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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흐르는 나의 사원 / 구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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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대명화 2025. 5. 17.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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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이 흐르는 나의 사원 / 구 활

 

기억은 지문을 능가한다. 지문은 가지 않고 행하지 않는 곳에는 찍히지 않는다. 그러나 기억은 지문만큼 믿을 것이 못된다. 가지 않았는데도 간 것처럼 착각을 일으킬 때도 있고, 행하지 않았는데도 행한 것처럼 우길 때도 있다. 이것을 심리학자들은 '착각상관'(illusorycorrelition), 다시 말하면 마음이 만들어 낸 착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걸 기억과 갈피 속에 심기만 하면 거짓이 참이 되고 없었던 것이 있었던 것으로 바뀌기도 한다.

 

기억은 덧칠 선수다. 아름다웠던 옛일은 한껏 부풀리고 추한 과거는 물감을 두텁게 발라 지워버리기도 한다. 기억은 때로 소설처럼 지어내고 삭제와 수정을 통해 보완 내지 미화하려 한다. 그래서 기억은 원음과는 조금 다른 편곡한 음일 수도 있고, 편견에 의해 편집된 비슷한 영상물이거나 멜랑콜리한 감상이 빚어낸 추출물일 수도 있다.

 

나는 가끔씩 가보지 못한 곳을 서성일 때가 있다. 그곳은, 내가 가보고 싶은 곳이다. 의식의 방황은 아름다운 여행이 되기도 하고 더러는 누추한 영혼의 안식처가 되기도 한다. 몽골이 그렇다. 어느 날 걸출한 괴짜 명인 몇 사람이 몽골 여행을 다녀와 나를 좀 만나자고 했다. 그들은 예술가들로 각자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있는 기인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몽골 어느 교외의 게르(ger·천막)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우연히 고향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누가 "그 친구도 벌써 이곳을 다녀갔을 것이다."라고 운을 떼자 모두가 "그럴 것이다."라고 동의했다고 한다. 그 친구가 바로 나라고 했다. 이날 찻집에서 만난 시인은 나의 몽골 여행을 기정사실화하고 몇 년 전에 다녀왔느냐고 물었다. 난감했다. 아직도 몽골은 나에게는 경험하지 못한 과거이거나 경험했던 오래된 미래일 뿐인데.

 

인터넷에 들어가면 '구름과 연어 혹은 우기의 여인숙'이란 블로거가 있다. 그곳에 들어가기만 하면 찌든 폐와 심장 그리고 내장까지 맑은 시냇물에 깨끗이 흔들어 씻어 제자리에 넣어주는 것 같은 음악이 울려 나온다. 사막의 모래바람이 날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집시 여인이 머리를 풀고 기막힌 슬픔을 노래로 달래고 있는 것 같기도 한 그런 음악이다. 이 블로거의 주인 이용한 님은 체 게바라식 여행을 추구하는 '붉은 여행기 동맹'의 지친 노마드로 자처하는 제대로 된 여행가다.

 

머릿속에 몽골이 떠오르기만 하면 ​이 노랫가락이 스산한 가을바람처럼 귓가를 스쳐 지나간다. 너무 허전하고 텅 빈듯하여 절로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노래의 제목이 무엇일까. 가수는 몽골인 일까. 어디서 이 노래를 구하지. 내가 몽골로 가야 하나.' 어느 날 헌책 가게에서 만난 테베트 명상음악이 이 노래와 비슷할 것 같아 들어 보지도 않고 샀지만 그건 여느 절간의 확성기에서 나오는 염불 소리와 다를 바 없었다.

 

꿈을 품으면 그 꿈이 이뤄진다기에 나도 작은 꿈 하나를 키우고 있다. 그것은 바로 몽골 유목민들의 거주 공간인 하얀 천막 하나를 사는 것이다. 그래서 팔공산 자락에 있는 '참샘 산막'옆 공터에 게르를 치고 펠트(양털)로 벽을 덮은 다음 남으로 창을 내면 정말 멋질 것 같았다. 나의 꿈은 그쯤에서 멎질 않는다. 욕심은 오히려 내부 치장에 있다.

 

게르의 중앙에는 ​나무를 때는 난로를 놓고 구멍이 뻥 뚫려있는 천막 복판으로 연통을 밀어 올릴 것이다. 그리고 유목민들이 귀중한 물건과 무기 그리고 모린 후르(morin huur)란 악기를 놓아두는 호이모르(khoimor)라고 부르는 북쪽 공간에 소리통을 놓고 '우기의 여인숙'에서 들리는 그 노래를 틀 것이다. 간혹 친구들이 찾아오면 몽골에서는 흔한 가축인 양 대신 모이를 쪼고 있는 닭을 잡아 화덕에 얹어 구워 먹으리라. 머릿속에 막걸리를 담아 둘 암팡지게 생긴 술독까지 응달에 묻고 나니 나는 아무것도 부러울 게 없는 몽골 유목민이 되어 있었다.

 

마음은 점점 급해지고 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보니 게르 하나의 값은 사오백만 원, LPG 가스통 두 개를 용접하여 만든 근사한 난로는 오십만 원 수준이다. 그런데 여인숙의 표제 음악을 구할 수가 없었다. 지인들에게 '우기의 여인숙'으로 들어가는 주소를 가르쳐 주면서 곡목을 알려 달라고 요청을 했더니 발 빠른 몇몇 분들이 CD를 보내 주겠다는 연락을 해왔다.

 

그 노래의 제목은 '집시의 힘'(gipsy power)이며 벨기에 출신 그룹인 케옵스가 불렀다고 소상하게 알려 주었다. 케옵스는 고대 이집트 제4대 왕조의 2대 왕의 이름을 따 그룹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으며 이 노래는 발칸스(balkans​)란 음반에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 노래에 대한 궁금증을 사발통문을 놓아 풀고 있는 동안 여러 지인들이 내가 모르고 있는 명상음악들을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어떤 이는 테베트의 도인 나왕 케족의 명상 음악을, 또 다른 이는 몽골의 전통 음악인 흐미(khuumii)를 한 세트 보내 주었다. 나는 요즘 몽골에서 바람 부는 고비 사막을 건너 티베트로, 또 험준한 히말라야 차마고도를 거쳐 몽골로 내왕하느라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몽골의 게르로 만들어진 나의 사원에 '집시의 힘'과 같은 음악이 흐르면 얼마나 좋으랴. 낮술에 취해 낮잠 한숨 거나하게 자고 있으면 그 낮잠이 영원과 이어져도 좋고, 그래 정말, 영원과 함께 잠들어도 정말 좋고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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