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것은 모두 이 시냇물과 같구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간다.”
어느 날 공자님이 시냇물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가면서 한탄한 말이다. 우리들도 일상에 묻혀 지내다가, 모든 것들은 쉬지 않고 변한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을 때 하늘에 뜬 구름을 쳐다본다.
기원전 6세기경 희랍의 서정시인도 인생무상을 이렇게 노래했다.
보게나, 세월이 내 관자놀이 위로
흰 서리를 뿌리더니, 어느새 내 머리를 흰 눈밭으로 만들었네.
이가 빠져 버린 잇몸은 자꾸 넓어지고
젊음도 기쁨도 오래전에 스쳐가 버렸네
시인이든 철학자의 명석한 논리와 다감한 감정이 지향하는 곳은 한 곳, 한 것이다. 그것은 인생과 자연의 변화이다. 천지개벽 (天地開闢), 상전벽해 (桑田碧海), 천선지전(天旋地轉), 생자필멸(生者必滅)…그래서 문학은 '무상함'을 절절히 노래하면서도 역설적으로 변하지 않는 근원을 찾으려 했다. 작가들은 인생무상을 탄식하면서도 오늘도 ”가나다라마바사…’ ‘abcedfg…'라는 자음과 모음으로 천상이 비밀을 노래한다. 이것이 다름아닌 주역 정신에 대한 숭모이다.
<주역(周易)>은 '주(周) 시대의 역(易)'이다. 중국인들은 오래전부터 황하의 자연 재해와 쉼 없는 전쟁에 허덕였다. 지금처럼 언제나 중국은 예측불허였다. "삶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아는가“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따라 사후 세계는 보류하고 지극히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았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자연적ㆍ인위적 변화에 대응하려 하였다. 여기서 『주역』이 생겨났다.
주역은 모든 것을 변화라는 관점에서 해석한다. '역'은 주위 상황에 따라 색깔을 수시로 바꾸는 도마뱀의 일종을 본뜬 상형문자이다. 고대 희랍인들은 자연과 인생을 무상한 존재로 보면서 변하지 않는 영원한 존재를 '피시스(physis)라 불렀다. 불교에서 말하는 '제행(諸行)‘이 주관과 객관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라면 ’무상'(無常)은 고유한 실체마저도 부정하는 철저한 변화를 말한다. 반면에 『주역』은 "끊임없이 낳고 또 낳는 것이 역”이라는 변화를 생명의 창조 과정으로 본다.
『주역』은 그 변화를 음양으로 설명한다, 「계사전」에서는 변화의 도(道)를 “한 번은 음의 방향으로, 한 번은 양의 방향으로 운동해 나가는 것‘으로 풀이한다. 그러므로 상하, 좌우, 남녀라는 음양은 대립이 아니라 “서로 마주하며 기다린다”는 쌍의 의미이다. 양과 음의 기호는 ”—'와 '- -'이다. 양효(陽爻)와 음효(陰爻)를 풀이하면 효는 본받는다는 뜻이다. 양효는 남성의 성기를 음효는 여성의 유방을 나타낸다. 놀랍게도 한글에서도 자음은 남성을 모음은 여성을 상징하며 컴퓨터 언어에서 “0”은 여성을, 1은 남성을 나타난다.
기호는 언어가 발명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다. 사물을 감성적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기호는 오늘날 기호학의 모태이기도 하다. 모든 사물을 기호로 풀이할 때 주역의 양효와 음효에 일치한다. 신호등의 3색 차이도 상호 작용을 통해 생겨난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부정은 자신에 대한 부정이므로 상대방을 부정할 수가 없다. 이것을 정리하면 '상반상성(相反相成)'의 논리로서 양극(+)과 음극(-)처럼 상호 감응하여 서로를 완성시켜 준다.
수필도 인생과 자연과 우주의 의미를 언어로 설명한다. 놀랍게도 여기에 주역정신이 깔려있다. 주역과 수필은 우주 탄생의 원리와 생명의 비밀을 캐고 그들 간의 상호성을 직관적으로 고찰한다. 그리고 비교적 짧은 문으로 형상화 의미화한다 수필과 주역은 철학뿐만 아니라 과학 생물학 건축학 천문학 등을 포함한다. 주역과 수필이 다루는 자연계의 24절기도 농경의 지표일 뿐 아니라 인생의 흐름을 알려주는 간격으로 다룬다. 무엇보다 수필은 죽은 후의 내세를 다루지 않는다. 주역도 내세가 아니라 현세의 인간 운명을 다룬다. 수필과 주역은 공히 인문학의 속성에서 떠날 수 없다.
