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지동설 / 유 동 근
1
산길에 낙엽이 굴러다닌다. 바람이 그걸 멍석처럼 돌돌 몰아붙이고 있다. 길가 바위 틈서리에 밀어붙이거나 옴팍한 허구렁을 낙엽의 쉼터로 삼기도 한다.
세상은 오나가나 낙엽이었다. 세상의 바람에 이리저리 밀리고 쫓기는 내가 낙엽을 밟고 간다. 낙엽을 따라가면 거기 또 낙엽 무더기가 쑤군쑤군 무슨 귀엣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쌓여 있다. 끼리끼리 모여 산다는 말이 그럴 듯하다.
발바닥에서 신호가 온다. 신호를 미처 다 해독하지 못하는 내가 발바닥에 귀를 세운다. 그 동안 무심했던 나를 낙엽이 듣고 있다.
2
캄캄한 산 위로 불빛이 떨어지고 있다. 그곳은 달이 지는 방향이다. 별똥이라고 어른들이 말했다. 별이 똥을 눈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어릴 때와는 달리 지금은 별똥 떨어지는 것을 거의 볼 수 없다. 불빛이 환한 세상에서는 똥을 눌 수 없다고 별이 수줍게 입을 오물거리는 것 같다. 어릴 때의 불빛은 마당의 모깃불이거나 추녀 끝에 걸린 호롱불이 모두였다.
달이 지는 서쪽 산머리는 별의 뒷간이었다. 별똥떨어지는 소리는 얼마나 퐁당거릴까. 그러나 어둠이 소리를 다 까먹어버리는지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뒷산에서 우는 짐승울음이 어서 볼일이나 보고 들어가라며 겁을 주었다.
3
길을 가다가 돌맹이를 막무가네 걷어찬 적도 있다. 공을 찬다는 생각은 물론 아니었다. 돌맹이는 저만치 붕 뜨더니 어지러은 듯 떼굴떼굴 굴러 떨어졌다. 돌맹이에게 실없는 발길질을 했을 뿐인데 굴러 떨어지는 돌맹이를 보고 있으니 세상의 발길질에 왕따 당한 처지가 아프게 떠올랐다.
그러나 꽃씨가 바람을 기다리듯 돌맹이는 사람의 발길질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길바닥에 웅크린 신세이던 것이 사람의 발길질에 그나마 자리를 옮길 수 있다. 하지만 모처럼 옮긴 자리는 따가운 가시덤불 속이다. 가시에 몸을 찔리며 외톨이가 된 돌맹이는 갑작스런 변화에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돌맹이의 어리둥절함을 쓰다듬는 일은 나를 돌아보는 일이었다.
4
발에 밟힌 은행잎은 가루처럼 부스러져 흙이 되었다. 포도를 발로 으깨어 포도주를 담근다는 말이 떠오른다 밟히는 은행잎은 포도주 같은 향기와 맛으로 태어날 꿈을 꾸고 있을까.
어느 장지에서는 주검을 땅속에 묻은 상두꾼들이 마지막으로 흙 다지기를 하여 주검더러 아늑하게 지내기를 빌었다. 땅속에 묻혀 다른 무엇으로 태어나기 위한 아득한 낙하落下가 주검에로 몸을 바꾸는 일이겠다. 흙과 더불어 잘 삭아 가장 좋은 흙으로 태어나서 달덩이 같은 항아리로 환생되리란 터무니없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주검은 흙이 되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 눈 맑은 도공의 손에 항아리가 된다.
지금 나는 유백색乳白色으로 변신한 찻잔을 쓰다듬고 있다.
5
안개를 보면서 산을 보고 산을 보면서 안개를 본다. 산의 구도를 이리저리 바꾸고 옮기는 안개는 고정된 산의 구도를 무너뜨리고 싶다. 산도 때로는 고정된 형태, 고정된 관념에서 벗어나고 싶다. 틀에 박힌 일상에서 떨어져나가자면 이런저런 아픔도 받아드려야 한다. 덩달이 몸살 또는 앓아야 한다.
안개는 어느새 나를 먹고 나는 안개를 먹었다. 안개에 먹힌 나는 안개가 되었다. 나에게 먹힌 안개는 내가 되었다. 서로 먹고 먹히는 장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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