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보다 / 최 지 안
귀를 열어두고 자는 습관이 생겼다. 남해에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바다만 바라보다 눈이 멀었는지 해가 뜨면 귀가 먼저 바다를 내달았다. 먼 곳에 있는 얼굴을 떠올리면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갔다. 한밤중 짐승처럼 집 주변을 서성이는 바람에도 으스스 귀가 일어서곤 했다.
보이는 것에 대한 믿음은 언제부터인가 파열음이 났다. 내가 보고 있는 세계는 얼마나 얄팍한 것이었을까. 진실은 늘 보이는 것의 안쪽에 숨어 있었다.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귀는 눈보다 정직한 것이 아닐까. 사물이 내는 소리, 생물과 비생물이 내는 소리는 거짓이 들어있을 틈이 없다.
오늘 밤에도 바람이 지나간다. 바닥으로 무언가 내팽개쳐지는 소리가 들린다. 바람이 후려친 사물들의 소리에 나가지 않고 귀를 세우고 밖의 풍경을 내다본다. 바람이 마당에 있던 의자를 뒤집어 놓는가 보다. 뒤이어 벽에 기대어 놓았던 빗자루 쓰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바람의 경로를 추측한다. 아마도 서쪽 호구산 골짜기로부터 와서 독일마을 쪽 해 뜨는 산골짜기로 가는 것이리라.
김광균의 <설야>가 생각난다. 시인은 보지 않고도 여인의 옷을 벗는 소리를 들려주어 눈 내리는 밤을 더듬어 보게 만든다.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김광균 <설야> 중에서-
어떻게 먼 곳에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는 들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시는 들리지도 않는 여인의 옷 벗는 소리를 상상하게 만든다. 이것은 우리의 청각이 시각보다 더 감각적인 것에 잘 반응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예다.
어느 밤이었던가.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 올라오나 보다’며 잠의 늪으로 다시 빠져드는데 올라온 발자국이 2층 내가 자는 침대 머리맡까지 다가왔다. 내 이마를 짚는 것 같았다. 발자국은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것 같았다. 아무 기척이 없는 듯도 하였다. 나는 더 자고 싶어 다시 잠의 늪으로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미 열린 잠은 가라앉지 않고 수면 위로 올라왔다. 발자국이 누구인지 궁금해 눈을 떴다. 그리고 나는 이 집에 나 이외에 체온을 가진 생물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나는 남해로 내려와 혼자 지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꿈이 아니라면 방금 내 이마를 짚어보고 간 것은 누구였을까. 계단 등을 켜고 내려가 1층 거실과 부엌을 둘러보았지만 잠을 자기 전 장면과 바뀐 것은 없었다. 꿈이라 하기엔 너무 생생한 인기척이었다. 도대체 내 귀가 본 것은 누구였을까. 착각을 한 것일까.
소리를 본다는 것은 이미 어렸을 때부터 터득한 감각일지 모른다. 시각이 흐려지면 귀가 예민해지는 것일까. 단지 우리에게는 볼 수 있는 눈이 있으므로 굳이 다른 기관을 통해서 사물에 대한 인식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다고 믿어왔던 것이 아니었을까. 비장애인의 경우라면 그렇다.
시각장애인은 소리로 세상을 본다. 소리로 사물을 인식하고 추론을 내리고 소리를 들음으로써 사고를 시작한다. 그렇다면 소리를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영어의 ‘SEE’가 ‘보다’와 ‘알아차리다’를 동시에 의미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일산의 오피스텔에서 지낼 때 귀가 눈 대신 본다는 것을 알았다. 지방에 내려가지 않을 때에는 줄곧 오피스텔에서 지냈다. 몇 평 되지 않는 오피스텔에서 옆방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불편하고 약간은 서러운 일이었다. 보이는 것은 눈을 감으면 차단할 수 있지만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고 귀를 닫을 수 없다.
청각은 의지 밖의 일이다. 어떠한 거름망도 없이 전해지는 기침 소리를 들으면 보이지 않는 옆방이 보였다. 보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건만. 그 소리는 기침 소리였다. 힘겹게 기관지 벽을 오르다가 내려가는 옆방 사람의 가래 섞인 기침 소리는 그의 나이와 성별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시간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얼굴도 마주친 적이 없었지만 옆방에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지 나는 귀로 알 수 있었다. 낡은 기관지와 느린 발걸음을 가진 늙은 남자라는 정보가 귀를 통하여 들어왔다. 물이 내려가는 소리만으로도 화장실 변기 물을 내리는 것인지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소리는 콘크리트 장벽이 있어도, 아는 사이가 아니어도 무엇을 하는지 다 알려 주었다. 그것은 눈으로 보지 않을 때 더 확실해졌다.
