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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피어 있는 꽃 / 김 상 미

장대명화 2025. 8. 18. 11:49

                             오래 피어 있는 꽃 / 김 상 미

 

허세 없이 단백한 계절 오월이 오면 고맙고 감사한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다. 변함없이 내 곁에 있는 인연들이 떠오른다. 봄날은 새들의 노래도 싱그럽게 들린다. 들판이나 산자락 여기저기에 피어나는 꽃들의 고운 자태는 봄이 주는 고마운 선물이다. 나무들은 연둣빛을 어디에 숨겨 두었다 꺼내 놓는 것인지 내 가슴에도 초록빛이 차오르게 한다. 몸에도 푸른 피가 도는 느낌이다.

 

올해 들어 처음 나비를 보았다. 배추흰나비나 노랑나비가 아닌 산호랑나비를 보았다. 공원 산책 길에봄 햇살이 깊어지며 피워 놓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산호랑이가 날아와 내 발끝에 앉아 긴 더듬이로 발가락을 더듬는다. 그해 처음 호랑나비를 보면 귀한 일이 생긴다는 말이 떠올랐다. 사진으로 남기려 움직이자 호랑나비가 사뿐히 날아 꽃잎에 앉았다. 카메라를 열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찰칵. "가까이에서 한 장만 찍을게 움직이지 마" 나비는 기다려 주지 않고 허공으로 날아 올라버렸다.

 

파란 하늘에는 하얀 뭉게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문득 하늘가에 그리운 아버지의 미소가 번져 울컥했다. 오월이면 봄 뜨락에 앉아 계시던 아버지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그려지곤 한다.

 

아버지는 늘그막에 중풍을 앓았다. 안면 근육이 마비되고 거동이 불편하여 혼자 움직이는 일이라곤 동네 마트에 담배를 사러 가는 일밖에 없었다. 빌라 입구에 언제나 아버지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아버지는 의자에 앉아 한낮의 공허함을 담뱃불에 붙이곤 했다. 오가는 동네 사람들과 인사하는 것이 유일한 취미생활이었다. 아버지 의자 가까이에 석류나무 한 그루가 있어서 그늘이 되어주기도 했다. 석류나무 잎이 돋아날 때 아버지 얼굴에도 생기가 돌았다. 언제 석류꽃이 피고 지는지 아버지에게 물으면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석류나무가 빌라 뜰에서 살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어느 해인가 나무 심기 행사에서 아버지가 묘목을 얻어와 심었다. 어머니의 정성이 나무의 자양분이 되었다. 한약 찌끼와 쌀뜨물을 받아먹고 나무는 뿌리를 곧게 내렸다. 몇 해가 지나 가을이 되니 크고 튼실한 석류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석류알은 황금 방에 꿀맛을 저장하고 낯선 세계로 도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 주먹만 한 주홍빛 석류를 보고 있는 아버지 눈빛이 유난히 사색적이었다. 속이 텅 비어 가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내 마음도 깜깜해졌다.

 

아버지는 평생 교직에 몸을 담으셨다. 석류알처럼 반짝이는 아이들을 가슴에 품고 키우셨다. 아이들 마음에 다양한 빛깔의 꿈을 주셨던 교사였다. 아버지는 교단에서 아이들에게 꿈을 주던 것을 잊지 못하고 있는 듯하였다. 석류나무 아래 의자에 앉아 있다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을 만나면 자주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어떤 날은 "할아버지 옛날이야기 해 주세요" 하고 조르는 모습을 보며, 컴퓨터 게임을 좋아하는 아이들 정서가 조금은 낯설기도 했다. 아버지 이야기의 소재는 주로 삼강오륜에 빗대어서 풀어나가는 창작동화였다. 동화 나라에서 사시는 아버지 곁에는 늘 현실적인 어머니가 계셔서 인생의 박자를 맞추어 나가곤 했다.

 

기억이 명사라면 추억은 동사다. 추억은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기에 더 애틋하다. 어머니와 함께한 시간이 선명한 영상으로 재생되어 떠오른다. 어머니는 박봉에 시달리는 아버지를 위해 농사도 짓고 한때는 순대국집을 운영하며 바지런한 삶을 사셨다. 살림꾼인 어머니 농사의 소출은 장에 내다 팔지 않고 우리 가족 겨울 채비 식량이 되거나 도회지에 사는 친척들에게 나눠줄 먹거리였다.

 

겨울을 이겨낼 어머니의 작전은 봄부터 시작되었다. 여름에 캐는 감자는 재를 뿌려 저장하고 가을에 추수하는 토란은 줄기와 뿌리를 다 먹을 수 있어 어머니가 좋아하던 작물이었다. 토란대는 얇게 저며서 말리고, 뿌리는 그늘에 말려 다양한 요리를 만들어 주셨다. 맑게 끓여 주시던 토란국 맛은 가을이 되면 생각이 난다.

 

해마다 고구마는 우리 가족이 먹을 만큼 수확하여 썩지 않도록 저온 창고에 보관하였다. 늙은 호박은 길게 저며서 말려 겨울 간식으로 호박떡을 만들어 주시곤 했다. 깻잎이나 콩잎은 된장이나 고추장에 넣어 장아찌로 만들어 입맛을 돋우는 반찬으로 내놓았다. 무엇보다 겨울 채비의 하이라이트는 김장이었다. 9월 쯤 배추씨를 뿌리고 싹이 돋아나면 물을 주며 자식 돌보듯 했다.

 

벌레를 손으로 잡아내며 무농약으로 길렀다. 정성으로 길러낸 배추를 수확하여 김장을 담그는 날은 잔칫집 같았다. 어머니는 마루에 비닐을 깔고 배추김치와, 총각김치, 파김치, 갓김치를 차례대로 버무려 먼저 도시에 사는 친정붙이들과 조카들에게 보낼 것을 비닐통에 담아 분류했다. 어머니 손맛이 밴 된장과 고추장도 김치와 함께 택배로 보내곤 하셨다. 나누기를 즐겨하시던 어머니는 항상 마음 부자로 사셨다.

 

나는 어머니 손맛 중 무청 김치 맛을 잊지 못한다. 한겨울 적당히 익은 김치를 꺼내 뜨거운 밥에 올려 입에 넣으면 혀끝에 감칠맛이 달라붙어 수저를 놓을 수가 없었다. 오랜 세월 연마해온 노하우가 없으면 그 맛을 재현할 수 없는 모양이다. 어머니 방법으로 김치를 담가도 내 손은 그 맛을 흉내 낼 수가 없다. 오월이 오면 부모님 묘에 찾아가 “김치 담가주러 이승에 한 번 오시지요” 하고 주문을 할 생각이다.

 

<김상미 수필가>

전북 익산 출생

현대수필(2002), 시와세계(2008) 등단

계간현대수필 편집장

수필집 '바다가 앉은 의자' '유리새를 만나다' '발자국은 기억을 만든다' '홀림', 시집 '반사거울'

박재삼문학상, 구름카페문학상, 신라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