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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순 철 수필 6편

장대명화 2026. 6. 4. 05:30

       

                             초원의 집 / 박 순 철

 

빽빽하게 들어선 수목 사이로 뾰족이 얼굴을 내민 돌탑들이 낯설고도 신기하다. 괴산군 칠성면 쌍곡리, 그곳에 초원의 집이 있다.

 

이게 대체 얼마 만인가.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무엇이 그리 바빠 매정하게 등을 돌리고 살았을까. 반세기라는 세월을 건너 어린 시절의 옛집을 마주하는 마음은, 반가움이나 설렘보다 시큰하고 아릿한 통증으로 다가온다.

 

나의 유년은 초가삼간 오두막집에 머물러 있다. 우리 집 돌담을 경계로 영준네와 희연네가 어깨를 맞대고 살았고, 발치 아래엔 용태네 집이 정겨웠다. 뒷담 너머 칠성 시장통 주인집의 기세등등하던 삼백 평 밭뙈기도 이제는 흔적조차 없다. 그 모든 기억을 품은 채, 오로지 푸른 초원의 집만이 그 넓은 터를 지키며 의연하게 서 있을 뿐이다. 실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서울 사는 생질이 어쩌다 어머니를 뵈러 내려오는 날이면, 나와 동생까지 불러 점심을 대접하곤 한다. 그 덕에 흩어져 살던 누님과 동생, 우리 삼 남매가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다. 이번에는 고향 마을을 한번 들러보자는 누님의 제안이 있었다. 괴산에서 매콤한 코다리 정식으로 속을 채운 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그리운 고향길로 향했다.

 

어느덧 여든을 훌쩍 넘긴 둘째 누님은 아이처럼 설레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고향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내가 사는 청주에서 차로 한 시간이면 닿는 거리이고, 근처에 처남이 살고 있어 일 년에도 몇 번씩 스쳐 지나던 길목이다. 하지만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 위로 유년의 가난이 겹쳐지면 마음은 이내 무거워진다. 홀로 육 남매를 건사하느라 굽은 등이 펴질 날 없던 어머니의 뒷모습과 궁핍으로 얼룩졌던 그 시절의 뼈아픈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스라이 멀어지던 기억을 깨운 것은 낯선 풍경이었다. 흔적조차 사라진 옛 집터 위로 언제부턴가 기묘한 형상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마이산의 영험함을 옮겨놓은 듯한 돌탑들이 줄지어 서 있고, 인자한 성모마리아 상이 그 곁에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괴산하면 으레 소설임꺽정의 홍명희 생가나 매콤한 명품 고추가 먼저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 명성을 증명하듯 커다란 고추 조형물이 시선을 붙들었고, 이제는 민속촌에서나 볼 법한 연자방아도 보였다. 특히 작고 납작한 돌들을 정교하게 이어 붙여 만든 한반도 지도는 발길을 멈추게 할 만큼 정성이 지극했다.

 

일상에 치여 고향을 잊고 살던 어느 날이었다. 무심코 TV 채널을 돌리다 익숙한 풍경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에 내가 살던 옛 집터가 나오고 있었다. 화면 속에는 나와 연배가 비슷해 보이는 한 남자가 나타나, 이 황무지 같은 땅에 돌로 집을 짓게 된 구곡간장(九曲肝腸)의 사연을 묵묵히 풀어내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30여 년 전부터 주변 땅을 사들여 돌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담담하게 소회를 밝히는 화면 속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진심이 묻어났다.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옛 집터가 타인의 손길을 거쳐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순간, 비로소 나는 내가 자란 그곳을 다시금 가슴에 새겼다. 수십 년 세월 동안 홀로 돌을 다듬고 세운 정성 덕분일까. 백발이 성성한 주인장의 모습은 바위처럼 단단하고 건강해 보였다.

 

어릴 적 동생과 뒤엉켜 뛰어놀던 마당 자리에는 이제 여의주를 문 용이 승천할 듯 기백 있게 버티고 서 있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도 경이로운 풍경이다. 예순 해 전, 이곳은 우리 육 남매의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 좁은 초가삼간에서 어떻게 그 많은 식구가 몸을 부대끼며 살았나 싶다. 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던 나와 막냇동생에게는 그저 흐릿하고 가난한 풍경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길게 땋은 머리를 찰랑거리며 어머니 대신 나를 업고 다독여 재워주던 누님의 온기가 어제 일처럼 새롭다. 문득 먼저 세상을 떠난 두 형님과 누님의 빈자리가 생각나 왈칵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외삼촌, 여기까지 오셨는데 세 분 기념사진 한 장 찍으셔야죠.”

 

생질의 목소리에 일렁이던 상념에서 퍼뜩 깨어났다. 사진을 찍으려 자리를 잡고 보니, 육 남매가 아닌 삼 남매만 남은 모습이 마치 이가 빠진 것처럼 허전하고 쓸쓸했다.

 

남들은 고향 하면 으레 애틋한 그리움이나 자랑거리를 늘어놓곤 하지만, 내게 고향은 그리 다정한 이름이 아니었다.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라는 말이 뼈에 사무치던 시절,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해 어머니를 붙들고 울고불고 매달리던 비통한 기억이 먼저 고개를 든다. 끝도 보이지 않던 보릿고개, 허리띠를 졸라매며 하루 두 번씩 가파른 앞산을 오르내리며 땔감을 해 나르던 고단함. 내게 고향은 부끄럽고도 시린 흉터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 척박한 땅에서도 꽃은 피어났던가. 혼기가 찬 누님이 빌려온 소설책들이수일과 심순애, 찔레꽃, 그리고임꺽정까지. 문 틈새로 그 책들을 훔쳐보며 남몰래 가슴 설레던 시간이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 문학이라는 꿈의 씨앗을 내 마음속에 심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문학에 대한 갈증으로 밤잠을 설쳐가며 소설 한 편과 수필 한 편을 써 내려갔다. 그 투박한 원고 뭉치를 들고 당시 충청일보에 소설을 연재하던 작가를 무작정 찾아갔던 기억이 선하다. 내 원고를 찬찬히 훑어보던 그는 "소설보다는 수필을 써보는 게 어떻겠냐?"며 조심스레 권유했다. 그 한마디가 내 문학 인생의 첫 단추가 되었고, 나는 그렇게 수필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수필의 길 또한 평탄한 꽃길은 아니었다. 마음먹은 대로 문장이 풀리지 않아 고뇌하고, 갈등의 파고를 넘을 때마다 펜을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 그때마다 나를 다독여 포기하지 않게 이끌어주고, 마침내 월간 수필문학에 추천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고마운 인연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존재한다.