나는 그 오피스텔에서 번데기처럼 겨울을 났다. 그리고 그 곳을 이사를 나오기 몇 주 전, 옆방은 비워졌다. 매일 밤 들리던 가래 섞인 기침 소리가 끊겼다. 그가 어느 병실로 옮겨졌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 또한 그동안의 불편함 혹은 불쾌함과 알 수 없는 동정 따위가 뒤엉킨 나의 감정에 대하여도 뭐라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내 귀는 그와 동침이라도 한 듯 그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귀가 아니면 누가 내 옆방에 살다 갔는지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오피스텔의 삶을 끝내고 나는 남해로 내려왔다.
꿈이었을까. 바람이 울고 가는 남해의 밤. 내 이마를 짚어보고 갔던 것은 누구였을까. 혹시 죽은 언니였을까. 아님, 내 나이 스물 둘에 돌아가신 할머니였을까. 측은해서 내 이마라도 짚어주며 잘 견디라고 그렇게 다녀간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실체 없는 슬프고 지친 어느 영혼이 같은 처지라고 지나가다 잠시 머물고 갔을까. 혹은 어두워지는 눈 대신 귀라도 열어두고 살라고 귀띔이라도 하고 싶었을까.
대체 내 귀가 본 것은 누구였을까.
놓치다 / 최 지 안
꽃을 놓쳤다. 꽃가지를 꺾었는데 바닥으로 흩어졌다. 손은 빈 가지만 쥐고 있었다. 모래를 쥐었다. 손을 폈지만 시간 속으로 파묻혔는지 모래의 흔적이 없다. 쥐고 있다고 믿었지만 손을 펴면 아무것도 없다. 그런 꿈을 꾸는 날 되돌아올 수 없는 것들의 목록을 펼친다. 책갈피에 꽂아둔 단풍잎과 지난 봄 보리수 가지에 남기고 간 새의 깃털 같은 것들을.
내 손은 무엇이나 잘 놓쳤다. 손을 놓치고 그릇을 놓치고 기회를 놓쳤다. 놓친다는 것은 안타까운 언어다. 나를 떠난 언어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간혹 다시 오더라도 언제인지 기약할 수 없다. 입술 밖으로 나온 말을 다시 주워 담지 못하듯 손을 놓은 관계들은 다시 손을 잡지 못했다. 그것들은 발자국을 지우며 고개 너머로 사라졌다.
손에서 놓친 것들은 엉뚱한 곳으로 가버렸다. 휴지는 하얗게 자신을 풀어헤치며 책상 밑으로 가서야 멈춰버리고 설거지 하다 떨어진 접시는 와장창 몸을 부수며 바닥에 흩어졌다. 놓친 것들은 가속도가 붙고 엉뚱한 곳에 다다랐다. 의지와 상관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놓친 것들의 공통점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놓친 버스는 다시 타지 못했고 시간을 소비하고 미팅을 망치고 사람을 놓치는 릴레이를 했다. 내가 놓친 기회는 경쟁자에게 돌아갔고 내가 놓친 돈은 누군가의 지갑으로 들어갔다.
내가 놓친 소중한 것들. 한 번 놓친 희망들은 바늘처럼 촘촘히 가슴에 와서 박히기도 했다. 소망하는 것들이 나를 떠날 때 식어빠진 체념과 김빠진 무기력을 남겨놓고 가곤 했는데 길면 며칠, 짧으면 하루 이틀 동안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감정을 조절하느라 애를 먹곤 했다.
놓친다는 말은 하늘로 날아가 버린 풍선이다. 날개가 없는 것들에게 날아간다는 것은 아득한 실종이다. 아직도 기억에 또렷한 것은 동생이 놓친 풍선이었다. 그 헬륨 풍선을 우리는 ‘까치풍선’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에버랜드’지만 ‘자연농원’이라 불리던 곳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봄과 여름 사이로 기억된다.
자연농원에 놀러가서 남동생은 조르고 졸라 풍선을 손에 쥐었다. 결코 싸지 않은 풍선을 부모님은 망설이다가 큰 결단을 내리듯 사 주었다. 하얀 풍선. 가느다란 실에 연결된 하얀 고무풍선은 동생의 손놀림에 따라 우리 눈높이에 둥둥 떠 있었다.
