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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저녁놀 / 김 장 출

장대명화 2025. 9. 15. 04:33

                                     가을 저녁놀 / 김 장 출

 

세상에 아름다운 것이 어디 한두 개이랴. 밤하늘에 빛나는 별, 들에 핀 꽃, 하얀 눈 위에 떨어지는 설월(雪月), 마른 갈대밭에 이는 바람 등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뭉클하게 하고, 뛰놀게 하는 아름다운 것은 참 많기도 하다.

 

그래서였을까. 영국 낭만파 시인 워즈워드는 그의 시 <무지개>에서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은 뛰나니"라고 노래했다. 물방울이 햇빛을 받아 반원형으로 하늘에 나타나는 일곱 가지 색깔의 무지개, 그 무지개를 보면 누구라도 가슴이 뛸 수밖에 없으리라. 또 우리나라의 시인 김광균 씨는 그의 시 <설야>에서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는 눈을 보며 “싸늘한 추회(追懷)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라고 노래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우리 마음은 설레고 뛴다.

 

나는 어느 가을날, 아버지와 함께 추수가 끝나갈 무렵 가을 들판에 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 논둑에 멍하니 서서 무심코 바라보았던 저녁놀, 양편으로 엎드려 있는 듯 낮은 산등성이가 비스듬히 내려앉은 사이로, 하늘과 맞닿은 짧은 지평선 위로부터 주황색으로 물든 엷은 하늘, 그 위에 한 자락 구름을 반쯤 끌어다 덮고 덩그렇게 떠 있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멧 방석 같은 햇덩이를 바라보는 순간 딱 숨이 멈췄다. 마침, 내 나이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사춘기 때라, 굴러가는 낙엽에도 눈시울이 붉어질 여린 마음에, 그 환영 같은 정경이 못 같이 박히고 말았다.

 

강둑에 서 있는 미루나무에 매어 둔 암소는 젖 뗀 송아지를 찾아 울고, 끼룩끼룩 하늘을 나는 청둥오리 떼 무리는 황혼빛을 가득 담고 날개 치며 땅바닥으로 내려왔다가 하늘로 솟구쳐 날아올랐다가 다시 내려왔다. 낮은 언덕바지 너머 강가엔 바람에 쓰러졌다 일어서는 갈대꽃 춤사위가 애틋하게 가슴을 흔들고 있었다. 가을 저녁놀은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정경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 그때 그 정경에서 느꼈던 감상의 감격을 회상하면 지금도 내 가슴은 뛰고 설렌다.

 

그 후 저녁놀에 서린 추억을 잊으려 해도 통 잊히지 않았다. 그림으로 그려 보관하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어느 날 내가 잘 아는 화가 친구에게 그 광경을 말해주면서 최고의 상상력을 동원 그림을 그려 주도록 극구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게 그리 쉬운 일이라고 생각한 내가 어리석었다. 친구의 영감 속에 나와 같이 간절함이 이입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림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나의 간절한 소망은 결국 이뤄질 수가 없었다. 내가 직접 그림을 그려보려고 생각하기도 했다. 못 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그림에 대한 조예가 없는 풋내기에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또한, 내가 원하고 바라는 그 가을 저녁놀에 내 마음에 홀린 영상을 그림으로 그린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자신이 서지 않은 일이었다. 비싸게 주고 산 그림물감만 서랍 안에서 지금까지 잠자고 있다.

 

지난날의 잊지 못할 추억을 그림이라든지 글로써 형상화하여 보관한다는 것은 퍽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때 그 장소와 시간에 느꼈던 감명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은 언어도단일 수밖에 없으리라. 이미 그날의 추억은 추억 그 자체로써만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 세월에 묻힌 추억은 어떤 방법으로도 재현될 수 없으니 말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허물어 버리고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 모든 것을 변하게 한 괴물이기에.

 

고향이 그리울 때는 그림 같은 그 유년의 추억이 환영처럼 떠오른다. 가을 저녁놀은 나의 첫사랑처럼 아름답고 내가 처음으로 맛본 달콤한 첫 키스와 같다. 나는 이보다 더 가슴 뛰는 일은 겪어 보지 못했다. 서편 하늘에 저녁놀이 뜰 때나 황혼에 대한 사진, 그림, 영상, 시, 이야기만 나오면 나의 가슴은 뛰고 설렌다. 나에게 가을 저녁놀처럼 아름다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