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중 물 / 정 여 송
여기 있었네그려. 이런 산골로 들어오니 만날 수 있구먼. 얼마 만인가. 근 사십년 만이 아닌가 싶네. 그러고 보니 우린 죽마고우일세.
내가 초등학교라는 데를 막 들어갔을 때 말이야, 그 시절에 자네는 신식이란 바람을 몰고 왔어. 어린 눈으로 처음 봤을 때 괴물이라고 생각했지. 사람 형상을 했으면서도 머리가 없고, 반기듯 양팔을 벌렸지만 짝짝이 팔을 가졌고, 한 다리로 서있는 것이 볼썽사나웠다네. 야트막한 판자 지붕 밑에 혼자 있는 모습은 왜그리 측은해 보이던지. 선생님이 자네를 가리키며 '펌푸우물' 하던 생각이 생생하구먼.
차츰, 어느 동네에서도 만날 수 있게 되었지. 자네는 젊은 아낙이었던 우리 어머니들의 물긷는 힘을 덜어주었어. 퍽 좋아들 하셨다네. 마음을 들어내지 않으면서도 깊은 속내를 흥건하게 토해냈잖아. 알 수 없었던 것은 열심히 일하다가도 쉼이 길어지면 한없이 나태해졌어. 피식피식 바람새는 소리도 냈지. 그러다가 한 바가지 물로 목을 적시면 언제 그랬냐는 듯 부지런쟁이가 되곤 했다네.
그러네, 자네에겐 몸속 깊이 간직한 많은 물만큼이나 소중히 여기는 작은 물이 있었다네. 한 두 바가지의 그 물 말일세.
깊은 물을 마중하러 나가는 물
물씨
마중물
"마 ․ 중 ․ 물, 마중물, 마중물."
어감이 좋아 자꾸 불러보게 되는구먼. 마중나가는 그리운 추억 때문인가 보네. 우리 집에는 마당 한가운데 너른 화단이 있었는데 꽃나무가 아주 많았다네. 그 숱한 꽃 중에서도 수수꽃다리(라일락)와 불두화와 능소화는 지금도 가슴속에 피어 바람만 불어도 일렁거리지. 향나무 가장자리에 빙 둘러 피던 노란 달맞이 꽃은 또 어떻고.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를 무렵이면 들려주던 신기한 소리를 자네도 들어봤을 거야. 톡, 톡톡, 톡톡, 톡…, 여기저기서 꽃망울이 달마중하느라 벙그러지던 그 소리를 말이야.
내겐 언니가 넷이 있지. 언니들을 참 좋아했네. 셋째와 넷째 언니가 외지에 나가 공부했는데 주말이면 집에 왔어. 언니들을 마중가서 손잡고 걸어오던, 양 옆으로 키 큰 코스모스가 만발했던 길. 마중이란 말만 들어도 그 길은 곰살스럽게 눈물샘 위로 떠오른다네. 내가 공직에 있을 떄 말인데, 좀 늦은 퇴근을 하는 날이 있었지. 어머니는 손에 힘을 주면서 무언의 사랑을 흘려 보냈다네. 그 때마다 전광석화가 지나가는 듯한 전율을 느끼곤 했어. 어떠한 불덩이가 그보다 뜨거울까. 그리워서 얼굴 내미는 추억들이 하나도 아니고, 열도 아니라네.
고요한 대낮. 실로 오랫만에 한적한 산골에서 자네를 만나니 반갑네그려. 손 한번 잡아볼거나. 목이 마른가보구먼. 함지박에 담겨 있던 물이라네. 한 모금 마셔보게나.
보이지 않지만 자네 몸속으로 흘러드는 마중물이 '몸짓'이 보이는 듯하네. 자네의 한 팔을 잡고 오르락 내리락 힘질을 해보네. 콸콸콸콸…. 호탕하고 질퍽한 웃음소리를 쏱아내는 것은 지금도 여전하네그려.
겉은 차갑고 흉해도 속은 따스하고 늡늡하던 자네 아닌가. 갈증 난 목을 추겨주는 한 모금의 물을 감지덕지하며 몇 십 배, 몇 백 배로 불려주는 마음 . 본받아야 할 심성이네. 이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는지 몰라. 지금은 아는 게 많은 것보다도 가진 것이 풍족하여 흥청거리며 쓰는 '수도족水道族'이어야만 알아주는 세상이라네. 자네 같은 '펌프족'은 여운 가득한 '古'자가 붙었으니 이제는 동화나라로 이민이나 가서 터를 잡아야 할 걸세. 넉넉하지만 함부로 퍼내지 아니하는 자네의 뜻을 알기나 하겠어? 마중물로 먼저 입맛을 당기려는 자네의 고집이 난 좋네그려. 운치야 '우물족'이 최고이긴 하지. 소박하기도 하고, 그러나 두레박을 올리고 내리는 수고만큼만 주는 깍듯함이 있잖아. 흘러넘치게 퍼주거나 덤으로 얹어주는 것은 예禮가 아니라는 고지식을 가지고 있지.
해가 우리를 보며 따스히 웃고 있네 그려. 자네에게서도 온기가 흐르는구먼.
마중물에 대해 생각을 해보네. 그저 한 바가지의 물인데, 그것이 무엇이기에 몸속으로 들어가 고인 물을 흔들고 깨워서 세상 밖으로 솟구치게 하는가. 필경 재물로 쓰는 희생양 같네그려. 자비지심이라고 해야 할까. 운동하기 전에 몸을 푸는 기본체조라고 해 둘까. 아니면 일상을 촉진시키는 자극제로도 풀어보고 싶구먼.
이보게., 내 삶에 있어서도 마중물이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먼지 모르겠네. 나도 그거 하나 소중히 간직하고 싶네. 마시지 않고 다시 토해내야 하는 첫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들이키면 삶의 의욕이 살아나고, 아름다운 어휘들이 실 새 없이 솟구쳐 문장을 이루도록 말일세. 그래서 내 마음이 머무는 곳에 향기를 남길 수 있으면 좋겠네. 간혹은 바다와 같은 왕양한 기상이 품어 나오고, 파도와 같은 격렬한 정열을 부려보기도 하며 구름같이 발발한 야심도 펼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
함꼐 있어도 저마다 고독한 세상이라네. 그래서 마중물 같은 사람들의 마음이 그립다네. 책 속에서 만난 성인들의 희생심이나 보리심에서 볼 수 있었던 것 말일세. 가끔은 수고나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살아가는 낮은 자리의 사람들에게서 엿볼 수 있지. 그들은 빛보다도 소금이 되길 바라는 사람들이라네. 밝지만 그림자를 드리우는 빛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스스로 녹으며 말없이 도와주는 소금 말일세.
그 사람들의 삶이 끌어올린 물로 나는 밥도 짓고 빨래도 하고 목욕도 하며 화분에도 시원하게 뿌린다네.
나는 누구의 마중물이 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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