 

그토록 열망하던 문학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환희는 마치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어느덧 문학의 언저리를 서성인 지도 삼십여 년. 그 긴 세월 동안 나의 초라했던 유년의 오두막집은 누구나 감탄하는 근사한 초원의 집으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정작 내가 평생을 바쳐 짓고 있는 문학의 집은 여전히 엉성하고 허술하기만 해 부끄러움이 앞선다.

 

 초원의 집 주인장이 수십 년간 묵묵히 돌탑을 쌓아 올렸듯, 나 또한 언제쯤이면 저토록 견고하고 아름다운 문학의 집을 완성할 수 있을까. 비록 걸음은 더딜지라도 그 완성을 꿈꾸며, 나는 오늘도 경건한 마음으로 자판 위에 손을 올린다.

             

                                    도라지 / 박 순 철

 

세월은 쉼 없이 흐르는 물과 같다더니, 정말이지 거스를 길 없이 흘러가 버렸다. 되돌릴 수만 있다면 기어이 붙잡고 싶은 시간들이건만, 정작 내 유년의 기억은 시리고 배고픈 풍경들로만 가득하다.

 

그 아릿한 상념의 틈을 비집고 가느다란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가랑가랑한, 기운 없는 그 노년의 음성은 흡사 내 어린 시절의 어머니를 닮아 있었다. 그저 목소리만 작아진 것이기를, 기력이 다한 탓은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보지만, 세월이라는 신은 그리 너그럽지 않을 것만 같아 마음이 저려온다.

 

아저씨, 도라지 반 근만 줘요.”

 

할머니, 조금씩은 안 팔아요.”

 

도라지 300그램을 달라는 할머니와, 소량은 팔 수 없다는 우리 가게 김 기사 사이의 실랑이가 시작되었다. 나는 눈짓으로 어서 드리라고 신호를 보냈다. 굽은 허리를 이끌고 시장까지 나오기조차 버거웠을 분을 매정하게 빈손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김 기사가 마지못해 깐도라지를 담아 건네자, 이번에는 양이 적다며 더 달라고 떼를 쓰신다. 생떼에 가까운 억지였으나 나는 이번에도 더 챙겨드리라 일렀고, 김 기사는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가끔 시장에 나오는 그 할머니는 늘 한 근 아니면 반 근뿐인 소소한 찬거리를 사 가신다. 일손이 바쁜 김 기사 입장에서는 매번 실랑이를 벌여야 하는 할머니가 귀찮을 법도 하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 노인의 등 뒤로 살아생전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 보여 자꾸만 가슴이 짠해진다. 도라지를 사러 온 할머니의 당당한 요구 뒤로, 한 줌의 도라지를 팔기 위해 시장통을 배회하며 어깨를 움츠렸을 어머니의 시린 뒷모습이 자꾸만 어른거리는 탓이다.

 

반세기 전, 보릿고개는 저승길보다도 멀고 험한 고비였다. 요즈음 젊은이들에게 그때의 허기를 이야기하면 "라면이라도 끓여 먹지 그랬느냐?"라고 되묻겠지만, 당시는 그 흔한 라면조차 세상에 나오기 전이었다. 춘삼월 긴긴 해가 느릿느릿 넘어가고 단오 무렵이 되면 보리 이삭이 패기 시작한다. 보리밭에 푸른 기가 가시고 어서 누런 황금빛이 돌기만을 손꼽아 기다리지만, 텅 빈 배를 아는지 모르는지 보리는 좀체 익을 줄을 몰랐다.

 

매일 같이 보리밭을 서성이며 기웃거리다, 그나마 누런빛이 감돈다 싶은 이삭들을 한 단 잘라온다. 그것을 무쇠솥에 쪄서 말린 뒤, 기계방아도 아닌 절구나 디딜방아에 찧어 보리밥을 지었다. 덜 익어 거칠고 투박한 밥이었으나, 그것이나마 배불리 먹을 수만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은 허기를 달랠 요량으로 들과 산을 훑고 다녔다. 칡뿌리를 캐고 나물을 뜯는 것이 하루의 전부였다. 한 줌도 안 되는 가느다란 허리를 지닌 나의 어머니도, 아침 일찍 다래끼를 메고 나가시면 해가 설핏 기울어서야 돌아오시곤 했다. 어머니의 다래끼 속에는 산나물과 함께 흙 묻은 도라지와 더덕이 담겨 있었다.

 

어머니가 캐 온 도라지와 더덕은 팔기 위해 물에 담가 두시고, 산나물은 서둘러 솥에 삶았다. 쓴맛을 미처 우려낼 겨를도 없이 된장 한 술 넣어 무쳐낸 나물들. 커다란 양은 대야에 찬밥 몇 덩이를 넣고 쓱쓱 비벼주면, 밥알보다 나물이 더 많아도 그 맛은 천하일미가 부럽지 않은 꿀맛이었다.

 

이튿날 아침, 어머니는 다시 나물 다래끼를 어깨에 메고 집을 나서며 당부하셨다. 학교에 다녀오면 어제 물에 담가둔 도라지 껍질을 미리 좀 벗겨 놓으라는 말씀이었다. 물기를 머금어 보드라워진 도라지를 댓돌 위에 올리고 방망이로 자근자근 두드리면 살이 납작하게 펴진다. 그래야 껍질이 수월하게 벗겨지는 법이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4, 5학년 남짓한 아이의 여린 손톱은 이내 아릿하게 저려왔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괴롭힌 건 통증보다 억울함이었다. 골목 밖에서는 동네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나드는데, 나만 집에 갇혀 도라지와 씨름해야 한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싫었다.

 

산더미처럼 남은 도라지를 보고 있자니 심술이 치밀었다. 결국 나는 꾀를 내어 동생을 불렀다. 남은 도라지 뭉텅이를 들려주며 뒤꼍 감나무 밑에 남몰래 묻으라고 시켰다. 영문도 모르는 동생은 형의 서슬에 눌려 고분고분 땅을 파고 도라지를 묻었다. 그런 사정은 꿈에도 모른 채 귀가하신 어머니는, 가지런히 놓인 도라지 알맹이들을 보며 "애썼다, 참 수고했다"며 우리를 대견하게 다독이셨다.

