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사 가는 길
이재부
사람의 마음 속에는 환기의 창이 있나보다. 일상에서 탈출하여 어디론가 떠나보고 싶은 때가 있다. 나이가 들어도 새 바람을 쏘이고싶다. 살다보면 번뇌의 강을 건너게 되고, 탈색되는 아픔도 겪게된다. 땀 흘리며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궂은비 오는 소리나, 바람소리를 들으며 산다. 들으려하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들. 노력해도 오지 않는 소망의 훈풍. 행복이던 불행이든 삶은 고민의 강이요, 번뇌의 산이며, 바람 부는 벌판을 가는 일상이 아니던가. 때로는 양지와 음지가 반복되는 끝없는 일에서 벗어나고 싶어진다.
여행은 환기의 창을 열고 탈출하는 도망이요, 내가 나로부터 해탈하는 수행의 여정이 아닐는지. 도망갈 곳이 있다는 것은 큰 은총이리라. 새 풍물을 만나서, 헝클어진 기분을 가지런히 하고 돌아오면 도전할 의욕이 생기지 않던가. 그래서 여행은 더 멀리 뛰기 위한 도움닫기라는 생각이 든다.
철모를 때 수학여행을 갔다오면 본 것이 순서대로 떠오른다. 내가 본 것이 자랑이요, 그 자체가 지식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여행의 중심 생각이 좀 달라진다. 보는 즐거움을 넘어서 생각하고, 즐기는 즐거움이 중심을 잡는다. 두륜산 대흥사에 가면 즐기면서 생각을 넓히는 길이 있다. 마음을 두고, 대화하며 서로를 보듬는 순수한 자연의 손이요, 그윽한 대지의 얼굴이 거기에 있다. 관심을 두고, 깊은 생각에 정을 주면 침묵하던 자연과 고찰이 사랑의 훈기를 담아주는 곳이다. 종교가 무엇이든 망설이지 말고 그 길을 가서 열린 마음으로 경내로 들어서라. 자연의 중심에서 기력이 충전되고, 성인의 가르침이 내 것이 되리. 청수에 비치는 나의 나신을 보게 되리라. 내가 어디쯤 가고있는지, 어디에 서 있는지.
마음에 중심을 잡아주는 대흥사를 가려면 외(外) 일주문부터 걸어서가야 한다. 아는 길이지만 자연과 함께 자연에게 묻고, 물어 찾아가야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되리라. 차를 타고 고속으로 달려가 전각만 보고 나오면 청춘을 생략한 노경의 인생만 누리는 것이리. 무학 무지로 청춘을 보내고 죽음 앞에서 4서3경을 통달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색의 안목과 마음의 깊이를 키우려면 일보 삼배 기분으로 걸어야하리라.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숲 속 식구들과 속삭여 보라. 그래야 진한 자연의 강론을 듣고 우주 전체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기지 않겠는가. '서두루지 마라 한 번 가는 인생 길인데' 지나가는 바람이 속삭여 주리라.
산사로 들어가는 길에서 고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왕손 집안이면서도 을해옥사에 연루되어 비운으로 살다간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도 이 길을 가서 명필을 남겼다. 추사 김정희도 초의 선사를 만나러 이 길을 갔단다. 대웅보전 편액이 이광사 글씨에서 김정희 글씨로 바뀌어 달리고, 다시 번복되는 사람의 마음이 지나가던 길을 나도 간다. 수없이 드나들던 사람들의 생각이 머물던 이 길엔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보이지 않는 발자취 위로 또 다른 내 길을 갈 뿐이다.
거목의 숲길을 가면서 내가 나에게 묻는다 "행복할 만큼 행복했는가" "사랑하며 살았는가" "뒷모습에 화살이 꼬치지 않을는지"……. 생각이 생각으로 이어지는 대흥사 들어가는 숲길을 가면서 왜, 회상의 빗소리가 들릴까. 귀 기울이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 기다리는 그리움을 밤새껏 적셔주는 비 오는 소리. 될 듯 될 듯 되지 않아 근심인 것을 밤새워 모아 쌓는 낙숫물 소리. 허공 같은 마음으로 몰려드는 저 비바람 소리. 아픈 마음 파고드는 소소리바람…….
탈출!, 인생 여행! 초월을 꿈꾸며 휘감겨 구겨졌던 내 영혼의 무지개가 이곳에 오니 곱게 드리워져 그 안으로 대흥사가 보인다.
(2011년 6월 8일 두륜산 대흥사를 찾아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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