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 김 학 명
들판에 보리가 한창이다. 그 빛은 맑고 청초하다. 연두와 초록 사이의 맑은 빛은 연두라고 하기에는 조금 지났고 초록이라 하기에는 아직 수줍은 빛깔이다. 바람이 불어온다. 보리밭은 금새 거대한 초록빛 바다가 되고 바람결에 따라 몸을 흔든다. 아주 느리게 또는 부드럽기도 하고 격렬하게도 움직인다. 아마도 한겨울 얼어붙은 땅속에서 싹을 틔우고 몸을 키우며 남몰래 흘렸던 눈물겨운 시간들이 묻어나오는 듯 하다.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보리는 사각사각 숨을 죽여 운다. 누구에게 들키지 않고 내 안에서 꾹꾹 눌러 삼킨 울음이다. 어쩌면 우리가 두고 온 눈물겹도록 소중한 시절을 불러내는 사무치는 그리움의 바람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아주 먼 시절 보리 알갱이처럼 가슴에 빼곡히 박힌 그 지극한 사랑을 못잊어 하기 때문이 아닐까.
마음 속에도 바람이 불어오는 보리밭이 있다. 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선다. 어느 날인가 동네 분들이 보따리를 들고 있는 낯선 아주머니와 함께 소년의 집으로 들어왔다. 그 집에는 13살 까까머리 소년과 여동생 그리고 마음 착한 아버지가 살고 있다. 그가 사는 집은 초라했고 집안을 둘러봐도 살림살이며 무엇 하나 똑바른 게 없었다.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몸을 만들어 준 어머니는 10살이 되던 초등학교 3학년 여름에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살림을 하는 사람이 없다 보니 아마도 집안이 그런 것 같다. 방에 모인 동네 분들은 소년에게 이분이 엄마가 되실 분이라고 그렇게 부르라고 했다. 소년은 멍했다. 많은 분들 앞에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랐다. 그리고 한참 후에 수줍은 마음을 감추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엄마라고 불렀다. 잊었던 엄마라는 소리가 목구멍을 타고 울렸다. 그 순간 모두가 소년을 쳐다 보며 측은함과 잘했다는 눈짓을 함께 보냈다. 어머니를 떠나보낸 상실감과 가난의 쓸쓸함이 거칠게 마음을 할퀴고 지나간 감정이었을까. 그날부터 소년은 집을 나올 때나 들어올 때나 늘 엄마라고 부르며 살았다.
보따리를 안고 온 어머니는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말씀은 없었지만 하루하루 삶에 최선을 다하였다. 덤덤한 집안 분위기와는 달리 새 어머니가 오고부터 사람이 사는 집 같았다. 생기가 도는 듯하고 서서히 자리가 잡히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일을 다녀와서 한밤중에야 먹던 저녁 밥과 빨래도 차츰 잊어져 갔다. 보리가 겨울을 이겨내고 자라듯 어머니는 그 지독한 가난 속에서 온몸을 다해 자식들을 키웠다. 봄이면 하루 종일 산 속을 헤메며 취나물 쌉싸름한 오가피, 잔대순, 다래순 이런 산나물을 뜯어서 다듬고 삶고 말려서 식량을 보충하였다. 여름엔 보리를 수확해서 방아를 찧고 생긴 억센 보릿겨도 가져와 맛도 없고 까칠해서 막기도 힘든 보리개떡을 만들었다. 하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고 그저 양식으로 알았다. 개떡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먹거리가 아니라 사랑으로 뭉친 눈물 젖은 음식 그 자체였다. 가을엔 늙은 호박을 수확하여 껍데기를 벗기고 씨를 파낸 후 푹 삶은 다음 콩과 팥을 잔뜩 넣어 만든 호박범벅을 해 주었는데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겨울은 고구마와 김장 후에 엮어서 걸어놓은 시래기와 우거지가 모자른 식량을 보충했다. 비록 넉넉하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사랑임을 소년은 누구보다 잘알고 있었고 늘 마음 속으로 감사했다.
