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계단 / 장 란 순
불현 듯, 학창시절이 그리워 모교가 있던 고향으로 길을 나섰다. 두 세 시간만 달리면 도착하는 거리인 것을 왜 그리 먼 곳으로 생각하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사라져 버린 교정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까? 특별한 이유가 없었음에도 수십 년을 그렇게 잊고 살아왔었나 보다.
학교가 있던 곳에 도착해 보니 내가 친구들과 공부하던 건물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군청 건물이 들어 서 있다. 친구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며 오르내렸던 113 계단이 지금은 수가 줄어 79개만 남았다. 나머지 계단이 왜 없어졌는지 모르겠으나 마치 내 추억의 일부분이 사라진 것만 같아 아쉽다. 시멘트로 견고하게 만들어져 튼튼했던 저 계단도 세월의 흐름을 어쩌지 못했을까 여기저기 이끼가 끼고 거뭇거뭇하게 부식되어 패이고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다.
한 칸 두 칸 계단을 오르노라니 학창시절의 추억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단발머리에 까만 교복의 흰색 칼라를 반짝이며 친구들과 어울려 학교 다니던 시절, 계단을 중앙에 두고 양쪽 편에 울창하던 아카시아 나무는 봄이면 향기로운 꽃 향을 풀어 놓았었다. 달콤하고 향기로운 꽃 향이 우리의 하루를 기쁘게 했고, 수업이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하굣길에도 어김없이 아카시아 향내는 지친 심신을 위로해주며 배웅을 해주었다. 달달한 꽃 향을 음미하며, 사춘기 소녀의 감성으로 詩語를 풀어내던 것도 어쩌면 아카시아 꽃향기에 취해서인지 모른다. 청순한 소녀의 가슴속에 꿈과 사랑이라는 단어를 슬그머니 담아주던 나무들이 이제는 고목이 되어 쓸쓸하다.
학교에 등교하면 서양 사람처럼 큰 키에, 하얀 얼굴, 높은 콧날의 미남이신 영어선생님을 넋을 잃고 바라보곤 하였었다. 선생님의 인기는 전교생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 정도로 절대적이었다. 학창시절 누구나 한번쯤 가슴속으로 느꼈을 스승님을 향한 숭고한 사랑과 존경심은 먼 훗날까지 그리움으로 간직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한 번은 수업이 무료해지는 사회 시간이었다. 빌려 온 소설책을 몰래 읽다보니 흥미진진한 재미에 빠져버렸다. 선생님이 옆에 오신 줄도 모르고 넋을 잃고 보다가 선생님께 들키기고 말았다. “요놈! 교무실로 와!” 하시며 소설책을 빼앗아 가셨다. 그날 나는 교무실로 불려가 혼쭐이 났다. 책을 빼앗긴 것도 서운했지만 더 안타까웠던 것은 소설책의 끝을 다 읽지 못한 아쉬움이었다. 선생님이 야속하여 공연히 삐죽거리며 피해 다녔던 생각이 아련하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오월이 오면 학교에서 ‘아카시아축제’ 가 열린다. 학교를 졸업한 동문회가 주축이 되어 스승님들을 모시고 지나간 시간 속에 남겨진 추억들을 끄집어내며 웃음꽃을 피웠다. 사춘기 단발머리 소녀시절, 아직 세상의 이치를 다 알지 못했던 성장기 청춘의 여리고 흔들렸던 영혼을 살찌도록 도와주시고 감싸주셨던 은사님들이 보고 싶다. 지금도 건강하신 모습으로 살아 계시는지 궁금하다. 많은 은사님들이 이미 하늘의 별이 되셨을 테지만 그래도 살아계신 분들이 계신다면 더 나이가 들어 잊혀 지기 전에 만나 뵐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방과 후 음악실에 모여 수 없이 연습했던 가곡 '청산에 살리라'도 같이 불러보고 싶다.
