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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빛 언어의 신호 / 이 경 은

장대명화 2025. 9. 15. 04:35

                                          불빛 언어의 신호 / 이 경 은

 

불빛 언어가 부른다.

 

세상에서 수많은 언어들을 들어봤지만, 꽤나 낯설고 매혹적이다. 이 말은 반딧불의 세계에서만 쓰이는 언어인데, 반딧불이 자기들만의 고유한 언어를 가진 생물체라는 사실에 갑자기 그 존재가 달리 느껴진다. 심지어 고귀하기까지 하다. 불빛의 언어, 불빛 속의 언어, 불빛이 나오는 언어, 불빛 같은 언어….

 

암컷 반딧불은 꽁무니의 불을 깜박여서 수컷에게 짝짓기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낸다. 그런데 반딧불은 종마다 ‘불빛 언어’가 달라서, 암호를 잘 읽어내야만 한다. 자기 종의 신호를 이미 아는 수컷은 자연스럽게 암컷에게 가지만, 만약 암컷의 마음에 무언가 변화가 생겨 그 ‘암호’를 바꾸게 되면 일은 난감해진다. 다 받아주는 척하다가, 종내는 입으로 수컷을 잡아먹는 그런 일도 생긴다.

 

델리아 오언스는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서 이 장면을 실감 나게 묘사했다.

 

‘점, 점, 줄’

 

지그재그 댄스로 이렇게 신호를 보내는 암컷이 있는가 하면,

 

‘점, 줄, 줄, 점’

 

이렇게 춤을 추면서 신호를 보내는 반딧불도 있다고 말한다.

 

작가는 자연에서 이런 희생은 생명을 힘차게 지속하는 길이라며, 생물학에서 옳고 그름은 ‘같은 색채를 다른 불빛에 비추어 보는 일’이라는 그녀의 생각을 나타낸다. 나는 선뜻 그 의미가 다가오질 않아 여러 번 소리를 내어 읽어보았다.

 

같은 색채라는 근본은 하나인데, 각기 다른 이들이 자기들의 불빛으로 비추어보면서 이게 더 맞느니, 저건 틀리다느니 한다는 건가. 아니 그것은 사람 사는 세상의 이야기와 너무 비슷하다. 불빛에 비추이면 그저 달리 보일 뿐 애초부터 옳고 그름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게 더 가깝지 않을까. 사실 제 구절만으로는 그보다 아름다운 의미가 느껴진다. 같은 색채지만 다른 불빛에 비추면 제각각의 다양한 수많은 색채의 빛들이 퍼져 나와 세상이 무지개처럼 아름다워진다는, 원작에 대한 나만의 틀린 해석을 하고 싶어진다.

 

그저, 말이 고와서, 아까운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불빛 언어를 따라가면 길을 찾을까.

 

어려서 양산 외갓집에서 본 이후로 도시에서 쭉 살아온 나는 반딧불의 아름다움을 사실 잘 모른다. 그런 걸 모르고 산다는 것을 불행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분명 아쉬운 삶이라고 생각한다. 유년의 삶이 삭제된 느낌마저 든다. 자연에서 보낸 시간을 아무리 긁어모아도 숟가락 하나에도 다 얹히지 않으니 말이다.

 

나의 유년은 자연과는 다른 방을 썼다. 도시에서도 아름다운 유년이 있으련만, 그저 거친 기억들만이 저 깊고 오래된 방에 남겨져 있다. 반딧불의 불빛 언어는 내게는 잃어버린 유년의 상징이다. 시골 아이들이 서울로 오면 주눅이 든다지만, 나는 시골 아이들에게 열등감을 느꼈다. 그들이 자기네 동네 산으로 들로 신나고 자유롭게 쏘다니며 노는 얘기를 듣거나, 무슨 명절이나 생일 때마다 시골에 내려간다는 평범한 이야기가 가슴에 깊이 박혔다. 무엇보다도 그들에게는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갈 데가 있다. 표를 못 구해서 동동거리는 마음이 있고, 긴 시간을 마다않고 운전해서 가는 행복이 기다린다. 더러 귀찮기는 해도 가족을 보는 순간 웃음이 번진다.

 

생명을 잇기 위해 불빛 언어가 움직인다지만, 반딧불의 존재 의미는 환상의 미이다. 밤하늘이라는 공간을 최고조의 미학적인 시각으로 구성을 하고 있으며, 은하수의 짝이라도 된 듯이 불빛 언어들을 내뿜어 책 한 권의 이야기들을 펼쳐 놓는다. 반딧불이 반짝이는 자리에 있던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 빛이 몸에 새겨진다. 그리고 먼 훗날 돌아와 아름다웠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자꾸만 사라지려는 것들을 밤새 쳐다볼지 모른다. 어쩌면 그때 맺어진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들려줄지도.

 

그 모든 게 불빛 언어의 마술인지 모르고, 숲속으로 난 길을 따라가겠지.

 

아무도, 모른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