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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靑山)에 누워 / 이제부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15. 12. 20.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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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靑山)에 누워

 

  무엇 하려고 나이 많은 나를 유혹하는가. 춤을 추는 듯 돌아서 가고, 끌리는 듯 다가오더니, 청산은 옷 한 가지씩 벗어놓는다. 너무나 화려하여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려 하지만 관심의 방향은, 미지의 신비 속으로 파고든다. 초야(初夜)에 여신을 대하듯, 경험하지 못한 흥분 속에서, 서툰 눈으로 바라본다. 마지막 남은 옷 한 가지는, 옷이 아니고 정수(精髓)의 미학 속에, 만상을 응축한, 점 하나인 듯, 하얀 이불자락으로 슬며시 감춘다.

  정신을 잃었나보다. 꿈인 듯 몽롱하여 섬세한 애무를 받아드릴 문을 열지 못하면서도, 말초 신경을 곤두세우고, 본능적으로 유두를 찾는 신생아 입술같이, 젖을 빠는 듯 환상에 빠진다. 눈을 감았다 뜨면서, 내 시선 속에 아름다운 여인이 안긴 줄 알았는데, 그것은 착시 현상이었다. 우람한 청년의 가슴에, 쿵쿵 뛰는 심장을 팔로 감싸 안은 듯, 풍만한 여체에서도 얻어내지 못한, 싱그러운 감촉에 매료되어, 바위 같이 굳어지는 나를 발견한다.

  언제부터 내 마음속에, 양성(兩性)을 넘나들며 사랑을 연주하는, 탕아의 감정이 자리 잡고 있었는가? 억압된 리비도(libido)의 변태적 만족인가. 보고 또 보면서도 청산과 호수와 운무가, 함께 어우러지는 자연의 신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무아의 경지에서 정신을 뺐기고 있다. 그 아름다운 정경은, 태초의 자연 그대로는 아니었다.

 

 

  남한강과 함께 뻗어 내리던 산줄기와 이어진 연봉들 중에서, 가장 가까이 에서 마주보는 산이, 계명산과 화암리 무명의 산이다. 그러나 멀리 달려온 강물이 사이를 갈라, 손을 잡지는 못했었다. 눈치 빠른 사람의 힘으로, 천길 협곡에 바위산을 옮겨 놓은 듯한, 둑을 막아 인공 호수를 만들었다. 그 이후부터는 강은 남한강 지류가 아니다. 바다 같은 호수이다. 옛날 사연과 삶의 방법은 물 속 깊이 가라앉히고, 새롭게 만들어지는 호수문화는 관광객을 불러들인다. 아름다운 경치에 동화되어, 속세를 떠나 천상에 오르려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 시켜 줄만한 비경을 만든 것이다.

 

  세상 이치가 양과 음으로 조화를 이루듯, 젊음이 넘치는 남성의 산과, 여성인 듯 잔잔한 호수가 하나가 된다. 초례청에서 천륜에 끌리는 미소로 부부의 연을 맺듯, 서로를 채우고 품는 합일이, 사랑 같이 아름다운 환희를 자아낸다. 초례청의 풍경이 환상으로 다가오는가? 생동하는 화조 병풍에 천상의 선녀가 하강하는 듯, 하얀 물살을 가르며 떠가는 유람선이, 날개옷 같은 물결의 여운을 남기며, 산을 돌아간다. 아름다운 그림병풍을 펼치는 듯…….

 

 

  호수의 정경을 바라보며, 천국의 계단을 찾아 청산에 오르니, 금잔디가 포근한 관망의 명소가 있다. 거침없는 평화의 한 가운데요, 자유를 보장받는 아늑한 곳이다. 길게 누우니 하늘이 코끝에 닿는다. 산새 소리는 천궁에서 보낸 음악이리. 물결이 발끝에 차이고, 산이 어우러지는 명당자리다. 앉으나, 서나, 누우나, 시원(始原)의 나로 돌아가, 자연의 일부가 된다. 솔숲을 지나온 바람은 내 가슴을 쓰다듬는 듯 호수 표면으로 미끄러지더니, 상쾌함으로 전신을 감아 돈다. 청산은 호수에 박힌 수정 같다. 그 거대한 수정은 거문고 줄을 떠받친 안족(雁足)의 모양으로, 맑은 하늘을 받들고 있다.

  화가의 생각인가, 조각가의 솜씨일까? 이렇게도 아름답고 균형 바르게 물과 산, 계곡과 하늘을 배치했는가. 번뇌 망상이 발붙일 곳 없는 명소로다.

 

 

  내 고향 충주가 아름다운 것은, 중․고등학교 시절을 이곳에서 공부했으니 익히 알고 있었지만, 계명산의 참모습을 바로 보지는 못 했었나보다. 관심 두지 아니하고 충주 시가를 감싼 산 앞쪽만 바라보고, 산비탈 중턱까지 늘어선 과수원에서 빨갛게 익어 가는 사과가 먹고 싶어 군침만 삼켰을 것이다. 능선 전체가 사과밭이었으니까.

  고향을 떠나 산 것이 40년 가까이 되었다. 고희를 바라보며 늙어 가는 순리에 거역할 수 없는 무딘 안목으로 찾아 왔지만, 충주호와 조화를 이루는 계명산 연봉들이, 옛날 보지 못했던 생소한 비경을 보여주어, 매혹되었다.

  거울같이 맑은 호심(湖心)에, 내 인생 여로에 묻어온 흉한 모습이 비치는 것 같다. 여생(餘生)이라도, 지나친 욕망에 집착하지 말고 깨끗이, 씻고 가란다. 내려놓아라! 비우고 가라! 청산은 조용히 참된 행복을 설(說)하고 있는데…….

 

 

  배출구가 없는 풍선 같은 욕망을, 어디에 내려놓을까? 자연이 주는 축복의 단비가, 어디나 같게 내린다 하여도, 사람마다 받는 그릇이 다르듯이 ‘이 아름다운 경치! 자연의 정기!’ 무궁무진의 천복을, 내 작은 그릇에 얼마쯤 담아 갈까. 좋은 것만 담아가려거든, 아직도 더 버리고 가라하며, 호수를 지나가는 바람이 내 마음을 흔들고 있다.

(2006년 5월 26-27일 충주시 종민동 충주호반에서 향일회원과 함께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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