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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이인(同名異人)

일상에서

by 장대명화 2019. 5. 5.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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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명이인(同名異人) / 장 란 순

                                                                                                                

  사람이 출생하여 생을 다 할 때까지 호칭으로 부르는 이름 석 자. 얼굴이 천차만별 이듯 이름도 다양하다. 저마다 태어날 때 조부님이나 부모님이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귀하게 쓰라고 지어주는 이름이지만 내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름을 갖게 된다. 아름다운 이름, 어렵거나 쉬운 이름, 한글이름, 종교에 따라 세례명, 불명을 사용하는가 하면 외래어로 지은 이름도 있다. 생면부지의 사람이라 해도 이름을 먼저 대하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상상하게 된다. 이름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외모나 인품과는 전혀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이름은 그 사람을 대변해 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듣기만 해도 아! 그 사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이름 자체만으로도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사람도 있다. 학교에 다닐 때는 이름에 따라 별명도 생기고,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다. 놀림을 당하는 사람은 이름을 바꾸고 싶었을 것이나 처음출생신고 한 한자 이름을 개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근래에 와서야 위화감을 주거나 개인의 사유에 따라 개명 할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다.

  이름도 유행을 따라가는 것일까. 손주가 태어난 후 유명하다는 작명소를 찾아가 이름을 지어주었다. 귀한이름으로 지었다고 생각했건만 손주가 다니는 소아과에 같은 이름의 아이가 열 한 명이나 있단다. 개인의 사주와 배경 등 여러 가지 요소를 감안하여 잘 지었다고 생각하였지만 같은 이름이 많다는 것은 작명소에서도 현대에 맞는 인기 있는 이름으로 지어 주는 게 아닌가 싶다.

 

  문학회 모임 자리에서 지인 한 분이 누가 이름을 지어주었느냐고 넌지시 묻는다. 의아해 하는 내게 성명이 같은 사람을 알고 있어서란다. 뜻밖이었다. 나와 동명이인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6.25전쟁이 발발하고 한 달 뒤에 칠남매 중셋째 딸로 태어났다. 늦은 결혼을 하신 부모님이 첫딸을 낳았지만 그 후 태기가 없으신 어머니는 몸에 좋다는 온갖 약을 다 구해먹고 칠성님 전에 기도드려 5년 만에 아들을 낳았다. 집안에 경사가 났어도 아기 때 사고로 병을 얻어 제 구실을 못하겠다 싶었으니 그 안타까움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가 있었을까. 남아선호가 뿌리 박혀있던 시절이라 또 아들 손자를 바라던 조부님은 첫째 언니와 둘쨰, , 손녀딸을 셋씩이나 보았으니 매우 섭섭하였었나 보다. 내가 태어나고는 대문에 거는 금줄을 걸어주지 않았단다. 그 후 남동생이 태어나니 크게 기뻐하시며 남동생 본 손녀딸이라고 정작 아들 손자보다도 나를 더 귀히 여겨 주셨던 것 같다. 장날이면 호박엿이나 눈깔사탕을 사다 슬쩍 내 손에 쥐어주셨다. 장에 가시는 날이면 동구 밖에 나가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곤 하였던 추억이 아련하다.

  이름이 촌스러워 싫다고 투정을 부리면 "너는 난리 날 때 출생했으니 난순이라는 이름이 맞는 거여!"하시며 내가 태어났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하였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북한군이 한창 쳐들어오는 중이라 모두 피난을 떠나야 하는데 신생아인 나를 데려 갈 수도 아니 데려 갈 수도 없었으니 얼마나 애간장이 탓 을까. 집안 어른들이 상의 끝에 명이 짧으면 죽을 것이고 명이 길면 살 것이니 안방 아랫목에 뉘어 놓고 가기로 하였단다. 피난처로는 마을에서 삼십 여리 떨어진 산속에 일제 강점기 때 일본군이 무기저장고로 사용했던 동굴 속으로 가게 되었다.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큰아이는 걸리고 작은 아이는 업고 떠날 때, 갓난아기를 떼어놓고 가야하는 어머니 심정이 어떠하였을까. 죽을지도 모르는데 자식을 놓아두고 떠나야 했던 부모님의 심정은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가슴 찢어지는 슬픔이었으리라.

 한바탕 폭격이 쏱아지다 잠잠해져 동네로 돌아와 보니 이웃집들은 거의 다 불타 잿더미가 되었고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부모님은 놀란 가슴에 헐레벌떡 뛰어 집으로 돌아오니 다행히 우리 집만은 그대로 멀쩡했더란다. 한걸음에 안방으로 들어가 보니 아랫목에서 내가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는 것이다. 너는 명이 길은 자식이구나!”하며 어머니는 기쁨에 눈물을 한없이 흘리셨다고 한다. 그 폭격에 포탄이 용케 우리 집에 떨어지지 않아 내가 살아난 것이 기적이어서 감사했단다. 만약 내가 그 때 잘못되었다면 부모님은 가슴에 대못이 박히고 평생 죄인처럼 살아가셨을 지도 모른다.

 

  민족상잔의 비극 6.25, 이맘때가 되면 감회가 새롭다. 그 치열했던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어간 젊은 청년들오랑캐들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피난민들, 끝내 북쪽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살아가는 실향민들의 한은 어찌할까. 통일의 그 날을 염원하는 이산가족들의 만남은 또 언제 이루어질 수 있을지 민족의 숙원일 것이다.

  전쟁 중에 태어나 살아남은 나는 유년시절을 가난 속에서 지냈다. 어디 나 뿐일까. 전쟁이 쓸고 간 폐허 속에서 입을 것 먹을 것이 부족하여 하루 한 끼도 먹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학교 급식소에서 나누어 주던 옥분 죽과 우유 한 컵은 배고픈 아이들의 생명줄이었다.

 

  비록난리가 났을 때 태어났다고 하여 이름을 난순이라 하였어도 한자로 쓰면 사군자인 난초 란()’순할 순()’을 쓴다. 이는 조부님이 난꽃처럼 아름답고 기품 있는 여인으로 유순하게 잘 크라는 뜻으로 지어 주셨다고 한다.

  불현 듯 내 이름을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동명이인이 2명이다. 한사람은 대전에 거주하는 현직 공무원이었고, 한사람은 푸른솔문인협회 회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한사람의 동명이인이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누구인지 궁금해진다. 그 사람도 나처럼 전쟁 통에 태어나 난순이라고 지은 것일까? 지인이 말했던 동명이인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더욱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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