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애첩 / 김 사 랑
현관을 들어서면 늘 아이처럼 쇼핑가방 안에 무엇이 있나 궁금해 하시는 팔순의 어머니. 검은 봉지에 있던 막걸리를 꺼내놓자 웬 막걸리냐는 눈치다. 오늘은 예쁜 차상에 커피 대신막걸리를 올린다. 투박한 사발대신 칵테일 잔에 각설탕까지 챙겼으니, 오늘 술맛은 달착지근해서 오래 전에 당원을 타서 먹던 맛과 비슷하리라. 많이 마시진 못해도 분위기가 있어야 하니, 커다란 양초 두 개에 불을 붙였다. 추억처럼 사물이 하나둘씩 분위기와 어울린다.
“뭔 일이여?”
“아니 그냥, 오늘은 엄마랑 한번 마셔 보려구.”
먼저 칵테일 잔에다 막걸리를 따른다. 잘 마시지는 못해도 보고 듣던 폼은 다 잡아본다.
“울 엄마 건강을 위하여!”
잔이 부딪치자 맑은 소리에 기분까지 좋다. 모녀가 술하고는 열촌도 넘는 사이니 한껏 분위기만 잡다 말 것이 뻔하다. 두어 모금 드신 어머니 눈은 벌써 게슴츠레해지더니 한 마디 하신다.
“니 아부지, 그 양반 저승에서 내가 담근 막글리 생각 안 나는지, 왜 날 빨랑 안 델구 가 는지 모르겄다.”
소녀처럼 얼굴이 붉으래진 엄마는 아버지를 그리는 마음을 은근슬쩍 표현한다.
그 때는 여름방학이었다. 외딴 섬처럼 먼 밭에서 호락질하시는 아버지의 새참으로 어머니는 막걸리를 담아주셨다. 늘 양은주전자에 담아주셔서 걷다보면 찔끔찔끔 쏟아지기도 하고 다리가 긁히기도 했다. 그날은 평소와 다르게 피티병에 담아주셨다. 그늘 한 점 없는 땡볕 속에 쉬지 않고 걷는데 느닷없이 “펑” 소리와 동시에 막걸리는 분수처럼 솟구쳤다. 손으로 막아도 손가락 사이로 막걸리는 삐져나왔다. 그것을 막아보려고 별짓을 다해도 허사였다. 아버지의 새참이 사라진다는 안타까움에 막걸리의 양보다 더 많이 눈물 흘리며 아버지를 불렀다. 얼겅산이 울리도록 ‘아부지’를 불렀지만 아버지 대답 대신 들려온 건 메아리였다. 고개를 하나 더 넘어야 아버지가 계신 곳이다.
“아- 부지, 아- 부지, 아- 부지, 술 다 쏟아졌단 말야. 아- 부지.”
흐느끼며 애절하게 불렀다.
얼굴에서는 막걸리 냄새와 땀 냄새가 흘러내렸다. 냄새가 흘러내린다는 것을 처음 경험했다. 거기에 눈물까지 뒤범벅이 되었다. 아버지 앞에 당도했을 때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냥 주저앉고 싶었다.
아버지는 나를 번쩍 안아 계곡물로 가서 얼굴을 씻겨주고 머리칼도 함함하게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밭에서 밑동이 벌건 옥수숫대를 낫으로 베어 손에 들려주었다. 내가 옥수숫대의 달착지근한 물을 빨아먹고 있는 사이 아버지는 막걸리를 홀짝 마셔 버렸다. 아마 얼마 되지 않아 서운하셨을 게다.
아버지는 지나는 길손에도 너그러우셨다. 이따금 밤을 지새운 낚시꾼이 지나가면 나는 그 덥수룩한 수염이 무서웠다. 흡사 땅꾼 같이 보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들을 불러 앉히고 막걸리 대접을 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그런 행동이 가장 싫었다. 우선 그들이 무서웠다.
아버지의 막걸리를 나눠 마신 낚시꾼 중에는 아예 자리를 펴고 전을 벌리는 분도 있었다. 붕어 몇 마리를 꺼내놓고, 매운탕을 끓여서 막걸리에 검은 보리밥까지 해치우고, 자기의 신세타령을 늘어놓는 사람도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이야기가 당신의 등에 얹힌 삶의 무게로 느껴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공유하는 마음이었는지 진지하게 경청해주었다.
막걸리는 외딴 곳에서 혼자 호락질하는 아버지에겐 외로움을 잊게 하는 절친한 친구였는지도 모른다. 잠시나마 고단한 삶에서 놓여나게 해 주는 친구. 막걸리가 없었다면 어쩜 아버지는 한층 더 외로웠을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삶은 정말 재미없고 한스러운 삶이었다. 모든 옥토를 댐 물에 수장하고, 비탈진 야산을 개간하여 한 포기의 곡식이라도 더 심어야 했으니 얼마나 괴로운 삶이었을까. 다랑이 논에 모가 배배 말라가면 저수지 가에서 예전에 경작하던 논 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계셨다. 그래도 잠시 등을 펼 수 있게 도와준 벗이 농주였기에 그리도 곁에 두고 사셨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환한 웃음을 보이는 날은 어느 농부나 매일반으로 추수한 가을날이었다. 타작한 벼가 토광 안에 가득하여 표시해 놓은 눈금과 숫자가 안 보이면 무척 흐뭇해하셨다. 이런 날은 콧노래를 동반한 아버지의 서성이는 발걸음이 외양간의 소 앞에도 있었고, 토광 앞에서도 발견되었다.
옛날 선비들은 벼슬에도 품계가 있듯이 술맛도 품세를 정해놓고 드셨다고 하는데. 그래도 아버지는 언제나 고운 어머니가 곁에 있었고, 자연과 노래하며 노상 막걸리를 즐기셨으니 품세가 높지 않았을까. 팔십에 운명을 달리 하실 때까지도 새치 하나 없이 검은 머리를 간직하고 계셨던 것은 아마도 막걸리에 든 유산균 덕에다 자연과 더불어 사셨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막걸리는 아버지의 애첩이었다. 병세가 깊어서 간병을 받으면서도 애첩처럼 수시로 찾으셨다. 빨대를 꽂아서 입에 넣어드리면 막걸리를 몇 모금씩 달게 드셨다.
지금도 술과는 멀리 있지만, 막걸리를 보면 언제나 나는 아버지를 떠올린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다. 어머니와 함께 한 막걸리지만, 아버지 생각이 훨씬 더 난다.
오랜만에 어머니와 나는 아버지가 꺾어주던 벌건 옥수숫대처럼, 당원을 타서 부뚜막에서 먹던 술지게미처럼 맛있는 시간을 보냈다. 물론 아버지도 함께 하셨다.
다가오는 일요일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얼겅산에 올라 하늘이 놀래도록 아버지를 불러봐야겠다. 물론 아버지의 애첩도 구슬려내 데리고 가야겠다.
“아- 부지, 아- 부지, 오늘은 아버지 애첩 막걸리를 온전히 모시고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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