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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얼굴 / 최 지 안

장대명화 2025. 9. 15. 04:31

                                         바람의 얼굴 / 최 지 안

 

남쪽에 와서 가장 많이 마주친 것은 바람이었다. 천의 얼굴, 만의 심성을 지닌 바람. 솔, 산들, 명지처럼 부드럽고 아련한 바람이 천사의 얼굴이라면 왜, 싹쓸, 도리깨바람처럼 모질게 쓸어버리는 바람은 악마의 얼굴이다. 어느 것이 진정 바람의 얼굴인가. 인간은 바람에게 많은 이름을 지어 붙였지만 정작 바람의 얼굴을 아는 이는 없다. 바람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궁극적 목적도, 종착지도 어디인지 모른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듯.

 

바람 때문이었다. 흔들리고 떠밀리던 어느 날 모든 것 두고 남쪽으로 가자고 바람이 속삭였다. 삶의 구조가 바뀌던 즈음, 바람이 몰아쳤고 나는 몇 가지 짐을 챙겨 남쪽으로 내려와 펜션을 운영하였다. 수년 전, 역마가 있다고 했던 관상쟁이의 말이 맞았다.

 

잘 한 일이었을까. 문화생활은 포기한다 해도‘이마트’라도 가려면 삼사십 분 운전 해야 하는 곳. 스콘이 먹고 싶어도 쉽게 사다 먹을 수도 없는 곳에 나를 유배시킨 것은 정말 괜찮은 일이었을까를 생각하는 날은 몸에 붉은 녹이 번지는 것 같았다. 어쩌다 서울의 바람 냄새를 맡고 오면 한 이삼일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처졌다. 마냥 부풀고 들떠서 내려왔는데 살아 보니 그 바람은 금새 꺼졌고 사람이 싫어 떠나왔건만 얼마 못 가 사람이 고파졌다.

 

그해 겨울. 바람은 짜고 맵게 엉성한 이력을 헤집었다. 남해의 겨울바람은 맹숭맹숭한 내륙과는 맛이 다르다. 이 바람과 맞닥뜨리면서 뼛속을 파고드는 냉기가 무엇인지 비로소 실감했다. 기온이 낮지 않아도 습기를 품은 고추바람은 몹시 차고 매서웠다. 무엇을 해 보겠다는 의지도 함께 얼어붙었다. 나긋나긋했던 삶도 갯바람에 구겨지고 질겨졌다.

 

바람은 계절을 따라다닌다. 어느 계절도 바람의 입김을 피해 간 적 없다. 특히 여름의 돌개바람은 모질다. 능소화의 목을 치는 것도, 추수를 앞둔 벼 이삭을 물에 처박는 것도 태풍의 배후를 진 바람이었다. 마당에 있던 야외 테이블을 집어던지고 상사화의 모가지를 똑똑 분지르는 것도 바람의 짓이다. 부술 듯 밤새 창을 흔들고 주변 시설물을 걷어찬다. 분풀이 하듯 들판의 풀들을 죄다 짓밟기도 하고 나무의 가지를 찢어놓는다. 눈에 난 몇몇은 아예 허리를 꺾어놓기도 한다.

 

물론 폭력이 바람의 전부는 아니다. 간들바람처럼 숨결 고운 봄바람은 마법을 부린다. 그러지 않고서야 일없이 나가고 싶고 꽃구경이 하고 싶어질 리 없다. 꽃바람은 유채꽃을 흔들고 연분홍 벚꽃잎을 날리며 청춘 남녀를 부른다. 포르르 날아오는 새처럼 두근거리고 여인의 속치마처럼 설레고 스무 살 뽀얀 손목처럼 야들야들한 봄바람. 그 바람에 너울너울 뜨고 싶어 벚꽃잎 살랑이는 다랭이마을로 차를 몰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봄에 남해에 올 일이다.

 

봄바람이 마법 같다면 가을바람은 소다수다. 가을 벌판에서 숨을 들이마시면 쪼그라든 폐부 깊숙이 신선한 공기가 들어찬다. 선선한 막새바람이 사이다 같이 톡 쏘며 코를 뚫어놓는다. 그 바람에 가슴도 따라 뚫린다. 산기슭 쪽에서 두 손 들며 몰아치듯 짐승처럼 물어뜯는 바람. 들판의 끝에서부터 가슴팍으로 달려드는 바람. 저 밑바닥 원망과 회한의 과거도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싹 날아갈 것 같다.

 

그 바람은 내 과거와 현재를 휘돌아 다시 나온다. 길가의 나뭇잎을 떨어뜨리고 새들을 쫓고 거꾸로 나를 뒤집어 내게 스민 문명의 자잘한 오만과 알량하고 궁핍한 변명을 흔든다. 저녁이면 밀려드는 근원 깊은 두려움과 절여지고 쪼그라든 외로움까지도 모두 탈탈 털어버린다.

 

물기 어린 내 과거도 이곳에 와서 한 줄기 바람이 되었다. 그늘에 걸어둔 무청처럼 색깔과 수분을 거두고 말라갔다. 탱탱했던 피부가 그을리고 주름지듯 그렇게 말라서 손으로 쥐면 바스러지는 누런 시래기가 되었다. 눈물도, 열정도, 무청처럼 푸릇한 젊음도 다 말라비틀어져서.

 

이제야 바람은 내게 속삭인다. 화려한 과거든 남루한 추억이든. 그저 자신과 함께 한 줄기 일어섰다가 조용히 소멸하는 것이라고. 잠깐 남쪽에서 아름다운 꿈을 꾸었을 뿐. 여기에 살았던 시간도 다 바람이었다고. 그러니 더 집착하지 말자고.

 

남해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람의 속성이다. 한 번 불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는 것. 남쪽으로 내려오던 나처럼 걷잡을 수 없다는 것. 나를 부수고 과거를 흔들고 관계를 자르고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서야 어느 아침 잠잠해지는 것. 그것이 바람이라는 것. 과거도 미래도 없이 단지 현재만 존재할 뿐. 그리하여 결국 깃털처럼 내 앞에 사뿐히 착지하는 깨달음 하나. 내 안에서 시작된 바람은 내 안이 종착지라는 것.

 

바람이 등을 떠민다. 나는 바람의 어깨에 남쪽의 시간을 얹어놓는다. 이제 개를 키우던 시간과 서쪽으로 기울던 붉은 저녁을 두고 떠난다. 머리칼에 스며든 숨결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감촉도 그저 기억으로만 남겨놓을 뿐, 잠시 왔다가 사라진 새끼 고양이의 앞발처럼 포근했지만 슬펐던 기억조차도 내려놓고 오랜 물음 하나 등에 지고 간다. 바람이 묻던 말.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를 향하는가.

 

무수히 마주쳤지만 아직 바람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