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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정

일상에서

by 장대명화 2011. 1. 20.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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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 정

 

  함초롬히 피어 있는 들국화가 향기롭다.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묻어나는 꽃향기에 벌 나비가 모여든다. 꿀단지를 보기라도 한 듯 벌과 나비의 날개 짓이 빠르고 경쾌하다. 만물이 풍성해지는 가을이 손짓하는 것을 보니 곧 친구들과 어울려 하루를 재미있게 보낼 기대감에 기분이 좋아지고 어깨가 덩실거려진다.

  해마다 시월이 되면 고향 초등학교에서 총동문회가 주관하는 운동회가 열린다. 그동안 초대장을 받고도 참석한 적은 몇 번 안 되지만, 올해는 친구들과 다 같이 모여 하루를 재미있게 지내고 싶다는 한 친구의 전화에 참석하겠노라고 선뜻 대답을 하였다.

  고향 나들이를 한다고 생각하니 며칠 전부터 가슴이 설렜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뛰어 놀던 교정과 동네어귀 그리고 고향집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가슴에 쌓아 놓은 보물인양 하나씩 꺼내 보는 재미가 있다. 그럴 때마다 수십 년 전 친구들의 올망졸망한 얼굴들이 다가오고 친구들과의 수많은 일화들이 냇가에 던져놓는 돌멩이의 파문처럼 기억 속에서 퍼져나가곤 했다.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도 있고 아프고 아쉬웠던 순간도 있었으나, 세월이 흐른 지금은 모두가 아름답고 소중한 기억들이다.

 

  오늘따라 날씨도 화창하다.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한가로이 두둥실 떠가고, 길가에 한들거리는 코스모스가 고향으로 오라고 손짓한다.

  ! 내 고향이다. 읍내로 들어서는 입구, 가로수로 심어 놓은 감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감이 노랗게 익어간다. 전국적으로 가로수를 감나무로 심어 놓은 곳이 많지 않지만 감의 고장답게 내 고향 영동은 감나무가 가로수를 대신해주는 품격을 자랑한다. 거울을 꺼내 얼굴을 살펴본다. 화장도 곱게 잘 되었다. 순간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이러나 싶어 속으로 웃는다. 옷차림새를 다시금 매만지고 정문으로 들어섰다. 벌써 운동장 한 가운데에서는 영차~ 영차~ ~영차 줄다리기 한판이 벌어졌다. 기수들은 모두 줄다리기에 정신을 빼앗기고 한쪽에서는 신나는 음악에 맞추어 노래 소리도 흥을 돋운다.

  운동장을 중심으로 가장자리에 졸업생들의 기수 순번에 따라 천막을 설치해 놓았다. 나는 우리 기수들이 자리한 천막을 찾아 들어갔다. 간이 식탁에는 맛있는 음식들을 푸짐하게 차려 놓았다. 몇몇 친구들은 이미 마신 술이 얼근하게 올랐는지 한껏 고조된 목소리가 웃음소리에 섞여 시끌벅적하다. 자리를 찾아 온 나를 반갑게 맞아 주는 친구들과 선후배도 있다. 일 년에 한번 볼까 말까한 관계임에도 고향 선후배라는 고리가 이렇게 친근하고 기분 좋게 해준다. 역시 고향사람들의 마음은 포근하고 다정하다.

 

  얼마만인가! 금방 알아본 친구도 있지만 몇 십 년 만에 만나니 기억조차 가물거려 알아볼 수 없는 친구도 있다. 친구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여 얼마나 민망한지 얼굴이 화끈해 온다.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저 친구가 왜 내 머릿속에는 없는 것인지 야속하기만 하다. 얼버무리며 인사를 건네는 내 표정이 친구에게는 어떻게 보였을까. 공연히 미안해졌다. 동창들이 모인 자리는 지나온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날씬해진 몸매를 자랑하는 친구에게는 이 나이에 그런 몸매를 유지하고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하여 비결을 묻기도 하였고, 개중에는 부와 명예를 운운 하며 우쭐대는 친구도 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흰머리에 주름살, 검버섯으로 얼룩진 얼굴이 많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생긴 어쩔 수 없는 훈장이다. 허약한 친구가 보이면 측은하게 생각되어 가슴이 짠해진다. 잘나고 못난 친구들이 뒤섞여 있어도 그게 무슨 대수인가. 아직 마음만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 친구에게 젊다거나 예쁘다고 말하기도 하고 예전모습 그대로야라는 말을 주고받는 우리는 사실이 아닌 줄 알면서도 순수한 우정의 표현이라는 생각에 행복해 했다.

