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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내 장터

일상에서

by 장대명화 2020. 5. 19.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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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우내 장터 / 장 란 순

 

  아침부터 남편이 서두르는 걸 보니 병천 장날인가 보다. 남편은 유난히 시골 장 구경을 좋아한다. 유년 시절, 장에 가면 어머니가 사주시던 주전부리의 추억 때문일까. 아니면 그동안 쉽게 잊고 살았던 추억을 돌아볼 수 있어서일까. “촌스럽다”고 지청구를 해도 막무가내다.

  청주에서 자동차로 30여분 거리의 병천 아우내는 류관순 열사가 탄생한 역사적인 고장이다. 3.1절이라 독립기념관을 참배하고 아우내 장터에 들렀더니 장날이라 많은 인파로 북적댄다. 전야제의 흔적이 곳곳에 널려 있다. 100년 전 류관순 열사와 독립을 열망하던 민초들이 토해냈던 울림을 재현했었나보다. 아우내 장터에 오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그날의 함성이 들려오는 것 같아 숙연해지곤 한다.

  아우내 장터의 대표음식은 순대국밥이다. 저렴하고 맛이 좋아 한 그릇을 먹으려면 30~40분은 족히 식당 앞에서 기다려야한다. 그래도 불평 없이 기다리는 까닭은 100여 년 전, 만세운동을 벌이던 백성의 허기진 배를 순대국밥이 달래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도 좋아하게 되었다.

  단골식당을 찾았다. 갖은 양념과 선지가 꽉 차있는 순대에 머리고기, 간 허파까지 한 접시 썰어 내왔다. 아우내 장터는 단골이 아니라도 손님상에 푸짐하게 내놓는 인심이 후한 곳이다. 배추 잎 시래기에 대파를 송송 썰어 넣어 구수하면서도 개운한 순대국밥은 한 번 먹어보면 입이 기억하는 별미중의 별미다.

  시골 장터 구경은 쏠쏠한 재미가 있다. 집에서 쓰는 소소한 물건조차 없는 게 없을 정도로 펼쳐놓은 노점상, 줄줄이 걸어 놓은 알록달록 고운 옷, 밭에서 갓 뽑아온 것 같은 싱싱한 채소와 맛깔스러운 반찬까지 판매하고 있다. 한쪽에 푸짐하게 쌓아 놓은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뽀얀 찐빵을 보니 예전에 어머니가 해주시던 빵이 생각난다. 밀가루가 귀한 시절이라 농사지어 찧어놓은 하얀 밀가루는 제사나 명절에 사용하려고 아껴두고, 밀을 찧고 남은 밀기울이 섞인 불그스레한 가루에 소다와 사카린을 넣고 숙성시켜 강낭콩을 넣고 쪄서 먹었다.

  한쪽에는 솥뚜껑을 걸어 놓고 지글지글 지져내는 김치전의 고소한 냄새가 진동하고 후루룩 후루룩 술술 목으로 넘어가는 잔치국수도 있다. 금방 순대국밥을 먹고 나왔음에도 입안에 침이 고이게 하는 예전에 즐겨 먹었던 음식들이다.

  마트에 가면 물건들이 깔끔하게 포장도 되어 있고 신선한 채소도 품목별로 쌓여 있다. 주부들은 큰 힘 들이지 않아도 깨끗하고 말끔하게 다듬어진 채소를 언제라도 쉽게 구입할 수 있다. 그러나 쉽고 편한 것만이 능사는 아니지 않은가. 시골 장날을 찾게 되면 마트처럼 깔끔하지는 않더라도 금방 밭에서 수확한 싱싱한 농산물과 가난하던 시절의 향수 한 조각은 덤으로 가져갈 수 있는 매력이 있다.

  예전의 장터는 세상소식을 주고받는 소통의 사랑방 역할을 하였고, 이웃동네 친구와 얼굴을 보며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정담을 나누는 장소이기도 했다. 농사지은 곡식이나 채소들을 가지고 나와 서로 물물교환을 하며 정을 나누는 장소이기도 했다.

  장년이 된 우리 부부에게 오일장은 기다림의 날이었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그런 존재였다. 세월이 변하면서 상점에 대한 의미도 방식도 변해가고 있다. 재래시장은 사람들에게 점점 잊혀져가고 있으며 젊은이는 편리한 마트나 대형 쇼핑몰을 선호한다. 이런 추세라면 오일장도 활동사진처럼 아련한 추억 속에만 존재하게 될지도 모른다. 북적대던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던 장날이 활성화 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파장 무렵은 열기가 더 활기차다. “싸다 싸, 떨이요, 남은 것 다 가져가요”라며 외치는 장사꾼의 목소리가 더욱 크게 울려온다. 남은 것을 다시 싸서 다른 장터로 이동해야 하는 장돌뱅이의 고달픈 외침이다. 이왕 장터에 들린 것 상인들의 짐이나 덜어주겠다는 생각으로 사야할 것과 사지 않아도 되는 것 까지 한 보따리 샀다. 도움을 주는 것 보다는 내가 덤을 얻어가는 기분이다.

  옛 추억 속을 거닐며 그리움 한보따리 풀어 놓고 온 것만 같은 장터, 두 손 가득 산 물건을 집어 들고 속으로 외쳐본다. 다음 장날 또 와야지, 떼어 놓는 발걸음이 상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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