 

그 시절, 고추장을 발라 구운 더덕은 지금의 쇠고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우리가 까놓은 도라지를 잘게 쪼개어 볕에 말린 뒤 똬리 모양으로 둥글게 엮어 장터로 향했다. 한 뭉치 팔아 얼마를 받으셨는지는 가물가물하다. 다만 어머니의 장바구니에 담겨 돌아온 것은 하얀 쌀이 아니라 늘 거친 보리쌀이나 국수 갈마리뿐이었다는 것만은 또렷하다.

 

단지 손톱이 아프고 놀고 싶다는 이유로, 어머니가 온종일 산야를 헤매며 캐 오신 생명을 땅속에 파묻어버렸으니. 그 서늘한 배신을 만약 어머니께서 아셨다면 얼마나 가슴이 무너지셨을까. 이제야 뒤늦게 감나무 밑에 묻어둔 어머니의 피땀이 생각나 자꾸만 목이 메어온다.

 

당신도 배가 고파 연신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도, 자식들 입에 밥 들어가는 풍경이 세상에서 제일 배부르다던 어머니. 당신의 밥그릇을 아낌없이 덜어 내 앞에 밀어주시던 그 투박한 손길이 오늘따라 사무치게 그립다. 이제는 고기반찬에 따뜻한 흰 쌀밥을 지어 삼시 세끼 양껏 대접할 수 있는 형편이 되었건만, 야속한 세월은 이 못난 자식에게 불효를 씻을 기회조차 허락지 않았다. 어머니를 향한 회한은 가슴 한구석에 덧나는 상처처럼 남아, 지워지지 않는 원망으로 저릿하다.

 

오늘따라 시장통을 파고드는 찬바람이 매섭다. 하늘에선 마른 종잇장 같은 싸락눈이 흩날린다. 도라지를 조금씩 사 가시던 그 할머니가 오실 때가 한참 지났는데, 시장 골목 어디에도 그 마른 실루엣이 보이지 않는다. 가랑가랑하던 그 가냘픈 음성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아 혹여 탈이라도 나신 건 아닐까 마음이 쓰인다.

 

그 옛날 뒤꼍 감나무 밑에 도라지를 묻으며 어머니의 마음까지 묻어버렸던 그 어리석음을, 이제는 도라지 한 움큼을 더 얹어드리는 마음으로 속죄하고 싶어서일까. 부디 그 할머니만은 이 모진 겨울을 잘 버텨내시기를, 그래서 오래도록 그 당당하고도 애달픈 발걸음으로 우리 가게를 찾아주시길 간절히 빌어본다.

 

                             연탄의 길 / 박 순 철

 

석탄박물관에 왔다. 문경시 가은읍은 탄광촌으로도 잘 알려졌지만, 내가 어렸을 때 형님이 광부로 일하던 곳이기도 하다. 탄광 광부들의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박물관에 서니 마음속으로는 형님을 뵌 것 같아 반가우면서도 애잔한 마음이 몰려왔다.

 

문경 석탄박물관은 1934년부터 석탄을 캐던 막장이었다. 1994년 폐광될 때까지 43천여 광부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 그 당시 광부들은 국가와 가족을 위해 일하는 건설 역군이었고, 부모님 모시고 아들딸 공부시키던 한 집안의 가장이었다. 하지만 석탄에서 발생하는 일산화탄소가 인체에 치명적이고 대체 연료가 개발되면서 서서히 사양길에 접어들어 결국 1994년 폐광에 이르렀다.

 

문경시는 건설 역군들이 청춘을 바치던 현장을 1999석탄박물관으로 재탄생시켰다. 선조들의 삶을 되돌아보고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이 오늘날 우리가 별 어려움 없이 살아가는 기폭제가 되었음을 느끼게 하는 교육의 장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이런 역사의 현장이 없다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연탄도 사라질 것만 같다. 요즘 아이들은 연탄을 어떻게 이해할까? 하루가 빠르게 변하는 인터넷의 정보로 연탄의 이미지를 아는 아이들은 있을지언정, 어떤 재료로 어떤 과정을 거치며 연탄이 만들어지고 과거에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모를 것 같다.

 

갱안으로 들어섰다. 어두컴컴했다. 왜인지, 발을 들여놓는데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다. 오래전 광부들이 일하던 막장 내부는 햇살 한 줌 들지 않는 사방이 온통 암흑투성이였다. 방심하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 한 사내의 형체가 어렴풋이 드러났다. 사내의 손에는 곡괭이가 들려있고 랜턴이 달린 헬멧을 쓴 모습은 낯설기만 했다. 아이들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우주인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어머니와 철없던 동생들을 위해 맨 어깨에 통나무를 메고, 함마를 내리치던 형님 모습과 겹쳐지기도 했다. 그랬다. 갱안에 홀로 서 있는 사내는 바로 우리 집 가장 노릇을 했던 형님의 모습이었다. 탄광의 열악한 작업 환경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모골이 송연해지고 가슴이 답답해 왔다.

 

한 발짝 더 들어가니 허름한 작업복을 입은 광부 두세 명이 삽으로 석탄을 케고 있는 모형도 있다. 그들도 우리들의 아버지, 또는 삼촌, 형님, 오라버니들이었을 게다. 그들은 자신이 돌보지 않으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가족들이, 그것도 냉방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것을 염려해 사지(死地)와도 같은 저 검정 굴속에서 이를 악물고 탄 캐는 작업에 임했으리라.

 

큰 형님은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 객지로 떠돌았다. 명절 때 집에 오는 형님은 칼날같이 날이 선, 사지 바지에 가죽점퍼를 입고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카리스마가 넘쳤다. 어린 내게 용돈을 주고 연필과 공책을 사다주는 아버지같이 느껴지던 분이었다.

 

얼마 전, 봉화에 있는 어느 광산 입구가 무너져 광부 2명이 매몰되었다는 뉴스를 접하고는 잊고 지내던 형님 생각에 가슴이 먹먹했다. 그들 광부 두 명은 믹스커피로 장장 열흘 가까이 되는 221시간을 버티며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따돌리고 용케 구조되었다. 살아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그들을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구했지 싶다. 이곳 석탄박물관 이전, 탄광에서 일하던 분들도 그런 위험한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을 하니 마음이 착잡하다.