역경(易經)은 통상적으로 역경과 역전을 합친 것이다. 역경(易經)은 하늘, 땅, 물, 불, 바람, 못, 산, 천둥이라는 8가지 자연현상으로 인간의 길흉을 살핀다. 역전(易典)은 역경에 법칙을 세우고 괘에 대한 설명, 배열, 해석 등을 지칭한다. 수필에도 전과 경이 있다. 인간사가 역경이라면 그것을 엮은 틀과 구조가 역전이다. 주역이 길흉화복을 점치는 점서(占書)가 아니듯이 수필도 생로병사를 예측하는 글이 아니다. 오직 철학, 우주 만물을 성찰하여 지금 흐르는 삶의 모습을 담아낸다. 그러므로 수필의 생활성을 폄훼하지 말라. 주역조차 인간의 삶과 운명을 해석하지 않는가.
우주와 만물과 인간사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이루어낸 수필이라면 능히 주역에 생활복을 입힌 것이라 할 만하다.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말고 주역의 경지에 오르도록 노력할 것이다. 쉼 없이 흐르는 바람이나 구름을 문득 쳐다보고 문득(文得)한다면 주역의 괘(卦) 하나를 뽑은 것과 같은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글쓰기 고수에게 듣는다] ‘글쓰기 만보’ 저자, 소설가 안정효
불필요한 접속사 없애야 글에 힘이 생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읽기에 쉬운 글이 가장 쓰기 어렵다고 했다. 쉽게 쓴 글은 막 쓴 글이다. 아무렇게나 쓴다면 글쓰기가 쉽다. 하지만 그런 글은 사람들이 읽어주려고 하지를 않는다. 소설가 안정효 씨는 “일기 한 편을 쓰더라도 미련할 정도로 힘들게 써야 좋은 글이 나온다”며 “한 줄 한 줄 천천히 글을 써나가면서 단어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고 정성을 들여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가장 먼저 할 일은 소리 내어 읽기에 부자연스러운 말을 없애고, 여러 차례 반복되는 똑같은 표현을 다양한 어휘로 바꾸는 일이다.
‘있다’ ‘것’ ‘수’ 세 단어는 글쓰기의 3적(敵)
안정효씨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처음 몇 달 동안 그들이 써놓은 글에서 ‘있었다’와 ‘것’과 ‘수’라는 단어를 모조리 없애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시킨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이 세 단어를 문장에서 너무 자주 사용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싸우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구경을 하고 있다. 그래서 길이 꽉 막혀 있다. 신경질이 난 운전자들이 경적을 울려대고 있다. 한 청년이 디카로 이 장면을 찍고 있다.”
위 문장에서 ‘있다’를 모조리 없애보자. 그래도 진행형은 멀쩡하다. 오히려 문장이 간결해져서 힘이 생긴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싸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구경한다. 그래서 길이 꽉 막혔다. 신경질이 난 운전자들이 경적을 울려댄다. 한 청년이 디카로 이 장면을 촬영한다.”
‘것’ 또한 ‘있다’와 마찬가지로 최대한 절제해야 한다.
“집으로 오고 있었던 것이다”라는 표현을 놓고 생각해보자.
먼저 ‘있다’를 없애버리면 “집으로 왔던 것이다”가 된다.
‘것’도 가차 없이 자르고는 “집으로 왔다”라고만 해도 글 전체의 흐름에는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진행의 과정이 훼손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있다’를 없애면서 ‘진행’ 상태를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것’을 고치라고 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단순히 ‘것’이라는 단어를 ‘일’ 따위의 다른 단어로 바꿔놓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것’을 전부 ‘일’로 바꾼다고 해서 좋은 글이 나오지 않는다. 이럴 때는 글을 아예 새로 써야 한다.
“집으로 오고 있었던 것이다”를 “집으로 오던 길이다”라고 바꿔 쓴다.
