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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색, 은밀한 곳에서부터 온다 / 겹/ 육탁(3편) ㅡ김 희 자

봄의 색, 은밀한 곳에서부터 온다 / 김 희 자 보여줄 듯 말 듯 애를 태우며 자연이 밀당을 하는 서툰 봄이다. 황토 집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엉뚱한 곳에서 봄을 만났다. 벽에 걸린 그림을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띄었다. 봄처녀였다. 그녀를 보는 순간 "싱싱하다!"는 말이 입에서 절로 튀어나왔다. 꽃은 바람이 지나가는 자연 속에만 피는 게 아니었다. 밋밋한 회색빛 벽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옛사람이 말했다. 봄을 찾는다고 동쪽으로 가지 마라. 서쪽 뜰에 매화가 이미 찬바람 속에 피어 있다고. 나는 먼 서쪽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고도 봄을 만났으니 뜻밖의 행운이다. 휘청휘청 봄처녀의 꽃향기에 취한다. 그림이 하도 신선해서 수줍음도 잠시 잊었다. 예전에는 이런 그림을 보면 낯이 뜨거워 눈을 감아버렸다. 내 몸..

추천 수필 2026.04.05

초록으로 가지 못한 시간 / 장 미 숙

초록으로 가지 못한 시간 / 장 미 숙 언젠가부터 꿈은 내게 현실 외 또 다른 세계가 되었다. 일상의 많은 욕구가 꿈을 통해 실현되거나 좌절되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꿈은 ‘억압된 욕망이 변형되어 나타난 결과’라고 했다. 어떤 불안이나 트라우마 같은 게 보편적 전제와 다르게 응축, 왜곡을 거쳐 상징화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론에 신빙성이 있다면 밤사이 내 의식은 꽤 낯선 곳을 헤매고 다니는 것 같다. 과거의 많은 이들을 만나고 때로는 악몽을 꾸다 가위에 눌린 적도 많다. 두려움과 불안이 심할 때면 여지없이 정체 모를 어둠의 형체를 맞닥뜨린다. 평온한 날은 꿈속에서도 자유롭고 현실로 돌아온 걸 아쉬워하기도 한다. 그건 억압된 삶 속에서 어떻게든 견뎌보고자 하는 자아의 몸부림이 아닌가 싶..

추천 수필 2026.04.01

해후邂逅의 뒤 / 김 도 환

해후邂逅의 뒤 / 김 도 환 ​인연이라는 끈은 무한의 이중성을 갖게 한다. 지나온 인과성이 어떠했는가는 잊어버렸다. 앞으로 남은 삶은 또 다른 시작의 인연으로 맺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묵은 인연이 해후의 모습으로 다가온 그 반가움은 참으로 좋았다. 누구나 그렇듯이 생활 속에서 문득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음이다. 지난 과거는 나의 삶 속에서 인연을 만들었던 나날이었고, 그 사람을 다시 만나리라는 희망은 단지 꿈일 수도 있었다. 그 만남이 뜻밖의 해후로 찾아들었다. 평생 못 만날 것 같았는데, 우연으로 시공을 넘어 만남이 찾아온 것이다. 그분과는 옛 직장에 있을 때 고객으로 만나 인연을 만들고 깊은 정을 나누었으며 피할 수 없는 사회적 이별을 하였다. 사람과의 헤어짐은 깔끔하게 해야 한다고 늘 서로 ..

추천 수필 2026.03.29

산투르 리듬과 자유의 춤 / 장 금 식

산투르 리듬과 자유의 춤 / 장 금 식 체에 걸러낸 듯 고운 모래가 바닷물에 섞인다. 모래와 물의 교감은 잠시뿐, 격랑에 쓸려 재빨리 흔적을 지운다. 갈매기가 파도에 몸을 맡긴다. 촉촉한 물기를 핥으며 바다와 한 몸이 된다. 안개구름은 춤을 추듯 곡예를 한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책장을 덮는 순간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가 그려낸 풍경들이 실제 그 바다 앞에 서 있는 듯 여러 이미지로 살아난다. ​소설의 주요 인물 '나'와 '조르바'는 크레타섬으로 떠나는 항구에서 운명처럼 만난다. 문자 세계에 묶여있고 책 읽는 사람으로 비친 '나', 야생마 같고 도발적 행동으로 죽은 지식보다는 몸의 실천을 중히 여기는 사람 '조르바'. '나'와 '조르바' 앞에서 말 없는 바다는 산투르 리듬으로 흥겹게 춤을 ..

추천 수필 2026.03.28

홋줄 / 강 현 자

홋줄 / 강 현 자 무작정 달려왔다. 서녘 해는 문을 닫은 어물전 앞에 서성이고, 텅 빈 덕장엔 건어물을 매달고 있어야 할 집게가 줄지어 하릴없이 바다를 바라본다. 후줄근하게 늘어진 목장갑 한 짝도 끝쪽에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 그나마 오징어 몇 마리가 꾸덕꾸덕 말라가는 모습에서 누군가의 손길이 가까이 있다는 추측을 할 뿐이다. 그래, 내게도 누군가가 옆에 있었지. 거대한 몸체의 숨결인가. 며칠째 내린 폭설로 출어하지 못한 낚싯배는 무지근하게 눈을 뒤집어쓴 채 숨 고르기를 하는 중이다. 아직 죽지 않았다는 듯 다시 떠날 내일을 기다리며 며칠째 저렇게 홋줄에 묶여 있었을 것이다. 깊은 한숨도, 밭은 숨소리도 아니다. 얇은 바람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길 뿐이다. 물비늘이 일렁인다. 침묵 가운데 조용한 속삭..