  이제 현직에서 물러나 있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지만 월등하게 공부를 잘하던 친구는 역시 박사에 교수님이 되었고, 의사, 교사, 약사 등 직업도 다양했다. 꼿꼿하게 고향을 지키며 사업을 하는 사장님친구 내외는 늘 친구들에게 베풀며 반갑게 맞아주어 감사하다. 그러나 농사를 지으며 성실하게 살던 친구가 불의의 사고로 고인이 되었다는 말엔 가슴이 먹먹해졌다.

  동심으로 돌아간 우리들은 오늘 하루만이라도 온갖 시름 모두 털어버리고 유년시절 이야기들로 꽃을 피웠다. 남자 친구들은 왜 그렇게 심술궂었던지, 공기 돌 놀이를 할 때면 공기를 빼앗아 가고, 고무줄놀이를 하면 면도칼로 고무줄을 끊어놓기 일수였다. 더 심한 친구는 여자애들의 치마를 걷어 올리며 놀리기까지 했었다. 지나가는 친구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친구는 선생님에게 들켜 꾸중을 듣고 여학생 교실 복도에서 손을 들고 벌을 서기도 했었다.

  그 중에서도 지금까지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6학년 때의 일이다. 여자 반 교실은 남자 반 교실을 통과해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하루는 남자애들이 복도 양쪽으로 나란히 줄을 지어서서 지나가는 여자애들을 놀려댔다. 그 놀림이 싫어 여자 친구들은 화장실을 쉽게 가지 못했고, 결국 소변을 참지 못해 교실에서 실례했던 사건은 당시 친구들에게 웃지 못 할 이야기였었다.

  나에게도 아련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남자애들이 차렷 자세로 서 있는 복도를 용기를 내어 지나가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내 발을 걸었다. 휘청거리며 넘어지려는 나를 남자애 하나가 붙들어 주었고, 나는 넘어지지 않고 지나갈 수 있었다. 그 후 그 남자친구의 모습은 의젓하고 늠름하게 내 눈에 머물렀고, 어쩌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공연히 얼굴이 붉어져 일부러 피하곤 하였다. 문득문득 고향을 떠올릴 때면 내 마음속 유년의 추억으로 자리한 그 친구를 그리워 한 것은 풋사랑이었을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천진스러웠던 동심을 간직 한 친구들을 보니 참 어려웠던 세상을 잘도 지내주었구나 하는 고마움이 생긴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도 있다. 힘겨웠던 시절을 억척스럽게 노력하며 견디어온 친구들이 이제는 모두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하다가 퇴직을 했다. 부단히 노력하여 이룬 부와 명예, 그리고 자식들을 잘 길러 분가시켜 놓고 이제는 나름대로 여유와 행복을 만끽하며 지내고들 있다고 하니 이 얼마나 기분 좋은 소식인가. 인생은 육십부터라고 한다지만 이제 부에 대한 욕심도 명예에 대한 집착도 내려놓고 곱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함께 가고 싶다.

 

  풍요로운 이 가을! 흥겨운 음악소리가 울려 퍼지는 운동장에 축제가 점점 더 무르익어 간다. 오늘 만난 친구들이 내년에도 다시 이 자리에 모였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우리들의 영원한 건강과 우정을 위하여!” 모두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함성이 메아리 되어 울린다. 사랑 한다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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