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있는 시간 / 류 시 화
얼마전 존경하는 동화작가 정채봉 선생님을 만났더니 이런 일화를 들려 주셨다. 그분이 한여름에 법정 스님을 찾아뵌 적이 있었다고 한다. 불일암으로 난 오솔길을 오르는데 날은 덥고 주위에 매미소리가 요란했다. 그래서 이런 날은 나무 그늘 아래서 낮잠이나 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불일암에 도착하니 스님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혹시 낮잠 주무시는 게 아닌가 하고 오두막 가까이 가서 스님을 부르자, 먼 뒤꼍에서 걸어나오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님 이 무더운 날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하고 묻자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졸음에 빠지지 않으려고 칼로 대나무를 깍고 있었습니다.'
졸지 않기 위해 그 일을 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칼도 날카롭고 대나무도 날카로우니 깜빡 졸았다간 위험하다. 한여름에 그것도 혼자 지내는 거처이니 낮잠을 즐길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졸지 않고 할짝 깨어 있기 위해 칼로 뾰족한 대나무를 깍고 있었다니.
나는 그동안 인도와 미국 등지를 다니며 여러 명상법을 배웠다. 이 땅에도 오늘날 많은 명상법들이 유입되고 있음을 본다. 어떤이는 남방불교의 위파사나를 들고 와 그것이야말로 깨달음의 지름길이라 역설한다.
그러나 우리가 마냥 졸음에 빠져 삶을 무가치하게 보내는 것이 방편이 부족해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매순간 자신을 점검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세상과 타협하는 일보다 더 경계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과 타협하는 일이라고 나는 들었다.
스님의 그 대나무 깍는 일화는 두고두고 내게 경책이 되었다. 대나무만 보면 그 일화가생각났다. 스님은 홀로 사는 즐거움을 말씀하시지만, 그것이 얼마만큼이나 스스로 자신의 매서운 스승노릇을 해야하는 일인가를 이 일화는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저 중국의 선승 양산은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부억에서 계속 일을 했다고 하지 않은가. 그 이유를 묻는 스승에게 양산은 대답하고 있다.
'저는 소가 채소밭으로 달려가지 않도록 고삐를 함께 잡아 당기고 있는 중입니다.'
진정한 자유가 내적 절제에 있음을 말해주는 일화다. 법정 스님의 대나무 깍는 일화도 그것과 마찬가지 속뜻으로 내귀에 들린다.
'나는 줄곧 혼자 살고 있다. 그러니 내가 나를 감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수행이 되겠는가. 홀로 살면서도 나는 아침 저녁 예불을 빼놓지 않는다. 하루를 거르면 한 달을 거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삶 자체가 흐트러져 버린다.'
명상과 수행의 긍극적인 목표가 자유의 획득에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진정한 내적 자유를 품기 위해서는 거듭된 자기 점검이 필요함을, '도끼로 얼음을 깨고 물을 길어와야 하는' 스님의 홀로 사는 삶이 일깨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