 

예전부터 탄광촌 주변에는 삼겹살집이 성행했는데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다. 목에 걸린 탄가루를 씻어내기 위해 퇴근길에 삼삼오오 삼겹살집으로 몰려가 소주를 곁들여 마시며 하루의 피로를 푸는 모습도 눈에 삼삼하다. 형님이 살아계신다면 삼겹살 정도는 언제든지 사드릴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목구멍을 타고 오르다가 멈추며 눈앞이 뿌예진다.

 

요즘도 달동네에 사는 누군가는 연탄 한 장을 목숨처럼 여기며 연탄이 사양(斜陽)될까 두려워한다. 그들에게 연탄은 단순히 몸을 녹이는 기능뿐 아니라 삶을 이어가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연탄 없이는 겨울을 나지 못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연탄이 우리 주변에서 지워지고 서서히 잊히고 있다. 연탄도 바야흐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한 시간여 탄광 박물관을 들러보고 출구를 빠져나오니 광부들의 일상을 그린 벽면 속의 그림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이발하는 모습, 몸에 묻은 탄가루를 씻어내기 위해 목욕탕 욕조에 몸을 담근 상반신의 모습, 푸줏간에 걸린 돼지 다리, 막걸리 주전자를 앞에 두고 마주 앉은 사람의 모습은 마치 그 시대를 보는 듯했다.

 

석탄박물관을 돌아보고 나오는데 맞은편에 있는 안시성, 육룡이 나르샤등 내가 즐겨 보던 대하 드라마를 촬영한 세트장이 눈길을 끌었다. 오늘은 그곳까지 둘러볼 계획이 없으니 아쉽기만 하다. 다음에 오면 꼭 드라마 세트장에 들려 그 시대로 돌아가 어울려보고 싶다.

 

                                  노을은 아름답다 / 박순철

 

억지 춘향이도 이보다는 나았을까.

 

모처럼 찾아온 금싸라기 같은 월요일 휴무였다. 수해 복구가 한창인 어수선한 시국이라 집에서 조용히 자숙하며 쉬고 싶었다. 몇 번이나 고사했지만, 이웃 주민들은 기어이 회비까지 대신 내어주며 나를 문밖으로 끌어냈다. 그 성화에 못 이겨 오른 관광버스, 그러나 발을 들이는 순간 '잘못 왔구나' 하는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버스 안을 가득 메운 이들은 하나같이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이었다. 머지않아 마주할 나의 미래라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침 옆 차선에 선 관광버스에는 생기발랄한 젊은이들이 가득 타고 있어, 그 선명한 대비가 마음 한구석을 더욱 쓸쓸하게 훑고 지나갔다.

 

아내는 창가에, 나는 통로 쪽에 몸을 싣고 있는데 건너편 아주머니가 찐 밤 몇 알을 내밀었다. 빈손으로 몸만 달랑 실어 온 처지라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뒤이어 정성스레 빚은 송편까지 건네받자, 부담감은 이내 미안함을 넘어섰다. 손사래 치며 사양하는 내게 아주머니는 그러면 다음에 사주면 되지 뭐!”라며 호탕하게 웃으시곤 한사코 내 손바닥에 떡을 얹어주셨다. 둘러보니 차 안 여기저기는 이미 싸 온 음식을 나누며 두런두런 정담을 나누는 소리로 가득했다. 그 소란스러움이 어느덧 낯선 소음이 아닌, 사람 사는 냄새 풍기는 정겨움으로 다가왔다.

 

버스가 서해안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차 안의 분위기는 일순간 달아올랐다. 아까부터 어깨를 들썩이던 어르신들이 음악에 맞춰 본격적인 춤사위를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젊은이들 못지않은 혈기와 일사불란한 몸짓으로 흥을 돋우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황혼의 문턱에 서서도 저토록 뜨겁게 생을 흔드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문득 지는 해의 장엄함을 예감했다.

 

우리 민족은 예부터 노래를 좋아했고 흥이 많은 민족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외부의 침략에 멍들고 수난의 세월을 견뎌온 고난의 역사가 서려 있다. 저 몽골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던 날들, 삼국 통일을 위해 뺏고 빼앗기던 민족 간의 치열한 살육전, 일제 강점기를 지나 동족상잔의 6·25까지. 그 참혹한 세월 속에서도 우리 민초들은 흥이 나면 노래를 불렀고 어깨춤을 추었다. 아니, 그것은 밖으로 뿜어내지 못한, 가슴속에 켜켜이 쌓인 울분을 삭이기 위한 생존의 방편이었으며, 기나긴 고통에 지친 영혼들의 처절한 한풀이였으리라.

 

어르신들의 그런 들뜬 모습을 마뜩지 않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겠지만, 이 버스 안의 풍경만큼은 결코 가볍게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유연한 몸짓은 여전한 생의 건강함을 증명하는 것이었고, 어떤 일이든 맡겨만 준다면 젊은이 못지않게 해낼 수 있다는 무언의 항변처럼 느껴졌다.

 

저 어른들과 똑같이 어울려서는 안 된다. 아직 직장에 몸담은 사람이 어르신들과 어우러져 노는 건 격에 맞지 않는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나보다 나이가 적은 이는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일요일이라면 모를까,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에 젊은 사람이 하릴없이 관광버스에 몸을 실었을 리 만무했다.

 

난지도를 돌아오는 유람선에는 가요 반주기가 설치되어 흥겨운 곡조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무대로 나선 몇 분이 음악에 몸을 맡기자, 동참하는 이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어르신들의 춤사위는 식을 줄을 몰랐다. 나는 귀를 찢는 듯한 소음이 듣기 싫어 3층 갑판으로 올라갔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배 뒤편으로 하얗게 부서지는 물거품을 응시했다. 비는 내리지 않았으나 잔뜩 찌푸린 하늘은 멀리 떠 있는 섬들을 구경할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 다른 곳에선 수해 복구로 비지땀을 흘리고 있을 텐데.’

 

심장 한편에 웅크리고 있던 양심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나는 차라리 현실에 충실하기로, 이 낯선 여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2층 선실로 내려가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우리 민요에 맞춰 너울너울 춤사위를 그려내고 있었다. 아래층의 빠른 박자에 몸을 맡긴 소란스러운 춤판과는 달리, 그곳에는 말로 다 못 할 여유와 안정감이 흘렀다. 반주자도, 녹음된 테이프도, 열창하는 가수도 없었다. 마이크조차 없는 맨목소리의 노래였지만 그 울림은 어떤 음악보다 깊고 편안했다.

