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수필

다시 / 이 춘 희

장대명화 2025. 8. 24. 00:24

                                            다시 / 이 춘 희

 

나뭇가지마다 하얀 밥이 소복이 얹혔다. 양옆으로 늘어선 이팝나무를 사열하며 길을 걷는다. 바람 따라 전해오는 이팝나무 꽃향기가 꽃 색처럼 은은하다. 감각이 깨어나자 겨우내 우중충했던 가슴에 설렘이 몽글몽글 일어난다. 또 한 번의 봄이 주는 선물이다.

 

몇 달 전만 해도 삭막한 겨울이었다. 하늘 향해 벌린 가지에 삭풍이 스쳤다. 꽃샘바람의 심술도 몇 차례 다녀갔다. 언제부턴가 훈훈한 바람이 솔솔 가지 끝을 간질이더니, 못내 꽃망울을 터트렸다. 톡톡 타닥타닥 튀밥 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것 같았다.

 

꽃눈 속에서 기다리던 목련꽃, 벚꽃, 개나리꽃이 줄지어 피었다. 갈색으로 누운 검불을 비집고 풀들이 초록을 밀어 올렸다. 제비가 처마 밑에 집을 짓고, 개구리가 알을 낳았다. 얼었던 강물이 녹아 바다로 흐르고, 잠자던 샛바람이 일어났다. 바야흐로 ‘다시’의 세상이다.

 

중학교 운동회 때, 반 대표 계주 선수가 되어 출발선에 섰다. “땅” 총성이 울렸다. 나란히 서 있던 친구들이 쏟아지듯 앞으로 뛰어나갔다. 아차. 한발 늦게 출발한 내 머릿속으로 오만 생각이 드나들었다. 저 아이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우리 반이 꼴찌가 되면 친구들의 싸늘한 시선과 실망스러운 얼굴을 어떻게 대할까.

 

​“다시!”

 

선생님의 한 마디 소리에 아이들이 속력을 늦추었다. 총성이 울리기 전에 부정 출발한 친구가 있었나 보다. 행운이 내 시간 속으로 들어왔다. 다시 출발선에 서며 이번에는 늦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머릿속에 친구들의 환호를 받으며 결승선을 끊는 모습을 떠올렸다.

 

삶의 곳곳에 ‘다시’가 나를 구한 흔적이 보인다. 달려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지만, 몸을 세워 깨진 무릎을 부여잡고 달렸다. 입학시험에 떨어져 이불을 뒤집어쓰고 며칠 동안 칩거하다 일어나 후기 시험을 쳤다. 일개미처럼 모았던 돈이 주식시장에서 산화되는 것을 보고 넋을 잃었다가 돼지 저금통에 다시 동전을 넣었다. 인생은 ‘다시’라는 블록으로 이어진 길이었다.

 

‘다시’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넘어진 채 주저앉고, 시험에 떨어진 것을 원망하고 정신마저 잃고 쓰러져 있지 않을까. 실수를 인정하고 손을 잡아 일으키는 ‘재수’도 없고 ‘재기’도 없는 곳에는 희망이란 말도 사라진다. 빛이 없는 곳에 식물이 자라지 못하듯, 마음속 빛이 꺼진 사람들 틈에서 나의 성장을 포기한 채 우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외쳐도 죽음은 ‘다시’를 허락하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때, 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아버지가 세상 줄을 놓으셨다. 누운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따뜻한 손길 주기를 나는 간절히 바랐지만, 무거운 정적만이 흘렀다. 생물이 죽은 후 살아날 수 없듯이 ‘다시’는 죽음과 동시에 사라지는 단어였다.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 많이 부를 일이다.

 

​용기를 내어 ‘다시’를 부른다. 뜻이 달라 냉대하며 헤어졌던 친구에게 전화한다. 써 놓은 글을 읽고 무능력을 탓하며 덮어두었던 글을 꺼내 정성껏 어루만진다. 살기에 바빠 가슴 밑바닥에 눌러두었던 그림 그리기의 꿈도 끄집어낸다. ‘다시’로 인해 새로운 기회가 다가올 것 같다. 살면서 맞닥뜨리는 시련 앞에서 인내와 성실의 가치를 찾아보리라. 한마디 말에 우울한 마음에 덮여 있던 구름이 걷힌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한 상궁이 말한다. “장금아, 사람들이 너를 오해하는 게 있다. 네 능력은 뛰어난 것에 있는 게 아니다. 쉬지 않고 가는 데 있어. 모두가 그만두는 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시작하는 것. 너는 얼음 속에 던져져 있어도 꽃을 피우는 꽃씨야.” 그래. 얼음 속에 던져졌어도 꽃을 피우게 하는 건 ‘다시’다.

 

이팝나무 그늘에 앉아 한 젊은이가 그림을 그린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이팝나무꽃이 종이 위에서 피어나고 있다.

 

물을 흠뻑 묻혀 기다란 꽃잎에 연한 녹색을 입힌다. 가느다란 붓끝 뒤로 꽃받침이며 네 갈래로 갈라진 꽃잎, 두 개의 수술이 따라 나온다.

 

거기에 붓이 여러 차례 지나가자 나무에서 꽃 한 다발 툭 떨어져 내린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한 폭의 그림은 수많은 붓질이 완성하고 한 사람의 인생은 수많은 ‘다시’가 만드는 게 아닐까.산과 들에 눈을 동그랗게 뜬 풀과 나무, 꽃과 이파리가 ‘다시’를 외친다.

 

봄이 펼친 ‘다시’의 향연 속으로 마음이 걸어 들어간다.

 

<이춘희 작가>

대구출생

2019년 ‘문장’ 등단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당선(2022)

저서 ‘한 그루 나무, 서른 송이 꽃들’ 공저,

대구문인협회, 문장작가회, 달구벌수필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