추천 수필 2026.03.28

동강할미꽃 / 국경을 건너온 미소 ㅡ변 종 호

동강할미꽃 / 변 종 호 전생의 업이 컸을까. 애당초 편안한 팔자가 아니었다. 깎아지른 흙 한 줌 없는 석회암 절벽의 바위틈에서 평생 견뎌야 할 운명이다. 그나마 가엾게 여긴 동강이 물안개를 내려주고 그 눈물로 연명한다는 이 꽃 앞에 서면 인간의 안온한 삶이 부끄러워진다. 암팡진 꽃망울은 세속의 원망 대신 깨달음을 구하는 굳은 수행자의 모습이다. 강원도 태백의 검룡소에서 솟구친 샘은 수만 년을 쉬지 않고 낮은 곳으로 임했다. 굽이치며 돌아가고, 여울을 흐르다 지치면 소沼에서 잠시 숨을 고르다 제 길로 흘러간다. 그 물줄기로 빚어낸 동강은 유난히 맑고 눈물도 많다. 전쟁의 포성과 막장의 붕괴로 돌아오지 못한 가장의 슬픈 사연을 보듬으며 흘러온 강. 그러니 가뭄에 타들어 가는 절벽 위의 가련한 생명을 어찌 ..

추천 수필 2026.03.27

왕과 사는 남자 / 최 재 우

영화 왕과 사는 남자 / 최 재 우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 열기가 뜨겁다. 천만 관객을 벌써 넘어섰고, 연일 언론과 방송에서 관련 소식을 다투어 전하고 있다. 주말에 심야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아내가 옅은 한숨을 쉬며 눈물을 훔치는 게 보였다. 가만히 아내 손을 잡아본다. 따스하다. 영화의 이야기는 내 예상을 벗어난다.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고등학교에서 수십 년 우리나라 역사를 가르쳐왔던 나로서는 좀 황당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흥미진진하였다. 역사의 정설(定說)을 비껴가는 문학적 상상과 엉뚱한 구성이 천만 관객을 불러오는 이유가 되었나 보다. 영화를 보고 나온 뒤에도 영화 속 장면과 스토리가 마음속에서 자꾸만 되새김 된다.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는 누구일까? ..

추천 수필 2026.03.20

스톡홀름에는 애인이 있다 / 이 용 옥

스톡홀름에는 애인이 있다 / 이 용 옥 Jongga 11, str 163 22, kisStockholm, Stockholm, Sweden JinSub Pack낡은 여행가방 속주머니에서 빛바랜 명함이 나왔다. 스웨덴? 스톡홀름? 이게 뭐라고 이렇게 깊은 곳에 꽁꽁 숨겨 놨을까? 낯선 글자들을 향해 물음표를 던지던 그녀는 살포시 웃음을 흘렸다. 아하, 그…. 스톡홀름, 쪽빛 바다를 배경으로 내려앉은 도시는 아무렇게나 셔터를 눌러도 유명 작가의 예술사진 같았다. 날씨는 청명했고 햇살 받은 가로수의 연록빛 이파리들은 유리알처럼 반짝였다. 그해 5월, 그녀는 그 도시의 여행자였다. 직장생활 20여 년 만에 얻은 안식년을 그냥 흘려보낼 수 없다는 마음에 홀로 나선 여행. 다행히 아홉 명의 여성 팀을 만나 합류하여 ..

추천 수필 2026.03.19

붕(鵬)새가 되어 / 노 상 비

붕(鵬)새가 되어 / 노 상 비 몽골의 하늘은 청명하다. 몽골 여행 마지막 날 아침이었다. 게르 문을 열고 나와서 하늘을 보니, 몸을 날려서 하늘 호수에 푹 잠기고 싶을 정도로 청명하기 이를 데 없었다. 깊은 청색의 바다 같다고나 할까. ​마지막 날 일정표에는 열트산이라는 지명이 적혀있고, 2시간 정도의 소요 시간만 표시되어 있었다. 가벼운 트레킹이려니 여기고 출발했다. 도착한 곳은 열트산 초원이었다. 열트산은 텔레지공원에서 톨 강을 가로질러 펼쳐지는 광활한 초원이다. 열트산 능선에서 흘러내린 골짜기에는 숲이 우거져 있었고, 초원에는 기암들이 솟구쳐 있어, 우리가 걷는 들판 길을 받쳐주고 있었다. 가벼운 트레킹 코스라기에는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열트산 초원으로 들어서니 넓은 들판에 야생화가 만발해 ..

추천 수필 2026.03.15

노을 공책 / 전 오 영

노을 공책 / 전 오 영 산자락에 걸린 노을이 붉다. 당신 집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주는 김 할머니의 목소리도 덩달아 붉게 물든다. 갈림길을 지나 들녘 길이 이어진다. 길 양옆으로 휘어져 있는 밭뙈기가 길을 만드는, 고적한 풍경이 다가왔다 멀어진다. 엊그제 당신도 텃밭에 마늘을 놓았다며 마을 어귀를 가리킨다. 신목神木의 귀기를 품은 팽나무 곁을 지나 공터에 주차를 한다. 먼저 내린 김 할머니가 앞서 걷는다. 길갓집 개가 짖어댈 뿐 동네는 조용하다. 초록대문 집을 지나 칠하지 않는 은빛 철 대문 앞에서 멈춰 선 할머니가 숨을 고른 후 천천히 문을 민다. 티끌 하나 없는 정갈한 마당이 초면의 어색함을 마중한다. 정면으로 보이는 일자형의 주택은 할머니의 동선에 맞게 개조한 듯 보인다. 소박하다. 할머니는 차를..

추천 수필 2026.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