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땜 / 장 란 순
새해 첫 날이다. 어디에선가 새벽을 알리는 수탉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얼마 만에 듣는 소리인가, 세월이 변하면서 도심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기란 쉽지 않다. 반가운 마음이 앞서는 것은 사라져가는 옛 소리를 들으며 유년의 정겨운 기억들을 추억하기 때문이다.
서둘러 집을 나섰다. 사위를 분간하기조차 어두운 이른 시간, 신년 해맞이 장소인 문의면 양성산에 위치한 문화재 마을로 간다. 매년 1월 1일 문화재마을엔 해맞이 행사가 열린다. 연예인들이 출연하기도 하고 마을부녀회에서 가래떡과 따뜻한 차를 대접하는 훈훈한 행사다.
마치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닮았다는 대청호반이다. 양성산에 올라 바라보노라면 자욱한 물안개가 걷히고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이 한 폭의 산수화다.
찬란한 태양을 맞이하며 외치는 수많은 인파들의 함성이 메아리가 되어 온 산야에 울려 퍼진다. 한 해의 꿈과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외침일 것이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벅찬 감동이 밀려온다.
왜, 올해엔 가던 길을 멈추고 다른 장소에서 해맞이를 하고 싶었을까? 늘 가던 곳 양성산으로 가자는 남편의 만류를 뿌리치고 무언가에 이끌리 듯 김수녕 양궁장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양궁장이 위치한 낙가산입구로 들어서니 차량들이 붐빈다. 청주시내에서 가장 가까운 해맞이 명소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오를 수 있는 낙가산을 선호하는 듯하다.
군데군데 지난해에 내렸던 하얀 잔설이 듬성듬성 남아있다. 등산로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여명이 밝아 오니 힘이 솟는다. 거침없이 오르는 발걸음마저 가볍다. 정상까지는 무리일 것 같아 산중턱에서 멈추었다. 점점 사람들이 많아진다. 젊은이들은 빠른 걸음으로 정상을 향해 올라가고, 완만한 중턱에는 연세든 어른들이나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이 자리를 잡는다. 올라가는 사람이나 중간에 멈춘 이들 모두의 표정이 맑고 환하다. 새해 첫 해맞이를 한다는 각오가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삼삼오오 서서,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며 숨을 죽이고 동쪽 끝을 응시한다. 드디어 한 점 빨간 불덩이 같은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와! 와! 와! 너나 할 것 없이 소리치는 함성이 우렁차다. 모두의 마음은 나, 너, 우리, 한마음이 되어 좋은 한 해가 되기를 소망을 담아 외친다.
해맞이를 마친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 하산하기 시작한다. 우리도 무리를 따라 내려갔다. 등산로 초입을 500m쯤 남겨두었을 무렵, 내가 내리막길이라는 것을 감지한 순간 아차! 발을 헛디뎌 발목이 삐끗하더니 미끄러지고 말았다. 당황하여 엉덩방아를 찧은 것이 창피하고 부끄러워 얼른 일어섰다. 남편에 의지해서 내려가려 하여도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주저앉은 나를 보고 사람들이 모여든다. 낙가산을 한눈에 꿰고 있다는 어떤 분은 선뜻 업어서 내려다주겠다고 한다. 엉거주춤 하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다가와 걱정과 위로를 해주고, 119에 알리는 사람도 있다. 산행 인심이 이렇게 따뜻할 줄이야, 몸 둘 바를 몰랐다. 불과 몇 분이 지났을까. 앰뷸런스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십 여 명의 119구급대원들이 들것을 메고 올라왔다. 다친 발목의 상태를 확인 한 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나를 들것에 올린 뒤 산을 내려왔다.
갑자기 일어난 이 사고를 어떻게 받아 드려야 할까. 느닷없이 왜 찾아왔느냐고 산신이 노하셨나, 낮은 산이라고 만만히 보았던 나에게 일침을 가한 것일까? 순간의 방심이 화를 부른 어처구니없는 사고라고하기엔 후유증이 컸다. 통 깁스를 한 다리로는 꼼짝 할 수가 없다. 일거수일투족을 누군가에 의지하여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 그 동안 건강한 두 다리로 생활했던 세월이 축복이었나 보다. 한쪽 다리가 있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현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내가 좋아하는 산책로를 예전처럼 걷지 못하는 건 아닐까? 여행은 할 수 있을까? 갑자기 온갖 망상이 솟구친다. 다리가 불편하여 휠체어를 탄 사람들을 보며 그저 안됐다는 생각을 했을 뿐 무심히 지나쳐 버렸었다. 내가 겪어보지 못했기에 그 아픔을 알지 못했다. 평생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고통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다. 주변을 조금만 돌아보며 그들에게 따뜻한 관심과 격려를 보냈더라면 이렇게 부끄럽지는 않았을 것을.
이제 나이에 걸맞게 과욕을 부리지 말아야겠다. ‘만사는 불여튼튼’이라고 낙가산에서의 낙상은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마음가짐으로 살라는 산신의 경고일지 모른다. 누군가, 새해 첫날 한해의 액땜을 하였구먼! 라고 말하는 덕담도 예삿말로 들리지 않았다. 이번 사고가 모든 액운을 씻어가는 기회가 되기를, 그로 인하여 더 주위를 돌아보고 배려하는 마음을 갖도록 기회를 준 것이라 생각하고 싶다.
마치 내일처럼 걱정해 주던 산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119구급대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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