 잡는다지만 발상도 행동도 자유로운 인간마저 집어넣으려 든다. 어리석은 사람일수록 자신을 틀에 가두고 때로는 타자도 가두려 든다. 친정 부모는 매년 수확한 흰콩으로 메주를 만들었다. 다섯 말의 콩을 쑤어 메주를 만드는 일은 연로하신 친정 부모에게는 힘겨운 일이었다. 처음에는 손으로 메주를 만들었지만 점점 양이 늘어나다 보니 아버지는 나무판을 다듬어 메주 틀을 만드셨다. 어찌나 정교하게 만들었는지 매끈하고 예쁘게 나오는 메주를 볼 때마다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몇 년 전, 아버지가 떠나시던 해 심었던 흰콩을 수확하니 한 말 반 정도가 되었다. 작물도 주인의 손길이 끊기면 열매를 맺지 못하..

추천 수필 2026.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