중학교 2학년 어느 날 소년은 어머니와 항아리를 사오기 위해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준비해 놓은 보리쌀, 가지 상추같은 채소 그리고 지난해 수확한 늙은 호박과 산나물등 여러가지 농산물을 리어카에 차곡차곡 실었다. 옹기골에 도착해서는 크기가 다른 몇 개의 항아리와 단지 소백이 소품 등을 고른 다음 사정반 우격다짐반을 하며 가져간 곡식과 야채로 물물교환을 하였다. 하나라도 더 얹어오고 싶었던 어머니와 그 마음을 모른척 할 수 없어 투덜거리면서도 실어 주던 옹기골 주인의 투박한 정이 오고 갔다. 집으로 오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조심조심 끌고 오는게 쉽지 않았다. 있는 힘을 다해야 했고 돌이 없는 평탄한 쪽을 고르며 천천히 와야 했다. 바퀴가 돌에 걸려 덜컹 소리가 나기라도 하면 항아리도. 소년의 가슴도, 뒤에서 어머니의 호통소리도 함께 쏟아져 긴장한 가슴으로 숨을 죽이며 끌고 왔다. 잠시 쉬는 길옆에는 줄지어 선 파란 보리밭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에 땀을 닦고 다시 힘을 내서 실어 온 항아리는 장독대에 자리를 잡았다. 그날부터 몸으로는 투박한 질그릇이 빛이 나도록 매일 닦으셨다. 그리고 가슴으로는 새로운 가족을 위해 고단한 삶과 마음을 담은 세상에서 가장 굵고 진한 사랑의 시를 쓰고 있었다.
성인이 되면서 살림은 차츰 여유를 찾아갔다. 그리고 소년의 어머니는 94세에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그때까지 정성으로 모셨고 첫 날 어머니 라고 부른 것처럼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누구나 생각하는 평범한 모자였다. 그가 언젠가는 꼭 물어보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왜 떠나지 않고 가난을 함께 버텨주셨는지를. 하지만 끝내 물어보지 못했다. 그 말이 나오지도 않았고 말을 하려면 먼저 눈물이 고였다. 입 안에서 맴돌았다가도 눈빛을 보면 다시 가슴 속으로 내려앉곤 했다. 어머니는 이미 삶을 통해 온 몸으로 그 답을 하고 계셨고 또 힘든 자리를 지켜주신 크고 거룩한 소년의 어머니였다. 하지만 그 많은 고생을 한 미안함이 늘 가슴에 사무쳐 있고 또 그럴것 이다. 제삿날이 되면 항상 두 분 어머니를 함께 모신다. 너무나 소중한 인연이기에 그럴수 밖에 없다. 가끔은 혼잣말로 참 복이 없기도 하고 또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어린 나이에 친 어미니를 여윈 상실감은 세상 그 어떤 슬픔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어려운 환경에서도 피하지 않고 온 몸을 던져 자식을 키운 어머니를 만난 것은 인생의 커다란 기적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밭은 푸르름을 지나 황금빛으로 색깔을 바꾸며 꽉 채운 보리알을 남겨 줄 것이다. 하지만 마음 속에 보리밭은 늘 푸른 빛으로 남아 바람에 흔들리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영원히.
'추천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달팽이의 꿈 <천강문학상 대상 작>외 5편 / 박 금 아 (1) | 2026.06.10 |
|---|---|
| 돌사탕 / 최 윤 정 (0) | 2026.06.04 |
| 불씨, 영원한 불꽃/ 김 성 문 (0) | 2026.06.04 |
| 박 순 철 수필 6편 (0) | 2026.06.04 |
| 2025 《대한민국 장애인 문학상》 장려 / 귀로보다 외 3편ㅡ최 지 안 (0) | 2026.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