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에 스친 바람 / 장 란 순
눈이 부시도록 화창하고 청명한 날씨다. 이 좋은날을 집안에서만 보내기에는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인가 내가 살아 있다는 존재감을 느끼며 나이가 들어간다는 조급한 마음을 편안하고 활기차게 전환할 에너지가 필요할 것 같아서이다.
오늘은 모처럼 산행을 하려고 집을 나섰다. 도심 근교이지만 집에서 멀지 않아 우암산을 오르기로 했다. 청주시민들이 즐겨 찾는 산이어서일까 여러 군데에 진입로가 있다. 용담동 한방병원 방향으로 들어서니 아카시아꽃의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자극한다.
제철 만난 벌들이 꽃을 찾아다니느라 분주하다. 긴 겨울을 견디고 찾아온 봄의 따스함을 즐기는 듯 날개 짓하는 소리도 힘차다. 하늘을 향해 솟구쳐 자란 나무와 울창한 숲이 오가는 사람들을 반긴다. 바람은 가녀린 나뭇가지의 새순을 간지럽히고, 바람을 타고 흔들리는 나뭇가지는 나에게 잘 왔다고 손을 흔들어 주는 것만 같다. 한참을 오르다보니 하얗게 핀 찔레꽃의 은은한 꽃향기가 나를 이끌어 발걸음을 멈추었다. 사람들에게 그리 인기가 있는 꽃은 아니지만 나에겐 소중한 추억이 있는 꽃이다.
유년시절 담임 선생님께 주려고 등교 길에 지천으로 핀 찔레꽃을 꺾어 화병에 꽃아 드리기도 했다. 찔레꽃 향기를 맡으며 좋아하시던 선생님은 늘 고맙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얼굴이 예쁘신 선생님이 찔레꽃에 얼굴을 가져가시면 하얀 꽃송이와 어우러져 더 아름답게 보이셨던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 꽃이기에 애착이 간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오솔길이 숲으로 우거져 풀벌레 소리와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마저도 선율이 되어 울린다. 청정한 산속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나무냄새와 풀냄새 들꽃이 또 얼마나 향기로운가. 아름다운 풍경이 좋아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나무에 기대어 멋진 포즈를 취해보기도 하고, 혼자서 나를 촬영하기도 한다. 우암산의 오솔길은 이렇게 나에게 편안한 휴식처가 되어 주고, 지친 심신을 쉴 수 있도록 배려하는 장소이다. 이곳에 오면 그 누군가를 우연히 만나 많은 대화라도 나누었으면 하는 나 혼자만의 부질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기도 한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는 중이다. 초면이어도 서로 눈인사를 나누며 마주친다. 산중턱 팔각정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음악소리에 맞추어 걷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게 느껴진다. 이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난코스 오르막길이다. 몇 년 전 처음 산에 오를 때만해도 쉬지 않고 올라갔건만 지금은 같은 길인데도 오르려면 숨이 가쁘다. 체력과 나이는 비례하는 것인가 보다.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정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이마의 땀을 식혀준다.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맑은 공기를 흠뻑 들여 마신 후 주위를 살펴보니 젊은 사람과 연세 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운동을 한다. 아령을 들었다 내리기를 반복하기도 하고, 평행봉 위에서 묘기를 부리 듯 날렵하게 몸을 움직이는 사람도 있다. 맨손 체조를 하고 있는데 멀리 훌라후프를 돌리는 젊은이들이 보였다. 나도 살며시 옆으로 다가가 가벼운 것을 골라 돌려보았다. 다행히 돌아간다. 이것마저도 돌리지 못했다면 너무 부끄러웠을 것인데 그나마 흉내라도 내고 있으니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려오는 길은 자연학습 관찰로 쪽으로 향했다. 가파른 길이어서 조심조심 나무 계단을 따라 내려오니, 내가 목이 마른지를 아는 것처럼 샘터가 있다. 똑 똑 똑… 떨어지는 물소리가 잠시 쉬어가라 한다.
누가 걸어놓았을까? 색색의 표주박이 바람에 달랑거린다. 파랑색의 표주박을 골라 물을 받으니 더 맑아 보인다. 천천히 떨어지는 물이 감질나긴 하여도 청정 산속에서 만이 마실 수 있는 귀한 물이다. 한 모금씩 마시는 물이 달다. 갈증이 해소 되고 힘이 솟는 것 같았다.
길모퉁이로 돌아가니 장승마을이 나타난다.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 떡 버티고 서 있다. 외관으로 보면 위압적이다. 마을에 액운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겠다는 의지도 보이는 듯하다. 어두운 밤중에 마주했다면 크게 놀랐을 얼굴 모습이지만 오늘은 왠지 편안해 보인다. 반갑다며 나에게 대문을 열어준다. 아담한 터에 두런두런 장승가족의 이야기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곱단이, 강쇠, 칠복이, 초롱이, 바름이 등 각자의 이름을 달고 모여 사는 대가족이다. 장승들은 매일 어떤 이야기를 하며 살까. 궁금하다. 여기 모여선 장승들도 밤하늘의 별을 보며 나름대로 이야기꽃을 피우며 아침을 맞이하고, 낮에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끄러워 말문을 닫고 잠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지 정성스레 탑도 쌓아 놓았다.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왔다는 핀잔을 들을까 두려워 살금살금 들어서니 어서 오라며 통나무 의자를 내어준다. 염치불구하고 길게 누어 하늘을 보니, 흰 구름들이 유유자적 지나가고 나뭇잎에 스친 바람이 온 몸을 휘감는다. 나를 스치고 사라지는 바람 틈 속으로 햇살이 밀려든다. 따뜻한 감촉이 좋다. 지그시 눈을 감으면 꿈결인양 청아한 새소리, 바람소리, 풀 벌래 소리… 마치 다른 세상에 들어 온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무아의 경지인 듯 편안하다. 신선도 이러한 기분을 느끼기 때문에 산에서 내려오지 않는 것일까? 나도 이렇게 오후를 즐기고 있으니 신선이 된 듯싶다.
오를 때와는 반대방향이지만 사람들 발길이 뜸한 호젓한 산길을 콧노래를 부르며 길을 재촉했다.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서 있는 나무를 보며 정직함을 배우고 온갖 꽃과 벌, 나비, 새들이 마음을 즐겁게 하여주니 논어에도 '지자요수 인자요산(知者樂水 仁者樂山)'이라고 하지 않던가.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 한 점이 내 마음을 열어보려 한다. 마치 내가 선한 사람임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