모교의 전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양지바른 언덕에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아담한 2층 건물로, 113개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만 정문에 들어설 수 있었다. 봄이면 울타리에 노란 개나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물감으로 수채화를 그려 넣은 것처럼 강렬했다. 살랑 살랑 봄바람이 불때마다 연못가 수양버들가지는 풀어 헤쳐진 실타래처럼 하느작거리며 소녀들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하였고, 화단 가득 피어있던 장미꽃의 화려함은 눈이 부셨다. 파란 하늘이 점점 높아지는 가을이 되면 단짝 친구와 학교 뒤 한적한 오솔길에 핀 코스모스 길을 걸으며 꿈을 키우지 않았던가. 어쩌다 운동장 밑에 자리한 기차정거장에 수학 여행단을 태운 기차가 기적소리 울리며 지나가기라도 하는 날엔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하얀 손수건을 흔들어 주었었다. 남학생들은 휘파람을 불며 신이 나서 주소를 적은 쪽지를 창문으로 던지기도 하였는데, 그런 모습을 보는 즐거움은 사춘기 소녀들의 가슴에 이성에 대한 그리움을 잉태시키지 않았나 싶다.
중 고등학교 6년을 오르내렸던 학교에서의 추억은 즐거움 못지않은 아픔과 아쉬운 추억도 깃들어 있다. 어쩌다 늦장을 부려 지각이라도 하는 날엔 눈앞이 캄캄해졌다. 113개나 되는 높은 계단을 몇 칸씩 뛰어 오르다 보면 온 몸이 땀으로 흘렀고, 하얀 교복이 땀에 촉촉이 젖은 채로 등교를 해야 했다. 체육시간에 집합이 늦었다고 계단을 수없이 오르내리도록 하여 단체 벌을 받는 모습을 본 남학생들이 우리의 다리를 보고 ‘무수다리’ ‘알통다리’라고 놀리곤 하였었다.
언제부터인가 주변에서 ‘여학교가 높은 곳에서 눌러 남학생들이 기를 못 피는 것이라고 아래로 내려 와야 된다’는 이야기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더니 결국 여학교라는 명칭이 없어지고 남녀공학이 되고 말았다. 학생 수의 감소로 어쩔 수 없이 남녀로 분리되어 있던 학교를 통합한 것이지만 그 소식을 들은 졸업생들은 너나없이 안타까움에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113 계단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높은 곳에 건물을 지어 통치하려고 건축하였다고 한다. 공동묘지가 있던 자리라는 이야기 때문인지 아무도 없는 음악실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고도 하였고, 으스름달밤 뒷산 쪽에 있는 수돗가에서 여인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목욕하는 걸 보았다는 풍문이 돌기도 하였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공연히 오싹하여 서둘러 내려오곤 하였건만 이젠 모두 사라진 전설속의 이야기일 뿐이다.
학교는 폐교가 되었지만 발자취만은 남겨두자는 동문들이 뜻을 모아 계단 초입에 기념탑을 세우고 단발머리에 교복 입고 책가방을 손에 든 동상도 세웠다. 졸업생이라면 동상을 볼 때 마다 학창시절의 자신의 모습이라고 떠올릴 것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모교가 없어졌다는 것은 너무나 큰 상실감이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했던 소녀시절 6년 동안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며 생활했던 공간이 사라져 버린 것은 못내 아쉽기만 하다.
졸업이 아쉬워 친구들과 줄지어 계단에 서서 기념사진 촬영을 한지 엊그제 같건만 무심한 세월은 덧없이 흘러만 갔다. 이제 흰머리에 잔주름이 늘어가는 노년의 문턱에서 그 싱그럽던 젊은 시절이 생각나는 것은 어쩌면 남은 내 인생의 마지막 부분을 정리할 때가 되어서 인지도 모른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발걸음을 돌리려니 기념탑에 세워진 동상이 자꾸만 손을 흔드는 것만 같다. 잊지 말라고. 폐교가 되었어도 소녀시절 꿈꾸었던 교정의 그리움을 결코 잊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것만 같다.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이 다시금 머리속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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