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산 겨울편지 /정 익 준(2025 경북신문 이야기보따리 공모전 대상작)
K형.
여기는 경북 봉화에 있는 청량산(淸凉山)입니다. 지금은 한겨울인지라 짧은 산행코스인 입석을 출발, 청량사를 거쳐 연화봉, 지란봉, 장인봉, 금강대를 지나는 길을 선택해 올라왔습니다. 조선시대 대학자, 퇴계 이황 선생을 비롯해 나라를 이끌고 갈 동량인, 선비들을 많이 길러낸 곳, 도산서원을 지나왔습니다. 산이 깨끗하고 맑아 차 한잔을 마시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선경의 산이니 가 보라고 추천한 산. 청량산입니다. 찬 겨울바람이 산행을 힘들게 하지만 병풍처럼 서 있는 눈 덮인 12봉우리들을 오르다 보니 이곳이 산인지 바다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어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겨울 산행이 좋고 다른 계절의 산행에서는 못 느끼는 맛과 즐거움을 안 것은 최근입니다. 산길을 익히는데 여념이 없었던 내가 이런 기분을 가지니 조그만 나의 성숙이 아닐까요?
언젠가 K형은 겨울 산행을 같이 가면서 “눈이 무릎까지 쌓이는 산길을 걸어가면 어느새 자연 속에 동화되어 한 마리 새가 되고 단단히 맨 등산화 말고는 의지할 데 없는 눈길에서는 고독의 심연을 찾는 철학자가 될 수 있어 겨울 산행이 좋다.”고 했습니다. 오늘처럼 등 짝에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리도록 열심히 산에 오르면 산은 하얀 속살을 드러내 보이면서 이방인을 따뜻이 맞이하고, 흙 백색의 절묘한 조화는 흰 도화지에 먹물을 죽죽 뿌려 놓은 듯한 단순함이 좋습니다.
K형.
지금 청량산 정상에 아래에 펼쳐진 산하를 내려다보니 소창청기(小窓淸記) '구름은 희고 산은 푸르며 시냇물은 흐르고 바위는 서 있다. 꽃은 새소리에 피어나고 골짜기는 나무꾼의 노래에 메아리친다. 온갖 자연은 이렇듯 스스로 고요한데 사람의 마음만 공연히 소란스럽구나'의 글귀가 생각납니다. 자연은 저처럼 저마다 있을 자리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기에 고요하고 평화로운데 유독 사람은 분수 밖의 욕심을 부리므로 마음 편할 날이 없고, 세상도 소란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행복해지는 비결이 있다면 저런 자연을 닮아 이웃에게 들꽃 같은 따뜻한 미소를 보내는 일이겠지요.
청량산 정상을 내려와 능선을 걸으니 포르르 포르르 눈가루가 흩날리고 뽀드득 뽀드득 눈길이 노래합니다. 이 모습은 마치 몇 명의 관객 앞에서 늙은 배우가 최선을 다하는 마지막 은퇴 공연 같습니다. 가슴 속 깊은 떨림, 울적하면서도 결코 서럽지 않은 그 무엇, 누구에게도 말로 표현하고 싶지 않은 잡힐 듯 말 듯 한 자연의 끈인 설국(雪國)의 유혹 속으로 나는 한없이 빠져들고 있답니다.
유독 눈 쌓인 청량산의 암봉(岩峰)을 좋아하는 K형.
암봉과 능선이 교차 되고 또 만나는 이 산의 겨울의 참 모습은 눈을 가득 안고 우뚝 서 있는 암봉 들인 것 같습니다. 암봉에 가까이 가 보니, 지금까지 봉우리들을 치장했던 활렵수들은 깊은 겨울잠에 빠져있고, 암봉의 능선과 벼랑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소나무들이 잿빛 산과 대조를 이루고 있어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어느 날 만약 이 겨울 산길을 늦게 걸어 내려오는 날에는 매서운 겨울바람의 위협에 구름 뒤에 숨어 있던 별들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별자리와 별자리 사이에 그리도 많은 별들이 있음도 알게 되겠지요.
K형.
지금은 비록 이 청량산이 육중한 겨울 암산(岩山)으로 있지만, 봄이 되면 온갖 푸른 옷으로 갈아입은 숫처녀가 되고 여름이면 운무(雲霧)로, 가을이면 빠알간 철쭉으로, 다시 성장(盛裝)을 벗어 버리고 선계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겠지요. 우리 인생도 한 번의 생노병사의 길이 아닌, 이 산처럼 몇 번이고 꽃을 피우다 낙엽이 되는 그런 삶을 누릴 수는 없을까요?
살아있는 인간의 몸속에서 이런 희망을 확인해 보는 일이야말로 참으로 희망적이지 않습니까? 아마도 이런 희망은 생명현상 그 자체여서 사유(思惟)나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을 해야 그런 희망을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길과 사람은 만나고 사람은 그 길을 찬미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K형.
지금 나는 청량산의 겨울 세계의 시간과 풍경, 바람과 소리, 침묵과 눈밭을 보면서 길게 늘어진 눈길을 가며 행복에 젖어 있습니다. 눈길은 뻗어있고 그 눈 산길을 따라 걷고 있지만 이 세계의 의미는 걸어가고 있는 내 몸에 쌓여 고착 되지 않고 몸을 통과해 흘러나감으로써 내 앞에는 새롭고 낯선 세계와 우주가 널리 펼쳐지곤 합니다. 그리하여 살아서 걸어가는 눈 산길에서 이 낯섦은 친숙함으로 바뀌지만, 나는 이 친숙을 오늘만큼은 거부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이 눈길이 소통의 통로가 되고 나의 산행은 행함이 되어 내 몸이 이 산길의 통로를 따라 자연스럽게 나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달리 오늘 이 청량산의 눈 산길은 나에게 큰 안식이 되고 희망이며 행복입니다. 내가 가고 있는 이 하산 길은 집으로 가기 위한 것이지만, 만약 집으로 가는 길과 밖으로 가는 길이 다르지 않다면 나는 과연 눈 산길을 따라서 타인에게로 갈 수 있을까요?
K형.
해가 짧아 서둘러 하산을 하렵니다. 바쁜 걸음으로 한참 내려오니 갈참나무가 얼기설기 산을 얽은 길이 보이고, 그 사이사이에 키 작은 산죽들이 푸른 빛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잎새 위에 함박눈을 잔뜩 쓰고, 눈길이 끝난 곳의 땅속에서는 벌써 산나물들이 봄맞이 준비에 열심히 인듯합니다.
참으로 이곳 청량산은, 철마다 다투어 피어날 들꽃과 우거진 나무, 맑은 계곡 등은 도심의 숲이나 산에서는 맛볼 수 없는 천연의 모습입니다. 하산 후에는 안동소주 힌 잔으로 목을 축이고 안동 쪽으로 가다 소박하게 생긴 온천에서 몸을 녹일까 합니다.
K형. 이 겨울이 가기 전에 우리 같이 얼어붙은 산길로 청량산에, 암봉에 쌓여 햇살을 즐기고 있을 청량사(淸凉寺)와 그리고 바람이 도망갔다 머무른다는 어풍대(御風臺)도 찾아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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