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도론 / 백재식
한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누군가가 외도도 도가 아니냐고 익살을 피우던 말이 생각난다.
사전을 들춰보니 正道정도를 어기는 것, 불교에서 불교 이외의 그릇된 도, 그리고 오입의 동의어 따위로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쓰는 외도는 이른바 오입 즉 배우자 이외의 이성과 교합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통례인 성 싶다.
그런데 오입과 외도는 뜻이 같은 낱말이기는 하나 듣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오입은 문자 그대로 잘못 들어간 것이므로 이내 되돌아 나올 수 있는 여유를 전재로 하는 일시적, 의식적인 탈선에 대하여, 외도는 어딘지 자신도 뜻하지 않게 혹은 무가내하로 길을 벗어난 경우의 탈선이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한번 길을 벗어나면 온 길을 되돌아갈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이 길손들의 고집스런 심리다. 되돌아가느니보다 잘못든 길을 따라 본시의 길을 찾는 쪽의 방법을 택한다. 그러므로 같은 뜻의 낱말이로되 외도는 오입보다 시간적은 悠長性유장성과 공간적인 무게를 그 어감 속에 지닌다. 그래서 외도는 외도가 도의 경지를 지닐 수 있는 요소를 암시하는 낱말일 성도 싶다.
그러나 어떤 경우의 탈선이 오입이며 외도인가는 실제상황에서의 분별이 모호한 일이어서 그저 배우자가 아닌 이성과의 일시적인 교접을 통틀어서 그렇게 혼용하는 듯도 싶다. 하지만 비록 배우자가 아닌 남녀간의 교합이라할지라도 그것이 진지한 애정을 전재로 한 것인 경우 우리는 외도라고 이르거나 더욱이 오입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아무튼 외도이든 오입이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도와 正入정입을 일탈하는 것인 만큼 정을 是시로 삼는 사회적 통념에서 보아 하나의 패덕이요, 불륜의 非違비위임에는 틀림 없다. 그래서 법은 경우에 따라 간통이라는 매우 면구스런 죄목으로 이것을 다스리기도 하지만 반드시 간통죄가 아니더라도 외도는 남몰래, 특히 배우자 몰래 이루어지는 것을 관례로 삼는다.
이른바 오입쟁이들이 펴는 외도론에 의하면, 첫째로 꼽는 법칙이 오입은 아내 몰래 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오입은 했을망정 부부관계의 순결에 대한 믿음의 성역만은 지켜야 한다. 남편은 당연히 나만을 사랑한다는 것, 따라서 사랑의 증거행위는 오로지 나만이 향유하는 독점적 권리라는 데 대한 아내의 자존심과 믿음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경지에 이른 오입쟁이일수록 금과옥조로 삼는 철칙이 된다. 그들은 비록 현장에서 발각당하는 경에 있어서도 이 철칙을 사수하는 것이다.
숱한 외도를 했지만 아직 한 번도 아내에게 들통난 적이 없다는 것을 항상 자랑으로 삼는 어느 친구의 예기다. 그의 아내는 그를 가장 모범적인 남편으로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그가 하루는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됐다. 외도를 하고 집에 돌아와서 잠자리에 들 양으로 옷을 벗다가 결정적인 단서를 아내에게 붙들리고 만 것이다. 잠방이 대신 여자의 속속곳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아차! 싶은 순간,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아내의 기척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엉겹결에 그는 다짜고짜로 "나쁜 놈의 자식!" 을 연발하면서 화를 발칵 냈다 그새 변명의 궁리를 두르느라고 그는 연신 "나쁜 놈의 자식!"을 연발하면서 펄펄 뛰는 시늉을 정색으로 되풀이 했다. 적반하장의 서슬에 도리어 기가 질린 아내가 까닭을 캐묻자, "아, 그 아무개 있잖아, 짓궂은 친구 말이야, 그 녀석이 또 장난을 친거야, 아까 목욕을 하자고 해서 같이 했는데 헤어질 때 자꾸 웃는 것이 수상쩍다 했더니 이런 고약한 장난을 꾸몄구먼. 나쁜 놈의 자식" 하고 둘러댄 것이다.
이 황당무계한 변명이 그대로 통과한 것이다. 그의 소신에 의하면 제 아무리 여우 같은 마누라도 남편의 외도에 대한 변명에는 약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견강부회의 우격다짐이듯 속이 빤히 내다보이는 거짓말이든 간에 남편의 결백에 대한 주장은 그 목소리가 당당할수록 매우 유력한 소명자료가 되는 법이다. 왜냐하면 아내가 갖는 믿음의 성역에는 항상 남편이 외도 안하기를 바라는 의지로 만들어진 우상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추상 같은 문초를 하면서도 아내는 남편이 했다고 자백하기 보다는 안했다고 단호히 부인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칫 '했으면 어때요. 배냇병신 아닌 담에야 남자치고 외입 않는 사람이 또 어딨어요. 속 시원히 바른 대로만 말해줘요' 하는 따위의 유도신문에 일단 굴복하고 나면 사태는 아주 수습할 수 없는 방향으로 험악해지고, 이 죄밑이 두고두고 빌미가 되어 끝내는 엄처시하를 불면하는 처지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 금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그 하나는 기록상의 장애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斯種사종의 기록이 기네스북에 수록되는지는 몰라도, 생애에 3천 명을 목표로 정진하는 쟁이가 있다는 예기도 들었다. 이런 쟁이들의 기록욕을 충족하자면 도시 한 곳에다 붓방아를 두 번찍을 나위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이유는 이 일회성의 만남에 정이나 미련을 두어서 안된다는 계산에 있다. 거듭 접하다 보면 하릴없이 정이 괴고 정에 발목이 붙들리다 보면 오입이 진입이 되는 변수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도를 그르치는 일로써 누구보다도 가정의 평화를 사랑하고 사회적인 페면을 숭상하는 사도의 권위가 범할 우는 결코 못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외도적 관점에서 보면 남녀 간의 육체관계는 애정의 증거로써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니체가 말했던 것처럼 18세기의 낭만파 시인들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일찍이 가슴 두근거리며 다가가던 신비의 문은 이제 아무렇게나 드나들 수 있는 일상의 문으로 개방된 것이다. 현대의 성풍속은 무절제한 관능의 둑을 넘어 바야흐로 생리적인 신진대사나 심신의 스트레스를 푸는 가벼운 운동쯤으로 여기게 되었다. 차라리 한 마리의 토끼를 사냥하는 사자처럼 진지한 자세로 엽색에 임한 돈환의 행각이 아쉬운 세태이기도 하다.
그러나 옛날의 한양 나그네는 어느 낯선 고을에서 단 하룻밤을 지낸 기녀와의 추억을 잊지 못한다. 외도가 도의 경지를 갖는다면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 이런 풍류객의 멋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백재식 ㅡ 한국수필문학진흥회 부회장 역임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서울경찰청장 역임
소망의 불꽃 / 고 동 주 (0) | 2011.07.11 |
---|---|
부족함의 미학 / 홍 미 숙 (0) | 2011.07.05 |
회전등 / 허표영(창작적인 수필) (0) | 2011.07.02 |
[스크랩] 대흥사 가는 길 (0) | 2011.07.02 |
지동설地動設 / 유동근 (0) | 2011.07.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