 

분위기를 이끄는 이는 쪽진 머리에 비녀를 꽂은, 여든은 족히 되어 보이는 할머니였다. 아직도 비녀의 절개를 고집하는 여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학이 비상하듯 고아한 춤사위에 취해 창밖에서 한참을 구경하던 찰나, 갑자기 평화롭던 공기에 이상한 기류가 섞여들었다. 장단에 맞춰 나비처럼 너울거리던 흥이 어긋나며 엇박자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알고 보니 할머니 앞에서 노래를 부르던 사람이 문제였다. 그는 어르신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옷차림으로 귀를 자극하는 빠른 박자의 노래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제야 무릎을 쳤다. 평생 김치와 보리밥으로 단련된 몸이 어느 날 갑자기 치즈와 빵만으로 허기를 채울 수 있을까. 막걸리를 마시고 걸게 트림하던 농부가 양주를 마신다고 같은 생리작용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어르신들끼리 흐드러지게 놀게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딴에는 위한답시고 나선 친절이 오히려 흥을 깨뜨리고 있었다.

 

하지만 곧이어 날 선 화살이 나를 향했다. ‘그런 비판적인 눈으로만 바라보는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천하에 둘도 없는 샌님이 아닌가.’ 결과야 어찌 되었든, 저 사람은 어르신들을 위해 성심성의껏 무대 앞에 서지 않았는가. 순간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무엇이 나를 저들 앞에 나서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가. 고작 현직에 있다는 얄팍한 자존심 때문인가?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뒷짐만 지고 있었단 말인가. 저분들 역시 젊은 날엔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 가장과 어머니로서 책임을 다하며 누구보다 치열한 생을 건너온 분들이 아니던가.

 

버스로 돌아오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지만, 정식 회원도 아닌 처지에 선뜻 나서기가 어정쩡했다. 회장인 듯한 연세 지긋한 분이 술병을 들고 다니며 잔을 권할 때는 민망함마저 밀려왔다.

 

만일 내가 저 모임의 일원이었다면 기꺼이 그 짐을 나누어졌을 텐데. 아침의 썰렁했던 기분은 어느덧 사라지고, 어르신들을 위해 기운이라도 보태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하지만 끝내 앞으로 나서지 못하는 결단력 없는 내 성격이 오늘따라 유독 밉고 원망스러웠다.

 

다시 뱃전으로 나오니, 조금 전 민요를 부르던 쪽진머리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마주 보고 서서 어깨춤을 추고 있었다. 타령을 주고받으며 너울거리는 그 모습이 어찌나 정겨운지, 이 세상 어느 부부가 저토록 흥겨운 합을 보여줄 수 있을까 싶어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때, 애절하게 가슴을 파고드는 가락 하나가 바람에 실려 왔다.

 

세월이 가라는 것을 어찌하라고/세월아 가려거든 너 혼자나 갈 것이지/아까운 내 청춘은 왜 데려가려 하나.

 

그것은 서산에 걸린 해가 너무 서글프고 아쉬워 읊조리는 탄식 같기도 했고, 지는 해를 붙잡아 두려는 애절한 몸부림 같기도 했다. 세상을 향해 포효하던 젊음을 불태우고 이제 막 서산으로 기우는 해를 바라보며, 지난 세월에 대한 안타까움을 노래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오는 백발을 어찌 막으며, 가는 세월을 어느 장사인들 붙잡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가만히 지켜보니, 하루의 소임을 다하고 서산마루에 걸린 저 해는 결코 서글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온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타오르는 그 빛깔은 더없이 눈부셨다. 젊은 날의 뜨거웠던 태양이 정열의 상징이었다면, 모든 것을 품어 안고 저무는 노을은 장엄한 인생의 완성이다. 지는 해는 서글픈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법이다. 아니, 아름답다 못해 실로 장엄하기까지 했다.

 

                           열정(冽井) / 박순철

 

지난봄 문학기행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 한여름의 열기를 뚫고 다시 안동 도산서원으로 향했다. 일행의 걸음에 맞추느라 차마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던 우물, '열정(冽井)'의 물 한 모금이 내내 마음 한구석에 고여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 다녀간 길이라 익숙할 법도 한데,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이라는 문구가 차창을 스치자, 마음은 이내 깃을 여미듯 숙연해졌다.

 

매표소 앞에서 요금을 치르려 카드를 꺼냈을 때였다. 직원은 내 얼굴을 슬쩍 살피더니 무심하게 한마디를 건넸다. "표 안 사셔도 되니 그냥 들어가세요." 혜택이 반갑기보다, 공짜 표 한 장으로 증명된 덧없는 세월이 야속해 가슴 한편으로 서글픈 바람이 휑하니 지나갔다.

 

자글자글 끓어오르는 햇볕을 피해 나이 지긋한 소나무 그늘 밑으로 몸을 숨겼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향긋한 솔향을 이정표 삼아 서원 안쪽으로 발을 들이자, 우측에 자리한 네모난 석조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기다림 끝에 다시 마주한 우물, ‘열정(冽井)’이었다.

 

열정(冽井)이라니. 내가 아는 열정(熱情)은 무언가에 온 마음을 쏟아붓는 뜨거운 정성이 아니던가. 차가운 물을 품은 우물에 어찌 이토록 뜨거운 이름이 붙었을까 의아해하던 찰나, 곁에 놓인 설명문이 내 무지를 일깨웠다.

 

열정이란, 마을이 떠나도 우물은 옮기지 못하며, 아무리 퍼내어도 줄어들지 않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마음의 잔잔한 수면 위로 깊은 파문이 일었다. 사람이 떠나가도 제자리를 지키는 변치 않는 신의, 목마른 이라면 누구든 와서 축이고 가라는 넉넉한 품. 그 이름은 차가운 우물물이 아니라,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고요하고도 뜨거운 위로의 다른 이름이었는지 모른다.

 

우물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두 길은 됨직한 깊은 곳에서 맑은 물방울이 보글보글 솟구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목을 축이고 싶었지만, 물을 길어 올릴 두레박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비록 마른 목을 적시지는 못했으나 마음은 이미 그 청량한 물을 들이켠 듯 서늘해졌다. 그 우물을 응시하는 찰나, 내 유년의 우물 하나가 기억의 심연에서 함께 솟아올랐다.

