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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계시의 목소리 / 이정신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11. 2. 17.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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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계시의 목소리 / 이정신

 

 소리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감동적이면서 계시적 힘을 지닌다.

  조용히 속삭이는 사랑의 고백, 여인의 처연한 울부짖음, 한여름 밤의 천둥소리, 유년시절 가슴 졸이며 듣던 곡마단 나팔소리, 섹소폰의 흐느끼는 소리, 군중의 함성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뛰기도 하고 슬퍼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청각을 통해 저장된 소리는 오랜 세월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다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다시 선명하게 들려오기도 한다. 어떻게 그처럼 선명하게 오랜 세월 동안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을까.

  수십 년이 흘러간 지금도 유년 시절 명절이 다가오는 날 밤, 어머니가 내 색동저고리를 만드시려고 돌리던 달달거리던 재봉틀 소리, 그 긴긴 겨울밤, 바람에 삐걱대던 덧문소리가 조용히 리드미컬하게 들려온다. 외출하셨던 아버지가 기쁜 소식을 갖고 귀가하시던 날, 아버지의 힘찬 발자국 소리도 들려온다.

  초등학교를 입학한 후, 한 해가 지난 그 옛날.

  새 학기가 시작된 화창한 봄날, 수업이 끝나 선생님이 교실 문을 열고 나간 후, “정신차려, 정신차려” 하는 소리가 복도 창문 쪽에서 들렸고 난 급히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허지만 창문 근처엔 아무도 없었다.

  “정시차려”, 어린 나이지만 그 말은 내 이름을 두고 누군가 나를 놀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았다. 며칠 후, 똑 같은 일이 벌어졌다. 교실 문 쪽으로 달려가면 어느새 그 남자아이는 노루새끼처럼 사라지고 난 후였다. 두어 달 후 아카시아 꽃이 만발한 어느 날, 수업이 끝나 청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 아카시아 나무 밑을 지나는데 나무 위에서 “정신차려”, 힘차고 심술궂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무 위를 올려다보고서야 그 아이가 우리동네 사는 나보다 한 학년 위인 3학년 남자아이라는 것을 알았다. 원숭이처럼 나무에 매달려 있던 그 아이는 내 눈과 마주치자 뛰어내렸고, 노루새끼보다 더 빠르게 내 앞에서 내달렸다.

  쫓아가서 ‘왜 나를 놀리느냐’ 따지고 싶었으나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계절이 바뀌었고 그 해 가을 어느 일요일 오후, 마당에서 엄마와 함께 있는데 대문 쪽에서 “정신차려” 하는 그 아이 목소리가 들렸다.

  뛰어나가 보니 그 아이는 자기 집 쪽으로 뛰어가다가 발로 돌멩이를 차면서 나를 향해 “우리집 오늘 이사 간다” 했다.

  순간 이유를 알 수 없는 섭섭함이 밀려왔다.

  나도 그 아이 집을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내 앞에서 달려가던 아이는 이미 이삿짐을 실은 조그만 트럭 위 엄마와 함께 올라타 있었다. 조금 후 이삿짐 트럭은 먼지를 일으키며 떠났다.

  표현할 수 없는 서운함이 밀려오는 순간, “정신차려” 하는 그 아이의 맑고 힘찬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고 그 아이와 그의 엄마를 태운 트럭은 신작로 길에 뽀얀 먼지를 일으키면서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가을 하늘에 흰 구름이 흘러가는 것과 신작로에 먼지가 흩어져 사라져 가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서 있었다.

  긴 세월이 흘렀다. 그 아이의 얼굴도 이름조차 기억이 없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신비하게도 맑고 힘찬 그 아이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져가던 이삿짐 트럭, 그 이삿짐 위에서 작은 몸이 흔들리면서 “정신차려” 하며 외치던 맑고 힘찬, 그러면서도 약간 섭섭한 듯한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리면서 마치 오래된 흑백영화 한 장면처럼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어찌 보면 이미 아주 먼 옛날, 하나님이 그 아이 목소리를 빌려 나에게 계시를 주신 것일까.

  어떤 경우 소리는 감동적이면서도 계시적 힘을 갖는다. 그 아이의 맑고 힘찬 목소리가 지금 나의 남은 삶을 ‘정신차려’ 살아가라는 메시지로 새겨 본다.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지금도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지금 다시 기억 속에서 오래된 흑백영화 한 장면이 다시 돌아간다. 이삿짐 트럭이 보얀 먼지를 일으키면서 떠난다. “정신차려”, 조그만 몸을 흔들면서 그 아이가 소리친다. 그 아이가 떠난 신작로 위로 뽀얀 먼지가 흩어져 사라져가고 맑은 가을 하늘에 흰구름이 흘러간다.

