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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돈세탁법 / 박 윤 정

장대명화 2025. 8. 24. 00:26

                                    나의 돈세탁법 / 박 윤 정

 

돈을 세탁해본 적이 있다. 처음엔 의도하지 않았으나, 나중엔 의도성을 지니고 돈을 세탁하게 되었다.

 

세탁을 마친 후 빨래를 널기 위해 뚜껑을 열어 하나하나 꺼내다 보면 맨 마지막에 섬유류가 아닌 것들이 발견될 때가 있다. 동전, 신용카드... 한때는 소형 mp3 플레이어까지도 나왔다. 깨끗해진 옷들을 만날 기대에 부푼 나에게 최고의 낭패감을 안겨주는 건 화장지 뭉치다. 물에 풀린 휴지조각들이 이 옷 저 옷은 물론이고 세탁기 통 안 여기저기에 달라붙어 있다.

 

그 하얀 부스러기들을 탁탁 털어야 하고, 하나하나 떼어내야 하고, 잘 안 떨어지면 비벼야 하고, 우여곡절 끝에 빨래를 다 넌 다음엔 그 잔해들을 치워야 하는, 이런 골칫거리 화장지를 주머니 속에 넣은 채 빨래통에 던져놓는 사람은 주로 정해져 있다. "이 녀석아, 주머니를 한번 뒤져보고 나서 빨래통에 넣어야지" "알았어요!" 그러나 그때뿐이다.

 

이번엔 지폐다. 때로는 명절에 받은 뭉칫돈이, 때로는 꼬깃꼬깃 접혀진 낱장의 천 원, 만 원짜리들이 그대로 주머니 속에서, 혹은 옷 밖으로 튀어나와 발견된다. 세탁과 헹굼과 탈수 과정을 온전히 다 겪어내며 물에 빨리고 빨려 아주 깨끗해진, 그러나 축 늘어진 지폐들. 처음엔 그냥 그대로 꺼내서 마를 때까지 두었다. 종이는 물이 조금이라도 닿으면 오그라들면서 마른다. 세탁을 마친 지폐를 바라보니, 과연 저 상태의 돈을 받는 사람의 기분은 어떨까 싶은 생각에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그래서 나온 것이 지폐 소생술이다.

 

젖은 지폐들을 몇 장이든 일단 무거운 사전 밑에 하룻밤 혹은 그 이상 깔아두면 어느 정도 펴진다. 그 상태에서 만족하고 그대로 두면 아무래도 물에 젖었던 티가 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손으로 몇 번 매만진 후 사전이나 두꺼운 책을 펴서 사이사이에 끼워 넣고 그 위에 무게가 나가는 책들을 몇 권 더 얹어놓는다. 미약한 습기가 감지되는 페이지를 넘겨 새로운 페이지에 또다시 끼워 넣기를 몇 번 더 반복하다가 이젠 되었겠다 싶었을 때 꺼내어 보면, 물에 젖었던 과거는 찾아볼 수 없고 이건 그냥 신권이다. 내가 해놓고도 연신 감탄을 주체 못 한다.

 

이젠 자신 있다. 얼마든지 넣어라. 다 펴주마. 그 후론 오히려 기꺼운 마음으로 물에 젖은 지폐를 되살리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엔 꼬깃꼬깃하여, 나 같으면 받고 싶지도 않을 것 같은 지폐를 일부러 빨랫감들과 함께 세탁기 안에 넣었던 적도 있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 싶으면서도, 원래 모습대로 펴주고 싶었던 마음에 감행해 버렸다.

 

주머니에 지폐를 구겨 넣어 이런 기술을 개발케 한 장본인인 둘째는 나더러 유난을 떤단다. 돈이 돈이지, 뭐 그렇게까지 애를 쓰느냐고. 맞는 말이다. 돈이란, 엄밀히 말해서 지폐란, 가치를 맞교환하는 수단일 뿐이다. 조개껍데기, 돌, 쇠붙이가 돈이었던 시대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지불만 제대로 이루어지면 그만이지 구겨져 있든 펴져 있든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아이야, 본질에 충실한 너의 말이 참으로 맞구나.

 

그러나 나에겐 이 교환되는 순간의 기분이 중요하다. 물건이나 서비스에 대한 값을 치를 때는 물론이고, 축의금이나 부의금처럼 마음을 담아 지폐를 내밀어야 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신권까지는 아니더라도 깨끗한 지폐를 받아들면 정성스런 마음이 느껴져 대접받는다는 기분까지도 든다. 정성껏 헌금하려고 지폐를 다리미로 다리기까지 한다는 분의 이야기를 들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타인에게 건네는 지폐의 상태가 최대한 온전할 수 있도록 신경을 쓰게 되었다.

 

찢어진 부분에는 투명테이프를 붙이고 오물이 묻은 것은 떼어내는 등, 적어도 내 손에 들어온 지폐들에게 교환 시 최대한 예쁜 모습이 되도록 애써왔다. 지폐를 건넬 때의 마음가짐에 관한 한 나보다 더한 사람도 보았다. 동네에서 오래 알고 지냈던 깔끔한 성격의 지인인데, 과외 선생님에게 수업료를 드릴 때 지폐를 가지런하게 하는 건 기본이고 지폐 속 얼굴이 모두 한 방향으로 향하게끔 해서 건넨다. 정성의 극치라 여겨졌다.

 

그런데 이젠 지폐 상태에 신경 쓸 일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은행이나 마트에 가지 않고 집에 앉아 컴퓨터나 휴대폰으로 거래하며, 버스나 택시 요금을 낼 때를 비롯하여 편의점에서 몇천 원짜리 군것질을 할 때도 카드로 결제하는 세상이다. 경조사에 마음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여기 숫자가 저기 숫자로 옮겨 가면 돈 거래가 끝나는 시대가 가속화되고 있다.

 

실제로 요즘 사람들은 현금을 확실히 덜 들고 다닌다. 그러나 보니 우리 집 세탁기 속에서도 간혹 동전이 나올 뿐 지폐는 몇 년 새 발견되고 있지 않다. 아이의 습관이 고쳐졌다기보다는, 뭔가 세상이 화폐 본연의 가치만이 살아남는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어서인 듯하다. 역시, 정성이니 예의니 하는 군살 안 붙은 담백한 아이의 생각이 맞았던 것 같다.

 

조금 아쉽지만, 기껏 개발한 지폐 소생술을 발휘할 기회는 이제 영 없을 수도 있겠다. 어쩌면 애당초 허튼짓을 했던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박윤정 수필가>

'월간 한국산문' 수필 등단(2013)

한국산문문학상 수상(2022)

현재 '한국산문' 편집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