그러나 동생의 행복은 길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풍선 끈을 놓쳤다. 동생의 울음이 풍선처럼 하늘로 높이 올라갔다. 자연농원 안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동생은 발을 구르며 울었다. 원망과 안타까움과 간절함이 묻은 동생의 울음은 하늘로 떠가던 풍선만큼이나 서럽고 아팠다.
무엇을 놓칠 때마다 나는 하얀 풍선과 동생의 울음을 기억해내곤 한다. 코발트색 하늘에 하얀 점으로 멀어져간 풍선. 소중한 것은 어처구니없이 떠나간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 했다. 무언가를 놓쳤을 때 나는 하얀 풍선이 연상되었다. 동생의 그 집착처럼 끈끈하고 까맣게 절은 분노와 무력감을 되씹어 보곤 하는 것이다. 신은 내 편이 아니라면서.
내게 있어서 놓치는 것과 풍선의 연합은 극단적 경험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체념과 슬픔을 함께 몰고 왔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자극과 무조건 자극이 여러 번 연합해야 고전적 조건이 형성 되지만 극단적인 고통의 경험은 단 한 번이라도 조건 형성 반응이 나타나듯 말이다. 전쟁이나 고문, 성폭력이나 가정 폭력처럼.
내가 놓친 어떤 손은 다시 오지 못했다. 병실에 도착했지만 이미 그 손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었다. 언니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급히 갔지만 자동차는 골목을 헤맸다. 무거운 눈 입자들이 하얀 꽃잎처럼 떨어져 차 유리창에 내려앉았다가 이내 녹았다. 저녁은 일찍 시작되었고 우리는 너무 늦었다. 마지막 인사를 그렇게 놓쳤다. 이승의 끈을 놓친 손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내가 놓친 것은 따뜻하고 아프고 슬픈 손이었다. 나를 업어준 손이었고 등록금을 내어준 손이었고 내 생애 가장 사랑한 손이었다. 나는 끝내 그 손을 놓쳤다. 내가 놓친 것 중 가장 안타까운 것이었다. 그 손을 놓치고 나는 둘째에서 첫째가 되었다.
잡은 것보다 놓치는 일이 더 많다. 잡은 고기를 놓치고 집토기를 놓치고 가까운 것을 놓친다. 눈앞의 편리함 때문에 정말 소중한 것들을 놓치는 것은 아닌지. 지금도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을까 나는. 그리고 우리는.
바람의 얼굴 / 최 지 안
남쪽에 와서 가장 많이 마주친 것은 바람이었다. 천의 얼굴, 만의 심성을 지닌 바람. 솔, 산들, 명지처럼 부드럽고 아련한 바람이 천사의 얼굴이라면 왜, 싹쓸, 도리깨바람처럼 모질게 쓸어버리는 바람은 악마의 얼굴이다. 어느 것이 진정 바람의 얼굴인가. 인간은 바람에게 많은 이름을 지어 붙였지만 정작 바람의 얼굴을 아는 이는 없다. 바람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궁극적 목적도, 종착지도 어디인지 모른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듯.
바람 때문이었다. 흔들리고 떠밀리던 어느 날 모든 것 두고 남쪽으로 가자고 바람이 속삭였다. 삶의 구조가 바뀌던 즈음, 바람이 몰아쳤고 나는 몇 가지 짐을 챙겨 남쪽으로 내려와 펜션을 운영하였다. 수년 전, 역마가 있다고 했던 관상쟁이의 말이 맞았다.
잘 한 일이었을까. 문화생활은 포기한다 해도‘이마트’라도 가려면 삼사십 분 운전 해야 하는 곳. 스콘이 먹고 싶어도 쉽게 사다 먹을 수도 없는 곳에 나를 유배시킨 것은 정말 괜찮은 일이었을까를 생각하는 날은 몸에 붉은 녹이 번지는 것 같았다. 어쩌다 서울의 바람 냄새를 맡고 오면 한 이삼일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처졌다. 마냥 부풀고 들떠서 내려왔는데 살아 보니 그 바람은 금새 꺼졌고 사람이 싫어 떠나왔건만 얼마 못 가 사람이 고파졌다.