 

 <창작비평>

 

 독자들은 이 작품을 읽고 무엇을 느꼈는가? '정신차려'라는 소리를 들었는가? 그랬다면 그것은 작품 감상을 잘못한 것일 게다. 문학작품 속에서는 소리조차도 형상으로 볼 수 있어야 된다. 그것이 문학이다. 문학은 음악이 아니다. 문학은 상상력의 이미지 예술이다.

 따라서 그림도 상상적 이미지화하여 형상화해야 하는 것이 문학이다. 그림의 이미지와 문학의 이미지는 다른 종류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림의 이미지는 물질적 대상으로서의 이미지다. 그러나 문학의 이미지는 비물질적 상상력의 이미지인 것이다.

  문학과 미술, 문학과 음악의 예술적 감각의 유사성 때문에 두 예술의 존재양상과 작법을 혼동하는 일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일이다.

음악은 청각에 의한 소리를 통해서 형상을 상상하게 하는 예술양식이고, 미술은 시각에 의한 색깔을 통해서 형상을 인식하게 하는 예술양식이다. 그러나 문학은 문장을 통해서 상상적 이미지를 독자의 머리 속에 살아나게 하는 예술양식인 것이다.

  이 작품은 풋사랑을 형상화하고 있다.

풋사랑이라는 단어는 일정한 형상이 없다. 그러나 우리 삶 속에는 누구에게나 풋사랑이 있을 수 있다.

 나의 삶 속에 있는 풋사랑의 모양을 어떻게 형상화할 수 있을까? 이것이 작가로서의 우리들의 창작방법의 숙제인 것이다.

  그 기본 방법은 오래 전부터 작법에 나와 있다. 즉 형상이 없는 추상적 관념이나 정서도 사물화하여 형상화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풋사랑이라는 것을 무슨 사물로 사물화하여 형상화 할 것인가?

 이 작품에서는 '소년의 이야기'를 통해서 형상화하고 있다.

 소년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정신차려'라고 냅다 한 마디 소리를 지르고는 도망가는 것 뿐이다. 그런데 그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같은 동작이 반복되면 율동도 나오게 되고 운율까지도 나오게 된다.

 '정신차려'의 '정신'은 작중 화자의 이름을 빗대어서, 즉 비유적으로 부르는 외침이다.

 마음에 둔 소녀를 향해서, 그 소녀의 이름 직접 대놓고 부르지는 못하고, 그 소녀가 안 보이는 데서, 소리만 겨우 들린만한 거리에서 '정신차려'라고 냅다 소리만 지르고 도망가고 마는 소년의 행위. 그것이 바로 풋사랑의 모양(형상)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문학창작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문학창작법이다.

  이 작품은, 다른 모든 창작문예수필 작품들의 제재가 그러하듯 이 작품의 제재도 사실의 소재 그대로다. 그것이 그렇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작품 속의 화자 이름과 작가의 이름이 동일한 '정신'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의 소재를 직접 작품의 제재로 삼고 있는데 어떻게 그것이 창작문학이 될 수 있느냐? 이 같은 질문을 아예 하지조차 안 했고, 그 같은 문학 이론적 문제를 놓고 고민조차 한 일이 없고, 아무도 그 같은 질문을 한 일조차 없는 것이 지난 1세기의 무식하기 짝이 없는 대한민국의 수필문학의 역사였다. 저들이 가르친 것이라고는   수필이란 '붓 가는 대로' 쓰면 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수필은 수필이면 된다'는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 수필가들은 모두 저들 무식한 선생들의 피해자인 것이다.

  사실의 소재를 문학작품화, 즉 창작문학화 할 수 있는 방법이 구성작업이다. 사실의 이야기가 구성작업을 거쳐 나왔을 때는 새로운 창작의 세계가 된다는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론에서부터 시작된 문학작품 구성론의 중심이론이다.

  이 작품은 시간적 순서를 깨트리고 극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는 구성법의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풋사랑의 실체인 소년의 모습을 점증적으로 들어내는 기법에 의해서 "오래된 흑백영화 한 장면"처럼 독자들의 상상력 속에 되살아나게 하는 기법의 작품이다.(문학평론가 이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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