 

어린 시절, 마당에 우물을 품은 집은 부의 상징이었다. 그 집 여인네들의 고단한 일손도 우물 깊이만큼이나 수월했을 것이다. 초가삼간 우리 집엔 그런 호사가 있을 리 없었다. 어머니는 새벽이슬이 가시기도 전에 마을 어귀 공동 우물로 향하셨다.

 

사립문을 나서면 낮은 돌담을 끼고 굽이진 고샅길이 이어졌고, 새벽바람은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감아쥐며 가벼운 춤을 추었다. 물동이를 이고 돌아오는 종종걸음 끝에 찰랑이는 물줄기가 어머니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물길을 막으려 연신 물동이를 훔쳐내던 그 손짓은 멀리서 보면 허공에 휘두르는 헛손질 같았으나, 사실 그것은 홀로 육 남매를 일궈낸 가장 단단한 생의 몸짓이었다.

 

여름 뙤약볕 아래 놀다 지쳐 돌아오면, 나는 부엌으로 달려가 엎드린 채 물동이에 얼굴을 묻었다. 대나무 바구니로 덮여 있던 그 서늘한 물은 단순한 갈증을 넘어, 유년의 허기와 서러움까지 말끔히 씻어주곤 했다. 밤이 깊으면 어머니는 부엌에 물이 넉넉히 남아있어도 기어이 새 물을 길어와 장독대에 정화수를 올리셨다. 어린 나는 그 정성의 이유를 알지 못했다. 훗날에야 그것이 군에 간 큰형님의 무사 귀환을 비는 지극한 모성(母性)이었음을 깨달았다.

 

유난히 추웠던 어느 겨울, 장독대의 정화수 그릇이 얼어 터지는 불길한 일이 생겼다. 어머니는 그날 아침 내내 밥 대신 깊은 한숨만을 삼키셨다. 며칠 후, 훈련 중 큰 부상을 입어 육군 병원에 입원했다는 형님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형님은 끝내 무사히 돌아왔으나, 그날의 상흔은 평생 형님의 삶을 조용히 잠식해 들어갔다. 어머니는 그 아픈 아들을 끝까지 품으셨다.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깊은 한()과 정성을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채 사셨다.

 

우물은 단순히 물을 긷는 곳이 아니었다. 마을의 온갖 사연과 정을 품어 안은 소통의 광장이었다. 아낙네들이 모여 빨래하며 두런두런 나누던 이야기는 우물가를 타고 마을 구석구석으로 번져나갔다. 슬픔과 기쁨, 수치와 자랑이 모두 그 물줄기를 타고 흘렀다. 어쩌면 마을의 속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은 사람보다 우물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도산서원의 열정(冽井) 앞에 서니, 이 우물 또한 같은 자리에 놓여 있음을 느낀다. 퇴계 선생 또한 번민이 깊은 날이면 이곳을 찾았을 것이다. 맑은 물 한 바가지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흐려진 마음을 다잡았을 것이고, 세상의 부조리 앞에서도 선비의 도리를 지키고자 스스로를 경계했을 터다.

 

내가 가닿지 못한 시대를 살다 간 분이지만, 그 마음만은 우물물처럼 지금도 전해져 온다. 열정(冽井)은 뜨거운 마음이 아니라, 결코 마르지 않는 마음이다. 뜨거운 정열은 한때 타오르다 재를 남기고 사라지지만, 맑고 차가운 정신은 고요히 스며들어 영원히 남는다. 세상은 우리에게 열정이 식었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식지 않는 '뜨거움'이 아니라 마르지 않는 '깊이'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고요히 솟구치는 우물 앞에서 나직이 다짐해 본다. 언젠가 내가 떠나야 할 자리일지라도, 이 우물처럼 끝까지 머물러야 할 마음이 있다고. 훗날 누군가 목마른 영혼으로 내 삶의 곁을 지나갈 때, 주저 없이 내 마음 한 모금 내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이다.

 

열정(冽井)’. 그 이름을 입안에서 가만히 되뇌며 서원을 나선다. 오늘 내가 마신 것은 한 사발의 물이 아니라, 수백 년의 세월을 이겨낸 맑은 정신 한 모금이었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도 묵묵히 남아 목을 축여주는 저 우물처럼, 내 마음 한쪽에도 결코 마르지 않는 샘 하나 깊이 묻어두고 싶다.

 

만약 내 생의 끝자락에 남을 그 우물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나 역시 주저하지 않고 그 곁에 푯말을 세울 것이다. 맑고 차가운 위로가 쉼 없이 솟아나는 이름, ‘열정(冽井)’이라고.

 

지난봄 문학기행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 한여름의 열기를 뚫고 다시 안동 도산서원으로 향했다. 일행의 걸음에 맞추느라 차마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던 우물, '열정(冽井)'의 물 한 모금이 내내 마음 한구석에 고여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 다녀간 길이라 익숙할 법도 한데,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이라는 문구가 차창을 스치자, 마음은 이내 깃을 여미듯 숙연해졌다.

 

매표소 앞에서 요금을 치르려 카드를 꺼냈을 때였다. 직원은 내 얼굴을 슬쩍 살피더니 무심하게 한마디를 건넸다. "표 안 사셔도 되니 그냥 들어가세요." 혜택이 반갑기보다, 공짜 표 한 장으로 증명된 덧없는 세월이 야속해 가슴 한편으로 서글픈 바람이 휑하니 지나갔다.

 

자글자글 끓어오르는 햇볕을 피해 나이 지긋한 소나무 그늘 밑으로 몸을 숨겼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향긋한 솔향을 이정표 삼아 서원 안쪽으로 발을 들이자, 우측에 자리한 네모난 석조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기다림 끝에 다시 마주한 우물, ‘열정(冽井)’이었다.

 

열정(冽井)이라니. 내가 아는 열정(熱情)은 무언가에 온 마음을 쏟아붓는 뜨거운 정성이 아니던가. 차가운 물을 품은 우물에 어찌 이토록 뜨거운 이름이 붙었을까 의아해하던 찰나, 곁에 놓인 설명문이 내 무지를 일깨웠다.

 

열정이란, 마을이 떠나도 우물은 옮기지 못하며, 아무리 퍼내어도 줄어들지 않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마음의 잔잔한 수면 위로 깊은 파문이 일었다. 사람이 떠나가도 제자리를 지키는 변치 않는 신의, 목마른 이라면 누구든 와서 축이고 가라는 넉넉한 품. 그 이름은 차가운 우물물이 아니라,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고요하고도 뜨거운 위로의 다른 이름이었는지 모른다.