그해 겨울. 바람은 짜고 맵게 엉성한 이력을 헤집었다. 남해의 겨울바람은 맹숭맹숭한 내륙과는 맛이 다르다. 이 바람과 맞닥뜨리면서 뼛속을 파고드는 냉기가 무엇인지 비로소 실감했다. 기온이 낮지 않아도 습기를 품은 고추바람은 몹시 차고 매서웠다. 무엇을 해 보겠다는 의지도 함께 얼어붙었다. 나긋나긋했던 삶도 갯바람에 구겨지고 질겨졌다.
바람은 계절을 따라다닌다. 어느 계절도 바람의 입김을 피해 간 적 없다. 특히 여름의 돌개바람은 모질다. 능소화의 목을 치는 것도, 추수를 앞둔 벼 이삭을 물에 처박는 것도 태풍의 배후인 바람이었다. 마당에 있던 야외 테이블을 집어던지고 상사화의 모가지를 똑똑 분지르는 것도 바람의 짓이다. 부술 듯 밤새 창을 흔들고 주변 시설물을 걷어찬다. 분풀이 하듯 들판의 풀들을 죄다 짓밟기도 하고 나무의 가지를 찢어놓는다. 눈에 난 몇몇은 아예 허리를 꺾어놓기도 한다.
물론 폭력이 바람의 전부는 아니다. 간들바람처럼 숨결 고운 봄바람은 마법을 부린다. 그러지 않고서야 일없이 나가고 싶고 꽃구경이 하고 싶어질 리 없다. 꽃바람은 유채꽃을 흔들고 연분홍 벚꽃잎을 날리며 청춘 남녀를 부른다. 포르르 날아오는 새처럼 두근거리고 여인의 속치마처럼 설레고 스무 살 뽀얀 손목처럼 야들야들한 봄바람. 그 바람에 너울너울 뜨고 싶어 벚꽃잎 살랑이는 다랭이마을로 차를 몰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봄에 남해에 올 일이다.
봄바람이 마법 같다면 가을바람은 소다수다. 가을 벌판에서 숨을 들이마시면 쪼그라든 폐부 깊숙이 신선한 공기가 들어찬다. 선선한 막새바람이 사이다 같이 톡 쏘며 코를 뚫어놓는다. 그 바람에 가슴도 따라 뚫린다. 산기슭 쪽에서 두 손 들며 몰아치듯 짐승처럼 물어뜯는 바람. 들판의 끝에서부터 가슴팍으로 달려드는 바람. 저 밑바닥 원망과 회한의 과거도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싹 날아갈 것 같다.
그 바람은 내 과거와 현재를 휘돌아 다시 나온다. 길가의 나뭇잎을 떨어뜨리고 새들을 쫓고 거꾸로 나를 뒤집어 내게 스민 문명의 자잘한 오만과 알량하고 궁핍한 변명을 흔든다. 저녁이면 밀려드는 근원 깊은 두려움과 절여지고 쪼그라든 외로움까지도 모두 탈탈 털어버린다.
물기 어린 내 과거도 이곳에 와서 한 줄기 바람이 되었다. 그늘에 걸어둔 무청처럼 색깔과 수분을 거두고 말라갔다. 탱탱했던 피부가 그을리고 주름지듯 그렇게 말라서 손으로 쥐면 바스러지는 누런 시래기가 되었다. 눈물도, 열정도, 무청처럼 푸릇한 젊음도 다 말라비틀어져서.
이제야 바람은 내게 속삭인다. 화려한 과거든 남루한 추억이든. 그저 자신과 함께 한 줄기 일어섰다가 조용히 소멸하는 것이라고. 잠깐 남쪽에서 아름다운 꿈을 꾸었을 뿐. 여기에 살았던 시간도 다 바람이었다고. 그러니 더 집착하지 말자고.
남해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람의 속성이다. 한 번 불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는 것. 남쪽으로 내려오던 나처럼 걷잡을 수 없다는 것. 나를 부수고 과거를 흔들고 관계를 자르고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서야 어느 아침 잠잠해지는 것. 그것이 바람이라는 것. 과거도 미래도 없이 단지 현재만 존재할 뿐. 그리하여 결국 깃털처럼 내 앞에 사뿐히 착지하는 깨달음 하나. 내 안에서 시작된 바람은 내 안이 종착지라는 것.
바람이 등을 떠민다. 나는 바람의 어깨에 남쪽의 시간을 얹어놓는다. 이제 개를 키우던 시간과 서쪽으로 기울던 붉은 저녁을 두고 떠난다. 머리칼에 스며든 숨결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감촉도 그저 기억으로만 남겨놓을 뿐, 잠시 왔다가 사라진 새끼 고양이의 앞발처럼 포근했지만 슬펐던 기억조차도 내려놓고 오랜 물음 하나 등에 지고 간다. 바람이 묻던 말.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를 향하는가.
