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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집 둥주리 / 김명주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12. 11. 7.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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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치집 둥주리 / 김명주(金明珠)

 

 자기 마음에 꼭 맞는 집을 한 번 아담하게 지어 보고 싶은 욕망은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우리 집 구조가 어떻게 되고 정원이 어떻게 생겼으며 무슨 꽃과 나무를 심을까 하는 구체적인 꿈을 늘 지니고 있었다. 그 꿈속의 집은 크도 작도 않은 돌집이었고, 정원은 일일이 손이 가거나 꾸미는 데 돈이 많이 드는 것이 아닌 자연 모습 그대로의 소박한 뜰이면 되었다. 다만 그 뜰 한 구석에 일년 내내 마르지 않는 옹달샘이 흘러 주기를 원했으며, 우리 가족이 철따라 따먹을 수 있는 과수가 몇 그루 심어져 있었으면 했다. 그러나 늘 도시에서만 사셔야 했던 가난한 봉급생활의 친정아버지는 이사 갈 때마다 게딱지만한 기와집으로만 옮겨 다니셨으니 집에 대한 나의 꿈은 늘 꿈으로만 남아 있다가 출가하게 되었다.

 

 결혼 후 얼마 있다가 겨우 후생주택을 장만하여 들었는데 처음 갖는 내 집이라는 점에서 대견스럽고 흐뭇하기는 했으나 마음에 드는 집을 지어보고 싶다는 꿈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얼마 안 가서 우리는 새 집 짓는 꿈에 부풀어 그 집을 팔아 따로 집터를 샀다.

 

 그 집터는 내 어린 시절 꿈꾸던 뜨락 면적보다는 적은 것이었으나 서울에서 작으나마 정원을 꾸밀 수 있는 집터를 갖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서, 좀 높기는 하지만 비탈진 언덕에 자리 잡은 백 이십 평의 대지는 그런대로 만족할 만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아직 사회경험이 미숙했던 우리는 이것저것 알아보지도 않고 복덕방 중계인의 말만 믿고 땅을 계약했는데 사놓고 보니 문제되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두 배로 높이 쌓아올려야 했던 축대의 공사문제는 고사하고, 한 집에서 십여 평 정도의 땅을 사 넣으면 입구로 통하는 통로를 만들 수 있다던 중계인의 말과는 달리 이 집에서 서너 평 저 집에서 십여 평, 마치 조각보 모으듯이 댓집에서 삼십여 평을 사 모아야만 문간으로 통하는 길을 말들 수 있었으니, 인생 만사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깊이 경험하였다.

 

 이년 동안에 걸쳐 온갖 고초를 다하여 겨우 닦아놓은 집터란 것이 한쪽 면은 2단으로 높이 쌓아올린 축대인 데다가 다른 한쪽 면은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절벽을 끼고 있어 전혀 안정감이 없었고, 험하고 좁은 통로를 거쳐야 겨우 바깥 도로로 나갈 수 있어 어처구니 없을 만큼 못생긴 대지로 변해버렸다.

 

 마음에 흡족지 못한 대지에다 집을 짓는다는 노고가 아깝고 그 동안 집 한 채 지은 것만큼의 고초를 겪은 터라 지친 김에 우리는 그 집터를 팔기로 하였다. 꿈이란 그리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보다고 우리는 쓰디쓴 좌절을 맛보았다.

 

 그러나 복덕방에 내놓은 집터는 집터가 못생긴 탓으로 좀처럼 팔리지 않았다. 부동산의 매기가 좋은 봄, 가을철이면 행여 이 대지가 팔릴까 하고 마음 조린 지가 몇 해가 지나고, 해마다 장마철이면 겪는 축대 걱정과 축대를 보호하기 위한 배수시설 등에 괴로움을 받게 되면, 시가(市價)의 반이 아니라 반의 반이라도 팔아 버리고 싶은 심정으로 몇 해가 거듭되어도 그 대지는 팔리지 않았다.

 

 나중에는 하나의 재산이 아니라 늘 우리를 괴롭히는 이앓이요 거치장스러운 혹이라고까지 생각되었다. 서울에 와서 신시대 바람이 든 2,30대 시골 청년이 고향에 두고 온 멋모르고 결혼한 본처 소박하듯 무슨 수를 써서라도 떼어 버리려 했지만 15년이 지나는 긴 세월 속에서도 대지는 끝내 팔리지 않았다.

