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의 새벽 / 김 홍 은
산사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새벽의 범종소리는 여운이 길다. 어느 스님이 무슨 생각을 하며 치고 있는 것일까. 그 마음은 알지 못하겠지만 잠에서 깨어나 범종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저 소리를 듣는 우주 만물의 새벽은 합일된 아름다운 마음들이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 새벽의 목탁소리도 좀 더 가까이 서 듣고 싶어진다.
이처럼 새벽에 화장사를 찾기는 오늘이 두 번째다. 스님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으셨는지 절간은 아주 고요하다. 절 마당 앞 멀찌감치 서서 스님이 잠들어 계실 희미한 방문에 불이 켜지기를 이때나 저 때나 기다렸다.
절 주변은 여명이라서 그런지 속세를 벗어나 모든 번뇌를 털어 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했다.
새벽하늘을 바라보는 마음도 여느 때보다는 새롭다. 파란하늘의 흰 구름이며 반짝이는 별들은 금새라도 사르르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참으로 오랜만에 바라보는 새벽의 별들이라서 그런지 유난히 반짝인다. 어릴 때 처음으로 밤하늘의 별들을 보았을 때의 야릇한 감정 같은 그런 마음이 흘렀다.
어쩌다 여름밤 혼자서 마루 끝에 앉아 별똥별을 보는 밤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누군가가 또 이 세상을 하직한다는 애석함이 밀려와 서다. 이제는 나이가 들은 탓인지 슬픔을 당해도 점점 무감각해져 간다. 이 모두가 자연의 이치에서 오는 순응 때문에 선가보다.
별들로부터 쌓였던 슬픔이 가슴으로 무너져 내려앉는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시던 날 밤에도 저렇게 별들이 총총했었다. 지금은 그 밤을 다시 보는 느낌이다. 그저 막막한 심정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만 쉬던 그날이 되살아나 눈물이 핑 돈다. 자식의 도리를 못 다한 죄스러움에 더 이상 하늘을 바라보기가 부끄러워 시야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훗날 내가 죽어 가는 밤에도 이런 밤하늘을 누군가가 바라보고 서 있겠지. 자신이 죽어 가는 밤하늘을 미리 바라본다는 생각에 젖으며 망연히 별들의 노래를 흥얼거려 보았다.
고요한 산사에서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는 마음의 때를 씻어내는 듯 신선하다. 여명의 새벽하늘의 별들도 점점 어디론가 사라져갔다. 새벽을 여는 스님들이야말로 참선을 하지 않고 이대로 있어도 마음이 청정하여 지겠다. 세속에서 살기보다는 이렇게 살고싶은 욕심이 가슴 한곳에서 살며시 일어났다. 너무도 고요한 산사. 이 마음의 고요도 오래도록 이대로 지니고 싶다.
멀리서 무슨 기척이 있는가 싶더니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은 소리에서부터 점점 크게 들린다.
…… 르르르 또 또 똑, 똑
똑, 똑 또 또르르르 ……
…… 르르르 또 또 똑, 똑.
저 고요를 깨는 지극히 조심스럽고 순수한 소리. 아름다우면서도 진실로 착한 소리.
이는 아주 깊은 산에서 듣는 귀뚜라미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천연기념물의 오색딱따구리가 날카로운 부리로 나무를 쪼아대는 소리 같다. 절묘한 음향이 어디론가 사라져갔다가는 다시 들리고, 들렸다간 다시 어디론가 사라져간다.
정구업진언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리수리 사바하아
스님의 낭랑한 목소리가 목탁소리와 함께 울려 퍼진다. 저 소리는 수없이 들어 왔건만 의미를 알려고 하지 않았으니 마음에 들어올 리가 없다. 나는 목탁소리를 더 가까이 서 듣고 싶어 자박자박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떼면서 경내를 들어섰다. 자연속에 무쳐서 인지 스님의 염불소리에 의해서인지는 몰라도 마음이 수려해짐을 느꼈다.
똑, 독 - 똑, 독 - 똑, 독 - 똑, 독 -
스님은 산지사방을 바라보며 일체중생들과 대화를 하는 듯, 하면서도 무엇인가 속삭이는 듯 하다가는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염불을 한다.
저 마음은 어떤 큰 뜻을 담고 있는 것일까.
원효대사가 주장한 인간이 가야할 귀일심원(歸一心源)과 요익중생(饒益衆生)의 일깨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마음이 돌아가 있어야할 근원의 자리에 있게 하고, 중생들의 삶이 올바른 것이 되도록 이익을 주는 일이 되게 하는 염불소리겠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이 마음은 어디에가 있었는가. 주위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자리에 가 있지 아니하고 어디에 가 있었나. 머주히 서서 피어오르는 새벽안개를 바라보고 있으니 자신의 형체도 자연 속으로 사그라져 서서히 없어지는 것 같다. 인생이란 운무처럼 피어났다가 운무처럼 스러져 어디론가 사라져 가는 것인가 보다.
청정한 목탁소리도 그치는가 싶더니 스님은 도량석을 끝냈는지 법당 안에다 대고 삼배를 올리고는 옆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으신다. 나는 머뭇거리다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종교의식도 제대로 모르지만 세분의 성인 중, 한 분인 석가상 앞에 무릎을 꿇고 살며시 두 눈을 감았다.
스님은 종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댕-댕-댕 나지막하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또 한분의 스님이 옆문으로 들어와 가사장삼을 두르고 부처님 앞에 촛불을 켜 향불도 부쳤다. 그리고 천수를 올리고 나니 주지스님이 오셔서 삼배를 하신다. 세분이 나란히 서서 예불을 드린다. 이분들의 고행을 보면서 나도 따라 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부처님의 지혜를 받아 물욕심(物慾心)을 닦아내고 마음을 비우리다. 그 동안 내 마음은 무엇이었기에 이렇게도 많은 욕심들이 있었을까? 마음은 재간 좋은 화가(畵家)와 같아서 갖가지 그림을 그린다고 하였던가.
돌이켜보니 내 마음은 욕심의 화가였음을 이제서 알았다. 일중일체(一中一切), 일체중일(一切中一)이라하였거늘 이리도 내 마음이 많았음에 고달프게 살아 왔나보다.
스님이 치는 목탁소리로 흐트러져 있는 마음을 묶어 하나가 되게 싸안고, 여생이나마 반듯하게 살아야겠다.
똑, 독 - 똑, 독 -
마음이 하나가 되게 일깨우는 스님의 염불소리와 목탁소리만이 법당 안을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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