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신인문학상 시상식에 문우님들과 서울 중구 예장동 문학의 집으로 향했다. 가끔 다녀가기도 하였지만 서울 거리가 너무 변하여 그 옛날의 모습이 아니다. 하긴 강산이 변하여도 몇 번이나 변하였으니 어찌 그 때의 모습이 남아 있을 수 있을까?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는 도로와 빠르게 달리는 차량,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친 웅장한 초현대식 건물들, 어디를 둘러보아도 빌딩의 숲으로 이루어진 곳이라 주눅이 들 정도지만 과연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라는 실감이 났다.
문학의 집은 남산 아래 숲이 우거지고 새소리 들리는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뒤편에 우뚝 서 있는 남산타워를 바라보니 불현듯 그 옛날의 서울생활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60~70년대의 남산은 서울 시민들이 가볍게 오를 수 있는 등산로였고 휴식 공간 이었다. 특히 야외음악당은 음악회가 열리기도 하였지만 만남의 장소로 더 유명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고향에서 올라오는 친구들을 만나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우정을 나누었고, 미래를 설계하기도 하였는데 이제는 흰머리 늘어가는 노년이 되어가니 격세지감이 느껴질 뿐이다.
여고졸업반 이던 가을 학기에 나는 단짝 친구와 함께 국립현대미술관에 입사하였다. 그 당시 경복궁에 현대미술관이 개관되면서 국전이 열리게 되었다. 개관 첫 회에 열리는 국전이어서 전 직원들이 철저한 준비를 하였다. 각 분야에 걸친 예술 작품들을 전시해 놓은 개관 하루 전날, 고 박정희 전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는 예술에 관심이 많은 분으로 제일 먼저 관람을 한다는 것이다.
청와대에서 경복궁으로 들어오는 쪽문이 열리더니 황금색 한복을 차려입고 사뿐사뿐 걸어오는 영부인의 자태는 곱고 우아하였다. 직원 모두 긴장하여 맞이하는데, 단 한 명의 수행비서와 조용조용 들어와 일일이 악수를 청하는 게 아닌가. 대단한 행차인줄 알았던 우리는 의외였다. 양손을 꼭 잡아주며 힘들지 않으냐, 문제점은 없느냐 격려해주는 말씀이 어찌나 따스하고 다정한지 평범한 어머니의 모습 같았다. ‘국모는 하늘에서 내려준다’는 옛 어른들의 격언을 생각하니 영부인과의 만남은 자랑스러웠다.
전시회 기간 중 저명한 작가들을 만나게 된 것은 예술적 안목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학창시절 수업시간에 공부할 수 없었던 예술세계의 깊은 내면과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그분들을 만나면서 알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전시 된 목록의 작품 내용을 관람객들에게 해설 하는 일은 보람이었다. 또한 모교에서 은사님이 후배들을 인솔하여 관람하러 오셨을 때, 사회생활의 첫 발을 내딛는 제자들이 최선을 다하는 것을 보며 대견하다고 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당시 시골 학교에서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 할 수 있는 기회가 적었다. 더구나 서울까지 전시장을 찾아오기란 어려운 여건이었다. 제자들을 찾아 먼 길 오셔서 관람을 하신 은사님과 후배들에게 난생 처음 받아본 봉급으로 음식을 대접 하며 후배들에게 우쭐했던 기억이 새롭다.
바늘에 실 가듯 학창시절 때부터 단짝이던 친구와 함께 근무하는 일은 참으로 행복했다. 가끔 잔디밭에 않아 점심 도시락을 먹으며 나누는 담소가 직장생활의 활력이 되기도 하였고, 틈틈이 둘러보는 경복궁 내의 궁궐들은 격조 높고 기품 있는 왕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경회루를 바라보면 연회가 열리는 장면이 연상되기도 하고, 연못 한가운데 떠있는 향원정으로 건너가는 아치형 다리에서, 화려한 궁중의상을 갖춘 왕과 왕비가 신하들을 거느리고 망중한을 즐기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하였다.
출 퇴근 길은 흥례문을 통과하였는데 출근 길 친구와 정문 앞에서 만나 조잘대며 궁내로 들어서면 맑고 신선한 공기부터 달랐다. 잘 가꾸어 놓은 정원에 들어온 듯 새들이 지저귀고, 정교하게 손질 된 나무와 아름다운 꽃들의 향기는 도심에서 느낄 수 없는 자연속의 정취였다. 현대에서 과거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생각을 하며 친구와 정담을 나누며 걷던 그 길이, 지금도내젊은 날의추억으로 마음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시간이 촉박하여 경복궁을 다녀올 수는 없었어도 명망 있는 교수님들의 강의도 들을 수 있었고, 등단하시는 분들께 축하의 박수를 보낸 나는, 짧은 외출 속에서 과거를 회상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여행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