 

우물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두 길은 됨직한 깊은 곳에서 맑은 물방울이 보글보글 솟구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목을 축이고 싶었지만, 물을 길어 올릴 두레박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비록 마른 목을 적시지는 못했으나 마음은 이미 그 청량한 물을 들이켠 듯 서늘해졌다. 그 우물을 응시하는 찰나, 내 유년의 우물 하나가 기억의 심연에서 함께 솟아올랐다.

 

어린 시절, 마당에 우물을 품은 집은 부의 상징이었다. 그 집 여인네들의 고단한 일손도 우물 깊이만큼이나 수월했을 것이다. 초가삼간 우리 집엔 그런 호사가 있을 리 없었다. 어머니는 새벽이슬이 가시기도 전에 마을 어귀 공동 우물로 향하셨다.

 

사립문을 나서면 낮은 돌담을 끼고 굽이진 고샅길이 이어졌고, 새벽바람은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감아쥐며 가벼운 춤을 추었다. 물동이를 이고 돌아오는 종종걸음 끝에 찰랑이는 물줄기가 어머니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물길을 막으려 연신 물동이를 훔쳐내던 그 손짓은 멀리서 보면 허공에 휘두르는 헛손질 같았으나, 사실 그것은 홀로 육 남매를 일궈낸 가장 단단한 생의 몸짓이었다.

 

여름 뙤약볕 아래 놀다 지쳐 돌아오면, 나는 부엌으로 달려가 엎드린 채 물동이에 얼굴을 묻었다. 대나무 바구니로 덮여 있던 그 서늘한 물은 단순한 갈증을 넘어, 유년의 허기와 서러움까지 말끔히 씻어주곤 했다. 밤이 깊으면 어머니는 부엌에 물이 넉넉히 남아있어도 기어이 새 물을 길어와 장독대에 정화수를 올리셨다. 어린 나는 그 정성의 이유를 알지 못했다. 훗날에야 그것이 군에 간 큰형님의 무사 귀환을 비는 지극한 모성(母性)이었음을 깨달았다.

 

유난히 추웠던 어느 겨울, 장독대의 정화수 그릇이 얼어 터지는 불길한 일이 생겼다. 어머니는 그날 아침 내내 밥 대신 깊은 한숨만을 삼키셨다. 며칠 후, 훈련 중 큰 부상을 입어 육군 병원에 입원했다는 형님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형님은 끝내 무사히 돌아왔으나, 그날의 상흔은 평생 형님의 삶을 조용히 잠식해 들어갔다. 어머니는 그 아픈 아들을 끝까지 품으셨다.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깊은 한()과 정성을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채 사셨다.

 

우물은 단순히 물을 긷는 곳이 아니었다. 마을의 온갖 사연과 정을 품어 안은 소통의 광장이었다. 아낙네들이 모여 빨래하며 두런두런 나누던 이야기는 우물가를 타고 마을 구석구석으로 번져나갔다. 슬픔과 기쁨, 수치와 자랑이 모두 그 물줄기를 타고 흘렀다. 어쩌면 마을의 속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은 사람보다 우물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도산서원의 열정(冽井) 앞에 서니, 이 우물 또한 같은 자리에 놓여 있음을 느낀다. 퇴계 선생 또한 번민이 깊은 날이면 이곳을 찾았을 것이다. 맑은 물 한 바가지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흐려진 마음을 다잡았을 것이고, 세상의 부조리 앞에서도 선비의 도리를 지키고자 스스로를 경계했을 터다.

 

내가 가닿지 못한 시대를 살다 간 분이지만, 그 마음만은 우물물처럼 지금도 전해져 온다. 열정(冽井)은 뜨거운 마음이 아니라, 결코 마르지 않는 마음이다. 뜨거운 정열은 한때 타오르다 재를 남기고 사라지지만, 맑고 차가운 정신은 고요히 스며들어 영원히 남는다. 세상은 우리에게 열정이 식었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식지 않는 '뜨거움'이 아니라 마르지 않는 '깊이'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고요히 솟구치는 우물 앞에서 나직이 다짐해 본다. 언젠가 내가 떠나야 할 자리일지라도, 이 우물처럼 끝까지 머물러야 할 마음이 있다고. 훗날 누군가 목마른 영혼으로 내 삶의 곁을 지나갈 때, 주저 없이 내 마음 한 모금 내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이다.

 

열정(冽井)’. 그 이름을 입안에서 가만히 되뇌며 서원을 나선다. 오늘 내가 마신 것은 한 사발의 물이 아니라, 수백 년의 세월을 이겨낸 맑은 정신 한 모금이었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도 묵묵히 남아 목을 축여주는 저 우물처럼, 내 마음 한쪽에도 결코 마르지 않는 샘 하나 깊이 묻어두고 싶다.

 

만약 내 생의 끝자락에 남을 그 우물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나 역시 주저하지 않고 그 곁에 푯말을 세울 것이다. 맑고 차가운 위로가 쉼 없이 솟아나는 이름, ‘열정(冽井)’이라고.

 

                           깨우지 마세요 / 박순철

 

언제나 떠나가는 해는 아쉽고, 새로이 다가올 해에 대한 기대감으로 마음이 설레는 세밑이다. 한 해를 매듭짓기 위해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에는 생동감이 넘친다. 거리마다 휘황찬란하게 불을 밝힌 크리스마스트리가 눈길을 사로잡고, 드문드문 들려오는 캐럴은 연말 특유의 들뜬 분위기를 자아낸다. 종교인들에게는 더없이 기쁜 명절이 다가오고 있다지만, 나는 그저 굴곡 많았던 한 해가 역사의 뒤꼍으로 총총히 사라지는구나 싶은 생각에 마음이 어지러울 뿐이다.

 

연말을 맞아 저녁이나 같이하자는 직장 선배의 제안에 길을 나섰는데, 약속 시각보다 십여 분 일찍 도착하고 말았다. 오전에 세 시간 가까이 자전거를 탄 탓인지 가만히 서 있는 다리가 묵직하게 아파왔다. 그렇다고 잠시 앉아 있자고 찻집을 찾아 들어가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어디 앉을 만한 곳이 없을까 두리번거리다 길가에 놓인 종이 박스 조각 하나를 발견했다. 찬 기운을 피하려 그것을 집어 들던 찰나, 내 시선은 상자 위에 적힌 문구에 못 박히듯 멈춰 섰다.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지는 문장이었다.