무수히 마주쳤지만 아직 바람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미학적 거리 / 최 지 안
나와 대상 사이에 거리가 존재한다. 거리는 원래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존재 여부에 따라 값을 달리하는 것이어서 측정할 수도 기본값을 매기기도 어려운 그야말로 지극히 가변적인 속성을 지녔다. 주체는 언제나 나 자신이지만 상대의 값에 영향을 받는 미지수이므로 고무줄처럼 언제 어느 때 줄어들지, 혹은 늘어날지 모른다. 즉 거리는 예측불허다. 어느 날 갑자기 끊어질 수도, 혹은 더 두꺼워지기도 한다. 혹 간절하다고 해도 예의를 지켜야 하는 거리라면 지켜야 한다. 사람과의 사이에 존재하기도 하며 동물과의 사이에도 존재한다.
무늬를 만난 것은 8월의 아침이었다. 뒷마당에서 얇은 금속성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새끼 고양이였다. 하얀 바탕에 갈색과 회색 검정색 얼룩이 들어간 새끼 고양이는 눈 밑으로 눈물자국이 길게 나 있고 몸은 뼈가 앙상했다. 어쩌라는 것인지 날 보고 울었다. 나는 한참 쳐다보다가 어미 고양이가 돌아올 것 같아 그대로 두었다. 인터넷에 보니 어미가 급하면 새끼를 숨겨놓기도 했다가 다시 찾아간다고 했다.
점심에 다시 가니 병꽃나무 아래에서 자고 있었다. 힘이 없어서인지 도망도 가지 않았다. 아랫집 고양이 키우는 집 아주머니에게 얘기했더니 사료와 통조림 캔을 들고 나왔다. 먹이를 주자 고양이는 관심을 보였지만 많이 먹지는 못했다. 조금 먹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아픈 것 같았다. 다음날도 고양이는 뒷마당 화단 그늘에서 종일 잤다.
다음날 아침 수영장 청소를 하는데 고양이는 ‘야옹’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먹이를 주었는데 이번에는 많이 먹었다. 전날보다 눈빛도 또렷해지고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렇다고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거리를 두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저녁에도 먹이를 주었는데 잘 먹었다.
고양이는 약 15 센티미터의 몸길이에 얼굴은 작았다. 하얀색 바탕에 귀가 엷은 갈색이고 등과 다리 쪽에 동전만 한 동그란 얼룩이 있는데 회색과 검정이 들어간 얼룩무늬였다. 몸에 4가지의 색을 지닌 보기 드문 무늬였다. 어미가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 버려진 것이 틀림없었다. 이 녀석의 출처를 알 수 없었다. 혼자 내 집으로 기어들어 왔는지 어미가 데려다 놓은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 일은 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생긴 일이었다.
도대체 어떤 어미가 버렸을까. 아랫집 아주머니는 이런 무늬를 가진 고양이가 근방에는 없다고 했다. 나도 주변에서 마주치는 고양이의 털 색깔을 유심히 쳐다봤지만 이런 하얀 바탕에 얼룩이는 없었다. 턱시도, 혹은 검은색이거나 회색과 검정의 고등어 무늬가 대부분이었다. 아랫동네에 노란색 고양이가 있기는 했지만 그곳과의 거리는 좀 멀었다. 나는 녀석에게 무늬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무늬는 내 집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내 집 여기저기를 자기 집처럼 나다녔다. 회랑에서 놀거나 뒷마당 석축 빈틈에서 잠을 잤다. 아침저녁 하루 두 번, 뒷마당에 와서 야옹거리며 내가 밥을 주기를 기다렸다. 나는 의지와 상관없이 고양이에게 밥 주는 사람이 되었다. 이 작은 고양이가 빨리 성묘가 되어 스스로를 지킬 수 있기를 고대하며 생선도 사다가 구워 먹이고 달걀 프라이도 해 먹였다. 식사가 끝나면 녀석은 세수를 했고 블루베리 화분 위로 올라가 놀거나 메뚜기를 보며 장난질을 쳤다. 그러나 내게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나와는 늘 1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었다.
