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대청댐이 수위가 높아질 것을 대비하여 방류를 시작했단다. 장마철이면 수문을 활짝 열어 힘차게 쏟아내는 물줄기가 폭포를 이루어 장관이다. 댐에서 쏟아내는 폭포수의 장엄함을 감상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정면을 볼 수 있는 공간도 설치해 놓았다. 드라이브 하는 차량이 늘어나고 잠시나마 관광명소가 되기도 한다.
나도 댐에서 방류되는 폭포수 구경을 나섰던 길이었다. 마침 구룡산 현암사 가는 길목이다. 산의 경사가 심하여 입구에서 산중턱까지 철제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오르기가 수월하다. 댐이 생기기 전에는 마을에서부터 까마득히 먼 이 험한 산길을 걸어서 오르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더구나 부처님 전에 올리는 공양물을 지게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힘겹게 올랐을 불자들의 정성을 생각하니, 내가 지금 편하게 오르는 발걸음이 그분들의 공덕이 아니었나 싶다.
계단을 오르니 산길로 이어지는 길 양옆에 울창하게 들어선 나무와 물기를 머금고 있는 풀냄새가 향기롭게 다가온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이 한들한들 춤을 추고 이름 모를 풀벌레들도 노래한다. 마치 합창이라도 하는 듯 여기저기서 다양한 노랫소리가 들린다. 지휘자가 없어도 자기들만의 노래를 뽐내며 쉴 줄도 모르고 장단을 맞춘다. 평지를 찾아 앉았다. 둘러보니 나무 틈새에 함초롬히 피어있는 야생화도 보인다. 서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듯 정겹다. 관객에 지나지 않는 나지만 이 순간만큼은 나도 자연과 하나가 된 것만 같다.
산등성이를 따라 200여m를 더 오르자 좁은 공간에 지어진 현암사가 나타났다. 1,600년 전에 이 높고 험한 산중턱에 어떻게 이런 사찰을 건축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살펴보아도 신기하기만 하다. 절벽에 매달려 있는 것 같은 암자. 일명 다람절이라 했던 명칭을 한자화 하여 현암사(鉉巖寺)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명산에서나 느낄 수 있는 청정한 공기와 수려한 경치에 고요하기까지 하니 이보다 더 수도처로서의 위치를 가진 장소도 드물 것이다.
산 아래 대청호반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수몰 전에는 수천 년 사람들의 채취가 어우러져 정을 나누었던 마을의 흔적이, 지금은 모두 수중에서 꿈을 꾸듯 추억만 피워내고 있을 것 같아 수몰민들의 비애가 느껴진다.
구룡산 정상으로 가는 길목에 오층석탑이 위용을 뽐내며 우뚝 서있다. 송림(松林)에 싸여 중생들의 번뇌를 해탈에 이르도록 계도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합장하고 탑돌이를 하였다. 온갖 망상에 휘둘리는 내 마음을 비워보려 돌고 또 돌아본다. 연륜이 더해 갈수록 나를 내려놓고 주위를 돌아볼 줄 아는 혜안이 깊어질 줄 알았건만 어찌 좁은 소견에 이기심만 생기는 것일까 삶에 대한 애착인지 집착인지 분간을 할 수 없으니 아직도 나는 어리석은 중생인가 보다.
불가의 스님들이 “복 지어라! 복 많이 지어 선업을 쌓아라!”하는 말씀은 남에게 베풀며 선한 일을 많이 하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 공덕은 결국 현생의 나나 후생의 자손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내세를 망라하여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살아야 하거늘 한치 앞도 못보고 사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내려오는 길에 석탑 앞에서 스님을 만났다. 홀로 이 절을 지키고 계신다 한다. 차나 한잔하고 가라며 손수 끊여주시는 차 공양을 받았다. 차 맛이 일품이다. 스님께“방대한 경전의 이해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또한 불자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행동은 못 미치니 어찌해야 하나요?”라고 묻자 스님은 "어려운 경전에 연연하지 마세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했습니다. 모든 생각은 마음에서 일어나고 마음먹기에 달렸으니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님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불자이지요.”라고 하신다.
생각이 마음에서 일어난다면 이 마음은 무엇일까? 마음대로 되지 않는 마음이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한 명제 앞에서 의문만 남으니 나는 수행공덕이 부족한 범부란 말인가. 다시금 묵언으로 마음을 정리해 본다.
오후에 올랐던 산행이 스님과의 선문답으로 이어져 어스름이 찾아올 즈음 마무리되었다. 너무 시간이 지체되어 험한 산길을 어둡기 전에 내려가야 할 것 같았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스님도 내려가는 길이 걱정이 되셨던지 하산을 서두르라고 하시며“세상만사 인과응보니 범사에 감사하며 공덕을 쌓으세요!”라는 당부와 함께“성불 하십시오”하고 돌아서신다. 스님의 말씀이 귓전에 와 닿아 마치 부처님 말씀처럼 구룡산의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지는 듯했다.
불시에 찾은 산사이지만 자신을 돌아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는 소중한시간이 되었다
전설이 깃든 청평사 (0) | 2020.01.20 |
---|---|
꽃봉투 (0) | 2020.01.19 |
법주사 산사 축제 (0) | 2019.07.01 |
백오십 시간의 열정 (0) | 2019.06.14 |
묵 파는 여인 (0) | 2019.05.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