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찌개 / 장 란 순
날씨가 제법 쌀쌀해져 옷깃을 여미게 한다. 어느새 겨울의 문턱에 다가선 느낌이다. 이 집 저 집 김장준비를 하는 걸 보니 나도 김장준비를 서둘러야 겠다. 겨울이 되면 가장 중요한 음식이 김장김치이고, 식구들이 좋아하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우리 집은 김장을 많이 담근다. 찌개, 전, 만두, 볶은 밥 등 김치만 있으면 한 끼 식탁을 차리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매일 세끼 식사준비를 해야 하는 주부의 입장에서 이보다 고마운 식재료는 없을 듯하다. 요즘처럼 맛있는 음식이 넘쳐나는 세상에 무슨 김치 타령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김치를 뺀 식탁은 상상하기 어렵다. 김치는 조상대대로 매일 밥상에 올려 졌던 없어서는 안 될 전통음식이 아닌가.
저녁때가 가까워오자 웬일로 남편이 다가와 “오늘은 날씨도 쌀쌀한데 돼지고기 김치찌개로 저녁을 먹으면 안 될까?”하고 말한다. 김치찌개를 찾는 걸 보니 막걸리 생각이 나는가 보다. 애주가였던 시아버님을 닮아서일까 형제 중에서 유독 남편만 술을 좋아 한다. 그것도 돼지고기 큼직하게 숭숭 썰어 넣고 끓인 김치찌개에 막걸리를 즐긴다. 그런 남편의 식성을 잘 알기에 우리 집 냉동고에는 항상 찌개용 돼지고기가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남편이 한창 젊었을 때는 술을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직장 동료들과 수시로 술자리를 만들곤 하여 투정을 부리기도 하였던 적이 있다. 밖에서 식사를 하고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심심하면 손님을 집으로 불러들여 술상을 보아야 했기 때문에 주부 입장에서는 피곤한 일이었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 그런 일들이 사라져 버렸다. 사람이 먹고 즐기는 것에도 때가 있나 보다. 근래에는 특별한 모임이 아니면 술자리에 참석하지 않으려 한다. 남편의 술자리가 뜸해지는 것을 보니 술도 근력이 좋아야 잘 마실 수 있는 것인지 마음이 짠하다.
결혼 후 남편이 교직 생활을 시작 할 때, 미처 집을 구하지 못하여 셋방살이를 할 때였다. 어느 날 남편은 퇴근 후 회식을 마치고 느닷없이 동료들을 데리고 들어와 술상을 차리라고 하였다. 예고도 없이 손님을 데리고 들어온 남편의 돌발적인 상황에 당황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었다. 부엌으로 들어가니 마침 사다 놓았던 돼지고기가 있어 김치찌개를 끊여 술상을 차려 주었다. 그런데 그 김치찌개가 입에 맞았는지 아니면 언제든 손님을 데려와도 술안주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는지 모르지만 그날 이후 남편의 술상을 차리느라 여간 고생한 것이 아니다. 남편은 한밤중에 예고도 없이 이사람 저사람 번갈아 가며 데리고 들어와 김치찌개를 끊여달라고 했다. 가뜩이나 남의 집 셋방살이 처지에서 한밤중에 요리를 한다며 시끄럽게 하는 것은 주인집에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다. 술상을 차리는 것보다 술잔이 오가며 커지는 목소리에 얼마나 가슴을 태웠는지 모른다. 남편의 낙천적인 술사랑은 같이 오는 사람들에게도 미안함을 주었는지 어떤 이는 아예 돼지고기와 막걸리를 사들고 와서 찌개를 끊여 달라고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 시절만 하여도 먹거리가 귀한 때여서 고기반찬은 봉급날이 되어야 먹을 수 있는 특식이었다. 더구나 교사들은 수업할 때 칠판에 분필로 글씨를 써야하여 분필가루를 많아 마시게 된다. 그러다보니 분필가루가 폐 속으로 흡입되면 건강을 해치게 되는데 이를 제거해 주는 가장 좋은 음식이 돼지고기라는 속설이 있었다. 공무원의 박봉에 한 푼이라도 아껴 집장만을 하여야 하고, 아이들 육아와 교육비 부담에 생활은 늘 허리띠를 졸라 매는 근검절약이 몸에 배다시피 했다. 지금은 돼지고기를 부담 없이 사 먹을 수 있는 경제적 수준이 되었지만 그 때는 귀한 음식이었다. 교사들도 월급날이 되면 속설을 핑계 삼아 돼지고기집에서 회식을 하곤 했었다. 그래도 그 시절이 그립다. 모든 게 부족하여도 서로 나눌 줄 아는 인정이 넘치던 따뜻함이 있었고, 마음만은 풍요로웠다.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남편을 보니 오늘도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끊여 주어야 할 것 같다. 못이기는 척 주방으로 들어와 밥을 안치고 찌개 거리를 준비했다. 돼지고기와 새콤하게 잘 익은 김치를 밑 둥만 썩둑 잘라내어 들기름으로 달달 볶다가, 쌀뜨물을 붓고 고추장을 풀어 감자와 양파를 넣어 보글보글 끊인다. 그리고는 큼직하게 자른 두부와 대파를 송송 썰어 넣어 다시 한소끔 끊이니 찌개가 완성됐다. 얼큰한 찌개 냄새에 좋았던지 남편은 자꾸만 주방을 들락거린다.
“식사하세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편은 얼른식탁에 와 앉는다. 후루룩~ 쩝~ 쩝~ 맛나네! 소리 연발하며 막걸리잔도 기울인다. 아무리 음식을 공을 들여 준비해도 먹어주는 사람이 맛있게 먹어야 만드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지는 법이다. 찌개를 안주삼아 막걸리를 거나하게 마셨는지 “세상만사 다 변하였어도 우리 집 찌개 맛은 변하지 않는구먼!” 한다. “그 옛날 돼지고기 김치찌개 잘 끊인다고 소문났던 거 몰랐지?”하고 묻는다. “아니, 진작 말해 주지 왜 이제 와서 이야기 하는 거예요!” 하고 되묻자 남편은 아무 말도 안하고 피시식~ 헛웃음을 웃는다. 남편의 표정을 보니 사는 날까지 자기가 좋아하는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계속하여 끊여 달라는 아부가 아닐까 싶다.
이제 나도 남편이 요구만 하면 언제든지 보글보글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맛나게 끊여 주어야겠다. 주는 것만큼 행복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김치찌개 하나로 행복한 저녁이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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