 

 마침내 우리는 팔기에 지쳐서 이 집터에다 집을 짓기로 하였다. 집터를 팔기 위해서라도 집을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리하여 얼마 전 건축 설계사와 함께 그 집터를 찾아갔다. 터를 팔려고만 생각했지 집을 짓겠다고 찬찬히 살펴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축대가 높다지만 십여년 동안 금 하나 가지 않고 곱다랗게 보존된 모습이고, 사방이 확 트이어 전망이 좋으며 시원하고 공기가 깨끗한데다가 정남향이라 겨울철의 햇살도 따뜻하리라는 점 등을 알게 되었다. 시내에서 퍽 가까운 곳이지만 소음이란 전혀 없는 조용한 곳이기도 해서 이만큼 공해를 벗어난 대지도 서울에서는 구하기 힘들거라고 생각하면서, 문득 하늘을 치어다보니 마음대로 시원스럽게 뻗은 아카시아 나뭇가지 위에 큼직하게 얹혀 있는 까치집 둥주리가 눈에 띄었다.

 

 윗집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가파른 언덕 위에 열여섯 그루의 아카시아 나무가 제법 노목(老木)으로서의 관록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그 중 가지가 실한 나무 위에 까치가 집을 짓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까치집 둥주리는 모두 세 개나 되었다. 한 마리 까치가 부지런히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왔다 갔다 하면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예기치 않게 정다운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움에 겨워졌다. 까치 둥주리는 아득한 옛 어린 시절 동리 고목나무나 시골 논두렁의 키 큰 <포플라> 나무 위에서나 보았던 것이 아니던가. 그런 까치가 산도 아니고 들판도 아닌 바로 내가 내 집을 지으려는 집터 울타리 위에 살아 주다니―.

 

 옛날부터 까치는 반가운 손님이 오는 것을 미리 기별해 주거나 좋은 소식을 전해 준다는 영물의 새로서 까치 우는 소리는 늘 사람들에게 환영받아 왔다. 민가나 민가 가까이에 집을 짓고 사는 새로 주위에서 오는 해가 없는 곳을 잘도 골라 집을 짓는다. 이들의 집 또한 어떤 길조(吉兆)로서 환영되었다. 집안에 우환이 있거나 초상이 나는 해에는 매년 집을 짓던 제비가 집을 짓지 아니하더라고 하시면서 제비가 집을 짓는 것을 무척 좋아하시던 할머니 생각이 났다.

 

 까치집이 얹혀 있는 아까시아 노목은 작년에 피었던 꽃이 지고 맺은 꽃씨가 마치 콩깍지 속의 콩알처럼 꽃가지 속에 박혀 무수히 매달려 있었다. 지난겨울의 모진 바람에 많이도 떨어졌으련만 아직도 남아있는 깍지 속의 꽃씨들이 먹이가 없는 겨울철이나 이른 봄철 까치들의 먹이가 되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가치뿐만 아니라 비둘기, 참새, 멧새들도 이 꽃씨들이 떨어지는 우리 뜰악에 와서 꽃씨를 쪼아 먹고 놀 것 같기도 하다.

 

 문득 그러한 생각에 젖어 있는 동안 어린 시절부터 꿈으로 남아 있는 뒷뜨락의 옹달샘이 바로 우리집 마당 한 구석에서 철철 흐르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 말썽 많고 못생긴 대지 때문에 겪은 고초를 말끔히 잊어버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나는 이곳에 집을 지으리라.

십여년 대도시의 아파트로만 옮겨 다니면서 오염과 소음에 지친 내 신경을 위해 까치 둥주리는 청량제가 되어 줄 것만 같았다. 이 조그만한 대자연의 한 모습이 나를 이렇게도 맑고 기쁘고 온화하게 하여 주는 것인가.

 

 이제 이 집터는 내게 있어 옛날 신시대 청년의 구박쟁이 본처가 아니라 십여 년의 풍상을 묵묵히 겪으며 수절해 온 조강지처처럼 가슴 뿌듯한 감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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