‘~할 수’는 ‘can(be)’라는 영어식 표현에서 비롯됐다.
“누전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광우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이런 표현은 “누전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광우병에 걸릴지도 모릅니다”라는 식으로 다양화하면, 우리말 같지 않은 어색함이 사라지고 훨씬 자연스럽게 들린다.
접속사를 최대한 줄여라
어떤 원칙을 안다고 해서 실천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안 씨는 가장 지키기 어려운 원칙으로 ‘접속사 제거하기’를 꼽았다. 그는 “대학생 시절, 루돌프 플래시의 ‘잘 읽히는 글쓰기’를 읽다가 ‘자신이 쓴 글에서 접속사를 모두 없애라’는 놀라운 교훈을 발견했다”며 “플래시는 그렇게 하더라도 글의 흐름이 전혀 막히지 않고, 오히려 모든 문장이 맑은 물소리를 내며 잘 흐를 것이라고 했다”라고 덧붙였다.
‘그로부터’ ‘그러므로’ 따위의 단어로 앞문장과 뒷문장을 연결 지으려 애쓸 필요도 없다. 정 없애기가 어려우면 ‘그렇기 때문에’를 ‘그래서’로 바꾸는 등 글자 수를 하나라도 적은 것으로 바꾼다. 예를 들어보자. 보통 사람들의 초보적인 글쓰기는 이런 식이다.
“그래서 나는 학교로 갔다. 그리고 나는 아이들을 만났다. 그러고는 우리들은 같이 어울려 영화 얘기를 했다. 그런 얘기가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두 시간 동안이나 영화 얘기를 했고, 그러다 보니 한두 명은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까닭에 자리를 떴다. 그래서 나머지 우리들만 빵집으로 가서 하던 얘기를 계속했다.”
위 글에서 아돌프 플레시가 없애라고 한 단어에 밑줄을 치고 무작정 잘라내 보자. 그러면 이런 글이 남는다.
“나는 학교로 갔다. 아이들을 만났다. 우리들은 같이 어울려 영화 얘기를 했다. 너무나 재미있어 우리들은 두 시간 동안이나 영화 얘기를 했고, 한두 명은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자리를 떴다. 나머지 몇 사람만 빵집으로 가서 얘기를 계속했다.”
과연 앞뒤 문장이 토막 나서 연결이 안 되는가? 아니다. 모든 문장이 간결해지고 압축된 문장에서 외려 폭발력이 생겨난다.
주저하지 말고 마침표를 찍어라
안 씨는 젊고 힘 있는 문장을 쓰는 몇 가지 요령을 제시했다.
우선,
명사와 동사를 눈에 잘 띄게 전진 배치한다.
동사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동사는 힘의 증거이다.
무리가 가지 않을 경우에 한해서 부사는 형용사로 바꾸고 형용사는 가능하면 동사로 바꿔본다.
‘그는 태만하게 근무한다’보다 ‘그는 일솜씨가 게으르다’가 조금 더 힘 있어 보이고 ‘휘청거리며 걷는다’보다는 ‘휘청거린다’가 강하다. ‘빠르게 말한다’보다는 ‘말이 빠르다’가 의미의 전달 속도가 빠르고, ‘많은 눈이 내렸다’보다는 ‘눈이 쏟아졌다’는 표현이 훨씬 생동한다.
마땅히 남아야 할 공간을 억지로 채우려고도 하지 말자. 해야 할 얘기, 하고 싶은 얘기가 끝났는데도 억지로 지면을 채우기 위해 덧붙이는 글은 비만성 지방질이다. 이 원칙은 문장을 쓸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하나의 문장을 다 썼으면 주저하지 말고 마침표를 찍어라. 멋을 부리려고 쓸데없이 문장을 잡아 늘이고 미사여구를 덕지덕지 붙이지 말라는 뜻이다. 하나의 단락을 구성할 때도 마찬가지다. 기승전결을 갖춘 단락이 이뤄지면 주저하지 말고 줄을 바꿔야 한다. 한 편의 글을 마무리할 때도 쓰고 싶은 얘기를 다 썼으면 훌훌 털고 자리에서 일어서야 한다. 자꾸만 살을 붙이면 그 작품은 너덜너덜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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