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팥빵
띵!~ 동!~ 현관 벨이 울린다. 이 밤에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의아한 마음으로 인터폰을 보니 사위가 아닌가.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짧은 시간에 별 생각이 다 든다. 현관문을 열어 주니 무언가 불쑥 내민 가방 속에서, 고소하고 맛있는 향내가나는 빵 한 봉지 를 주고 간다. 옛날 맛 빵집으로 유명세를 탄다는 곳을 찾아가 사왔단다. 우리 내외가 단팥빵을 좋아 하는 것을 아는 인정 많은 사위는 퇴근길에 종종 사다주곤 한다. 그리 달지도 않고 통팥을 넣어 씹히는 맛도 있고 적당히 간이 배어 맛있다. 단팥빵을 좋아 하는 남편은 한자리에서 두세 개는 먹지만, 나도 덩달아 좋아 하게 된 것은 어쩌면 유년시절의 추억 때문이 아닌가 싶다.
초등학교 6학년 여름 방학 때였나 보다. 막내 동생을 업은 엄마는 한 손에 보따리를 들고 한 손은 내 손을 잡은 채, 기차를 타고 다시 버스를 타고, 또 버스를 타고 찾아 간 곳 강원도 화천 최전방이었다. 그 먼 길을 차멀미를 하며 고생 끝에 큰언니 집에 도착했다. 남산 만 하게 부른 배를 부여잡고 대문에서서 반겨주는 언니가 왠지 낯설었다. 엄마의 치마 자락 뒤로 숨은 내 손을 덥석 잡고 안내한 곳은 뒤뜰에 있는 빵공장이다. 상자마다 가득 가득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빵을 바라보는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시 사람들이 제과점에서나 사먹을 수 있는 귀한 빵이 아닌가. 먹고 싶은 대로 먹으라는 언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부드럽고 달콤한 단팥빵을 먹고 또 먹었다. 실컷 먹은 뒤 그제야 밖으로 나와 주위를 살펴보니 사방은 군부대다. 큰언니는 형부와 군인부대에 간식용 빵을 납품하는 공장을 운영하며 살고 있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져 나오는 어른 손바닥만 한 앙꼬빵(단팥빵)에 솔로 물엿을 살살 바르면 반지르르 하게 윤이 나며 먹음직스럽다. 하얀 빵 위에 우유가루와 버터 황설탕으로 버무린 고물을 한 줌 수북하게 얹어 구운 곰보빵(소보로빵)은 또 얼마나 고소하던지. 빨갛게 달구어진 가마에서 철판 가득히 구어서 나오는 따끈따끈한 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입안에 군침이 돈다. 졸졸 따라 다니며 이것저것 묻는 꼬마가 귀찮기도 하련만, 예쁜 모양의 과자를 만들어 주던 인자한 제빵사 아저씨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도 커서 어른이 되면 맛있는 빵을 만드는 제빵사가 되어야지, 꿈을 키우기도 했었다.
해산날이 가까워 오는 큰 언니를 위해 엄마는 출산 준비하느라 분주하였고, 나는 동생을 데리고 나와 군부대 초소에 장난감 병정처럼 서 있는 군인아저씨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소일거리였다. 그날도 무료하여 울타리로 쳐 놓은 철조망 앞에 서있을 때다. 정문에 서 있던 총을 든 보초병아저씨가 꼬마야! 꼬마야! 부르더니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고향의 봄’을 휘파람으로 부는 게 아닌가. 휘파람을 어찌나 잘 불던지 짝! 짝! 짝! 박수를 쳐주었다. 그 후로 휘파람 소리가 듣고 싶으면 부대 정문 초소 한 귀퉁이에 서서, 군인 아저씨가 불어주는 ‘과수원길’ ‘오빠생각‘등 동요를 콧노래로 따라 부르곤 했다. 어느 날 지루해하는 동생과 놀아주는 군인아저씨가 고마웠는지 언니가 아저씨 주라며 큰 봉지에 빵을 가득 담아주는 게 아닌가. 신이 나서 빵 봉지를 울타리 안으로 밀어 넣어놓고 가져가라고 손짓을 한 뒤, 다음 날 나가 보니 빵을 놓았던 자리에 빨강색종이로 접은 편지가 놓여 있었다. “꼬마야! 고맙다. 예쁜 너를 보니 고향에 있는 또래의 동생이 생각나서란다. 짧은 글이었었던 것 같지만 고향에 두고 온 동생을 그리워하며 휘파람을 불어주지 않았나 싶다. 그 뒤에도 며칠에 한 번씩 빵을 가져다주었는데 잘 먹었다는 말 대신 휘파람소리로 신호를 보내곤 하였다.
언니는 건강한 아들(조카)을 출산하였고 엄마는 산후조리를 해주느라 정성을 드리셨다. 나는 동생을 데리고 나와 시냇가에서 조약돌을 가지고 놀기도 하고, 군부대주변의 동산에 올라 네잎 클로버를 찾곤 하였었는데……
큰언니 집에서 지낸 짧은 기간 동안, 누구인지도 모르는 군인 아저씨가 불어주던 휘파람 소리와 먹고 또 먹어도 맛이 있었던 단팥빵맛이 잊어지지 않는다.
누군가 나이가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 하더니 나도 그런 것일까?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신 큰언니지만 단팥빵을 보면, 맏딸로 태어나 친정 동생들을 살뜰히 보살펴주던 큰언니가 사무치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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