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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 풀 / 신영기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12. 10. 6. 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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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밀 풀 / 신영기

 

 정서가 산만해서 일까, 정리를 한다는 것이 되레 일을 만들 때가 많다. 어지럽게 널려진 책상 위를 정리한다며 부산을 떨던 야무지지 못한 내 손끝이 한쪽 모퉁이에서 낮잠 즐기던 동양란 분을 밀쳐버렸다.

 

 애써 잡아보려는 내 손을 뿌리친 가늘고 긴 청자색 분(盆)은 모래와 흙을 쏟으며 넘어져 한쪽 머리가 깨져 버렸다. 잠결에 깜짝 놀라 영문도 모른 체 떨고 있는 란(蘭)의 가녀린 모습이 애처롭다. 빈 분을 찾아 분갈이를 하려다 공업용접착제를 생각했다. 깨진 조각을 깨끗이 닦고 접착제를 발라 제자리에 맞춰 보았다. 상처아문 흉터 같은 흠집이 남긴 했지만 애써 분갈이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잘 붙어주었다.

 

 성가신 일거리 하나를 접착제가 해결해준 것이다. 이토록 편리한 접착제가 언제 또 사용될 줄 몰라 잘 보관한다는 것이 그만 손끝에 묻었다. 끈적하게 당기는 힘에 딸려간 손가락이 서로 붙어 떨어지지 않으려한다.

 

 몹시 배가 고팠던 어린 시절 삼베실에 매기려고 끓여둔 메밀풀을 몰래 먹다, 덕지덕지 손가락에 말라붙은 것을 떼어내던 생각이 났다. 풀(접착제)은 익혀먹는 식생활에서 얻은 소득이다. 가장 원초적인 밥풀떼기도 있고, 문종이나 벽지를 바르는 밀가루 풀도 있다.

 

 먹다 남아 상한 밥을 버리지 않고 푹 삶아 자루에 넣고 주물러 짜낸 물을 가라앉혀 끓인 것이 밥풀이다. 밥풀을 옷이나 이불에 매기면 그 보송보송하고 상큼한 촉감이 깔끔하고 인정 많으며 마음통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처럼 상쾌해진다. 상한 밥으로 끓인 풀의 상큼한 효능에서 개과천선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풀의 백미는 메밀풀일 것 같다. 흑갈색의 통통하고 딱딱한 껍질만큼이나 강한 성질의 메밀 풀은 삼베를 짤 삼실을 부러뜨린다. 그래서 된장을 넣고 끓여야한다. 된장의 재료인 콩은 딱딱한 메밀 풀을 부드럽게 해주고 소금은 실을 녹진하게 희석시켜주기 때문에 부러지지 않으면서 질긴 실로 만들어준다. 상반된 성질을 잘 이용한 조상들의 지혜가 얼마나 놀라운가.

 

 풀 은 사람의 품성 같다. 느리고 게으른 사람은 주는 복도 받지 못하듯 너무 묽게 끓인 풀 은 종이가 잘 헤어지고 찢어지게 한다. 뭉텅뭉텅 덩어리진 너무 뻑뻑한 풀이 고르게 칠해지지 않는 것은 무슨 일이나 서둘지 말고 차분하게 해야 실수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다.

 

 풀칠을 고르게 하지 않아 떨어진 벽지속으로 불룩하게 바람이든 것을 보면 실속도 없으면서 허풍만 떠는 사람을 보는것 같다. 솥에 눌어붙지 않도록 여린 불에 끓이며 주걱으로 휘적휘적 저어 주는것은 화합하고 포용하며 덕을 쌓으라는 가르침 이었다.

 

 풀에는, 바늘구멍으로 황소바람 들어온다며 문풍지 하나를 붙이면서도 집안의 평안을 비는 축원문을 쓰듯 정성들여 끓이고 솔질을 했던 어머니의 정성과 삶의 애환이 스며있었다.