 

노숙자가 자고 있습니다. 깨우지 마세요.”

 

투박하지만 또박또박 정성을 다해 적어 내려간 글씨. 그 짧은 청탁이 가슴을 울컥하게 만든다. 이 엄동설한에 그저 종이상자 한 장에 의지해 어찌 잠을 청할 수 있었을까. 그 와중에도 깨우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적어둔 것을 보니, 그에게는 그 추운 바닥 위가 세상에서 가장 절실한 단잠의 터전이었지 싶다.

 

이 노숙인은 과연 어떤 사연을 품은 사람이었을까. 깨우지 말라는 문구를 미리 준비해 둔 것으로 보아, 길 위의 생활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정녕 돌아갈 따스한 둥지가 세상엔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차마 말 못 할 사정 때문에 스스로 세상으로부터 격리한 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다니는 것일까.

 

1997년의 그 지긋지긋한 IMF 한파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오늘날의 거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답답하고 서글퍼진다. 돌아보면 그 이전의 삶은 참으로 풍요로웠다. 흥청망청까지는 아니었을지라도, 잘 입고 잘 먹으며 내일의 성장을 의심치 않던 시절이었다.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이 잘 사는 나라의 대열에 합류했다는 자부심 또한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외환위기라는 파고는 무차별적이었다. 우리보다 앞서가던 선진국들조차 비틀거릴 만큼 그 위력은 매서웠다. 나라 전체가 위기를 극복하려 허리띠를 졸라맸으나, 단순히 허기를 참는 것만으로는 그 거대한 해일 앞에 맞설 수 없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법한 10대 재벌 기업들조차 도산의 공포 앞에 사시나무 떨듯 흔들렸다. 그 과정에서 잘 나가던 40~50대 중견 간부들은 명예퇴직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뒤에 숨은 절벽 아래로 등 떠밀려야 했다. 말이 좋아 명예퇴직일 뿐, 실상은 생존의 터전에서 반강제로 쫓겨난 비정한 축출이나 다름없었다.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은 가장들은 망연자실한 채 거리로 내몰렸다. 자녀들의 공부조차 다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들이닥친 경제 한파는 삶의 근간을 뿌리째 흔들어놓았다. 조금 더 넓은 집으로 옮겨가겠다던 소박하고 부푼 꿈은 산산조각 났고, 아이들의 학자금을 대지 못해 발을 구르던 이들은 끝내 신용불량자라는 낙인과 함께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어디 그뿐인가. 전도유망하던 젊은이들은 첫발을 내디딜 일자리조차 찾지 못해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거나 깊은 방황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외환위기 직후, 서울역 광장을 가득 메웠던 노숙인들의 행렬을 기억한다. 건물 지하실이나 전철역 구석에서 신문지 한 장에 의지해 웅크리고 있던 그들은, TV 화면 속에서 마치 넋이 나간 산송장처럼 비춰지곤 했다. 하지만 그들은 돌아갈 곳이 없는 자들이 아니라, 돌아갈 둥지를 통째로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

 

버팀목이던 가장이 쓰러지자 가정은 순식간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안살림만 알던 아내들은 자식들의 끼니를 위해 거친 직업 전선으로 뛰어들어야 했고, 고운 손엔 생전 처음 겪는 고된 노동의 훈장인 벌건 물집이 잡혔다. 시대의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마다 가슴 아픈 사연들이 흉터처럼 남았다.

 

노숙인이 깨우지 말라고 적어둔 종이상자를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젖는다. 노숙의 처절함을 몸소 겪어보진 않았으나, 그 못지않은 마음의 허기를 견뎌야 했던 젊은 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날도 오늘처럼 흰 눈발이 흩날렸고, 거리엔 요란한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사십여 년 전, 들뜬 도시의 열기 속에서 춥고 배고픈 몸을 이끌고 서울역 거리를 헤매던 상고머리 시골 소년. 서울에만 가면 공부도 하고 돈도 벌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던 소년의 푸른 꿈은 비정한 대도시의 장벽 앞에서 무참히 부서졌다. 그때 차가운 발길을 돌려 고향으로 내려왔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면 그 소년 또한 서울역 차가운 바닥을 전전하는 노숙인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깨우지 마세요라는 짤막한 부탁을 이불처럼 덮고 잠든 이는 과연 누구였을까. 당시 서울역을 배회하던 상고머리 소년보다는 나이가 지긋하고, 어느덧 길 위의 생활이 일상이 되어버린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십여 년 전의 그 소년이 차가운 대도시를 등지고 집으로 향했듯, 그 역시 무작정 거리를 헤매는 방황을 끝내고 이제는 따스한 가정의 온기 속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세밑의 공기는 유난히 차고 황량한데, 상자 하나를 남겨두고 떠난 그 노숙인은 지금쯤 어느 구석에서 찬 바람을 피해 몸을 낮추고 있을까. 서울역 한복판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순댓국을 바라보며 마른침만 삼켰던 소년 시절의 기억이 아릿하게 가슴을 저민다. 만약 길 위에서 그를 다시 마주친다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해장국 한 그릇 대접하며 추위에 얼어붙은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녹여주고 싶다.

 

약속 시간이 다 되어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차마 깔고 앉지 못한 채 손에 들고 있던 종이상자를 발견했던 그 자리에 조심스레 내려놓는다. 그가 청했던 단잠이 방해받지 않기를, 그리고 언젠가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종이상자가 아닌 포근한 집안의 천장이 그를 맞이하길 바라며 발걸음을 옮긴다.

 

<<박순철 >>

충북 괴산 출생(1949) 월간수필문학 천료 등단(1994)

한국문인협회,충북수필문학회 회원,수필문학충북작가회장.충북수필부회장 역임.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수필문학추천작가회 이사()

중부매일 · 충북일보 수필 연재. 수필문학 5매 수필 연재충청매일 ·

청주교차로신문 콩트 연재. 수도일보 수필 연재()

충북수필문학상(2004) 30회 수필문학상(2020) 수상

15회 자연보호 활동 수기 공모전 우수상(1996) 외 다수

수필집: 달팽이의 외출, 예일대 친구, 깨우지 마세요, , 엄마 책임이야.

콩트집: 소갈 씨, 엽편소설집: 목격자

이메일 : tlatks1026@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