이 거리가 마음에 들었다. 녀석에게 정을 주는 일도 생기지 않을 것이고 밥을 준다는 거드름을 피우지 않아 좋았다. 나는 단지 새끼 고양이의 생존을 도왔을 뿐이다. 이런 내 마음을 저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인지 고양이의 야생성인지 우린 둘 다 1미터의 간격을 지켰다.
상대와의 거리는 처음 상대를 만날 때 설정한다. 새로운 만남은 늘 조심성과 관찰로 시작되고 우리는 상대와의 사이에 거리라는 어떤 덩어리를 던져둠으로써 스스로를 방어한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이 거리는 변화한다. 상대와 가까이 지내도 되는지 일정 거리를 두어야 하는지 나름대로 계산하며 거리를 없애기도 하고 거리를 더 늘이기도 한다.
요즘, 사람들은 관계에 있어서 ‘미학적 거리’라는 말을 쓴다. 너무 멀지도, 그렇다고 아주 가깝지도 않은 사이다. 이렇게 상대와의 사이에 필요한 예의를 우리는 ‘아름다운 거리’라고 약속을 한 모양이다. 친절을 베풀되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어 사생활이 침해받는 상황은 피하는 것이 서로에 대한 예의다. ‘우리가 남이가’라며 친분으로 결속을 다지던 맹세는 ‘오지랖’이나 ‘주제 넘는’ 일이거나 ‘과잉 간섭’으로 해석될 수 있으니 이쯤에서 더는 다가가지 말자는 것이다. 요컨대 이 ‘미학적 거리’는 상대의 세계를 침범하지 않으며 내 세계를 보장받는 꽤 세련된 방어 수단이다. 서로의 체온을 주고받지 않아서 책임감도 없는 조금은 비겁하고 편리한 거리다.
나와 무늬와의 관계가 그러했다. 무늬와 처음 만났을 때의 거리는 1미터가 넘었지만 점점 1미터 이내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거리가 아주 줄어들지는 않았다. 놀면서도 나의 동작을 살피며 거리를 두었다. 비록 내게서 먹이를 받아먹지만 야생 고양이의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무늬와 밥을 준다는 권리를 내세울 생각이 없는 나는 적당한 거리를 둠으로써 관계를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그 뽀얗고 부드러운 솜털을 가진 녀석에게 빠져들지 않겠다는 내 나름의 방어였는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얼마 후면 이사를 가야 해서 누군가를 책임질 형편도 못되었다.
무늬는 갈수록 예뻐지고 활기찼다. 털에서 윤기가 흐르고 움직임도 빨라졌다. 무늬가 예뻐질수록 이사 날짜는 다가왔다. 내 맘대로 무늬를 데려가야 하는지 고민했지만 그대로 두고 가는 것이 무늬에 대한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랫집 아주머니에게 무늬를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늬에게 줄 통조림과 간식을 산 날이었다. 아침에 사료만 준 것이 미안해 읍으로 나가서 사 가지고 왔다. 맛있는 것을 맛보게 할 생각에 저녁이 되길 기다렸지만 무늬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오지 않았다. 커다란 줄무늬 고양이들만 집 주변에 얼씬거릴 뿐이었다. 그즈음 다른 고양이들이 뒷마당에 들락거리며 무늬를 위협하던데 그들에게 밀려 난 것일까. 놀러 나갔다가 어딘가에서 죽었을까. 예뻐서 누가 데려갔을까.
꿈을 꾼 것 같았다. 무늬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휴대폰에 남긴 사진과 영상이 아니라면 꿈을 꾼 것이 틀림없었다. 블루베리 화분 위에 올라가서 장난치던 무늬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거리가 없어야 했을까. 미학적 거리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거리였을까. 간절했지만 거리를 좁히지 않은 어떤 인연도 그래서 닿지 못했던 것일까. 한동안 환청을 듣곤 했다. 새끼 고양이 울음소리인가 하면 새소리였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거리는 그렇게 무늬의 생사를 모르는 채로 끝이 났다.
무늬에게 밥만 준 것이 아니었던가 보다.
'추천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불씨, 영원한 불꽃/ 김 성 문 (0) | 2026.06.04 |
|---|---|
| 박 순 철 수필 6편 (0) | 2026.06.04 |
| 언제든 돌아가리라 / 안 숙 (0) | 2026.05.31 |
| 여울에 숨긴 독 / 변 종 호 (2) | 2026.05.29 |
| 제 21회 생활문예대상 대상작ㅡ서른 번의 절과 한 가지 마음 / 남성진 (0) | 2026.05.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