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이 깃든 청평사 / 장 란 순
어디를 둘러보아도 만산홍엽이 아름다운 계절 가을이다. 가을을 타는 나무들은 벌써 예쁜 색동옷으로 치장을 하고 맵시를 뽐내고 있다. 한가롭게 단풍 구경을 하며 다녀올 사찰을 찾다가 청평사로 행했다.
청평사는 고려 광종24년(973) 영현스님이 백암선원으로 창건 후, 폐사가 되었다가 1068년(문종 22) 이의(李顗)가 중건하고 보현원(普賢院)이라 하였다. 1089년(선종 6) 이의의 아들인 이자현(李資玄)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자 도적이 없어지고 호랑이와 이리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하여, 산 이름을 청평(淸平)이라 하고 절 이름을 문수원(文殊院)이라 부르다가 1550년 보우 스님이 크게 중건하여 청평사라 불렀다한다.
청평사 입구에 들어서니 만추의 가을이 여기도 깊숙이 자리했다. 일찍 색동옷을 입었던 나무들은 홍엽을 우수수 쏟아낸다. 바람에 흩어져 나부끼는 낙엽이 도로를 덮으며 내 발밑에도 떨어진다. 융단을 깔아 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길을 자연의 향기에 취해 사각사각 낙엽을 밟으며 걷는 나는 가을여인이 된다. 물 흐르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오르는 길을 따라 계곡도 함께 가잖다. 물이 나를 따라오는 것인지 내가 물을 따라가는 것인지 물소리와 함께 걷는 내 발걸음도 경쾌하다.
계곡을 따라 오르다보니 여인의 동상이 살포시 앉아있다. 공주를 휘감고 있는 상사뱀의 전설이 깃든 동상이다. 여기에는 슬픈 전설이 서려있다고 한다. ‘옛날 당나라에 공주를 사모하다 죽은 청년의 혼이 상사뱀으로 변하여 사모하던 공주의 몸을 감고 떨어지지 않고 있었단다. 신라의 청평사가 영험하다는 소문을 듣고 청평사를 찾아온 공주는 청평사 입구에서 뱀에게 절에서 밥을 얻어가지고 오겠으니 잠시 풀어달라고 애원하였고, 뱀은 공주의 말을 믿고 풀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절로 들어간 공주는 나오지 않았고, 공주를 기다리다 지친 상사뱀이 공주를 찾으러 청평사로 들어가려고 절문(회전문)에 들어서는 순간 폭우와 함께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상사뱀이 맞아 죽고 말았단다. 상사뱀이 죽어서 떠내려 오는 것을 본 공주는 상사뱀이 가련하다는 생각에 정성껏 묻어주고 구성폭포위에 청년의 혼을 위로하는 석탑을 세운 후 귀국하였다고 한다.
전해오는 전설이라지만 젊은 청년의 사랑이 얼마나 애절하고 지고지순하였기에 죽은 혼이 뱀이 되어서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감싸 안고 죽음을 불사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사랑을 진정 고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사랑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집착이 빚은 악연일까. 생각하기에 따라 다를 수는 있겠으나 못다 이룬 사랑이 그 청년에게는 고귀한 사랑이었을 것이다.
조금 오르니 거북바위가 떡 버티고 서서 나를 맞이한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서늘하다. 이 폭포는 참선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아홉 가지의 소리로 들린다 해서 구성폭포라고 한단다. 나도 가만히 폭포소리를 들으며 앉아보았다. 내가 셀 수 있는 소리는 아홉 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 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다. 득도하지 못한 탓이리라. 이곳에 앉아 도를 득했을 선승들은 폭포에서 쏟아지는 물소리에서 중생의 번뇌를 씻고 부처님의 자비로우신 은혜에 귀의하여 해탈의 경지에 들어서지 않았을까. 그분들이 만들고 싶었던 정토의 세상이 빨리 도래하기를 빌어본다.
산굽이를 돌아가는 길목마다 형형색색의 단풍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바라보는 눈이, 살포시 밟히는 낙엽을 걷는 발이, 경치의 아름다움에 취한 가슴이 호사를 누린다. 절 가까이에 이르니 아담한 연못이 보인다. 물위에 동동 떠다니는 단풍잎이 하도 고와 물속을 들여다 보았다. 거울처럼 투명한 물속에 비치는 여인의 모습이 낯설다. 왜 낯설어 보이는 것일까. 젊은 날의 풋풋함은 다 어디로 갔을까? 분명 내 모습임에 틀림없지만 중년의 고개를 넘어가고 있는 내 모습을 보니 마음이 서글퍼진다. 흐르는 세월을 어찌 막을 수 있으리. 인생무상이 느껴질 뿐이다.
계단을 오르니 회전문이다. 회전문이라 하여 움직이며 돌아가는 문이 아니다. '공주와 상사뱀' 전설에 나오는 뱀이 이 문을 돌아나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이 돌고 돌아가는 윤회사상에서 비롯된 것처럼 중생들에게 전생을 깨우치기 위한 마음의 문은 아닐 런지…
회전문 양옆 회랑에 빼곡히 연등을 달아 놓았다. 울긋불긋 색색의 고운 등에는 수험생의 합격을 소망하는 글이 붙은 등, 무병장수를 비는 등, 결혼 성취 발원이나 자식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부모의 정성스런 등도 있다. 부처님의 가피를 받고 싶어 하는 중생들이 각자의 사연들을 연등 속에 가득 담아 걸어 두었다. 모두 원하는 소원들이 성취되기를 나도 마음속으로 빌어 보았다.
이 세상에 올 때는 아무것도 걸치지 못하고 태어나, 세상을 떠날 때 고운 옷 한 벌 잘 맞춰 입고 떠나니 얼마나 큰 복이 아닌가. 욕심도 다 부질없고 욕망도 다 부질없는 것임에도 왜 우리는 살면서 그런 욕심을 훌훌 내려놓지 못하고 사는 것일까. 무엇을 하든 나를 먼저 앞세우고 살았던 세월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미안해하며 살았다면 또한 나에게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회랑을 나와 경운루에서 합장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고즈넉한 도량에 천년고찰의 고고한 숨결이 느껴진다. 오봉산자락이 나를 포근히 감싸 안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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