 

 산업의 발달은 화공학에 전기, 전자공학까지 매칭된 성능 좋은 각종 접착제의 대량생산으로 삶의 질을 풍요롭고 편리하게 해주고 있다. 그렇지만 먹고, 입는 것이 삶의 최대 목표였던 옛날, 휘적휘적 주걱으로 저어가며 어머니가 끓였던 풀처럼 풋풋한 정감은 느낄 수가 없다.

 

 나는 징, 꽹과리, 북, 장고가 합연하는 우리의 전통가락인 사물놀이 공연을 즐겨본다. 악보 없이 연주하는 사물놀이 가락에 들어있는, 나도 모르게 어깨 들썩이는 신명(神明)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신비한 힘과 매력 때문이다.

 

 여러 마리의 말이 달려가듯 휘몰아치는 것이 휘모리 가락이다. 도란도란 도랑물 흘러가듯 자근자근 이어지는 것은 자진모리가락이다. 모두 악보없이 연주하지만 어느 것 하나 엇박자 소리를 내지 않는다.

 

 왜일까.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서양음악과 달리 우리의 가락엔 호흡이 악보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들숨과 날숨으로 이루어지는 호흡을 통해 일사분란하게 팀웍을 이룬 연주자들이 혼을 쏟아놓는 듯한 연주는 보고, 듣는 이 까지도 함께 호흡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호흡은 장단과 모션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연주자들의 악보이자 관객들을 무아지경의 황홀감 속으로 끌어 들이는 흡인력 강한 풀과 같다.

 

 사람의 마음속에도 끈적하고 진득한 풀이 들어있다. 형체를 볼수 없는 정이라는 것이다. 사랑을 줄줄 아는 사람의 마음속은 너무 묽지도 너무 뻑뻑하지도 않은 풀이 들어있고, 반목하고 시기하며 다투기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속엔 상한 풀이 가득차 있을 것이다.

 

 한두 번씩 굴곡진 삶을 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젊은 날의 나 또한 톡 치기만 해도 딱하고 부러질 것 같이 급하고 강한 메밀풀 같았다. 반면 아내는 콩같이 부드럽고 소금같이 눅진했으니 된장 같았다고나 할까.

 

 성격차이라는 이유로 이혼을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돌아보면 내 분잡한 손길이 오르내리는 책상모퉁이에 위태롭게 놓여있는 란분처럼 언제 떨어져 깨질지 모를 위기의 순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순수한 눈망울과 끈적한 접착력을 가진 자식이란 풀에게 꽉 잡혀 떨어질 수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다. 내게 받은 상처의 아픔을 감내하면서 강한 메밀풀을 부드럽고 녹진하게 희석시키고자 합리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않은 아내의 된장 같은 역할 또한 우리를 떨어질 수 없도록 만든 요인이기도 했다.

 

 참으로 다행이었던 것은 사람에겐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고 가지려는 노력을 하게 만드는 소유욕이 있다는 것이다. 나와 다른 배우자의 성격을 소중한 보석이라 생각하고 가지려는 노력을 하다보면 귀한 것을 귀하게 볼줄아는 눈이 뜨이게 된다. 그러면 성격차이라는 이유는 이혼사유가 아니라 자기 개발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는 또 다른 에너지로 승화할 것이다.

 

 메밀과 된장이라는 상반된 부조화가 있었기에, 남성의 강함과 부드럽고 섬세한 여성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삼베라는 가실가실하면서 시원한 옷감을 짤 수 있었다. 부조화 속에서 찾아낸 조화는 또 다른 편안함과 아름다움일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인 것이다.

 

 상처의 아픔도 원망도 잊었다는 듯 뚜렷한 흠집을 딛고 다소곳이 란을 보듬고 있는 란 분에, 내가 주었던 아내의 아픔이 겹쳐진다. 함께 살아온 세월만큼 편안한 분에서 옮겨지지 않았음을 안도하며 포근하게 잠든 란의 평화로움에서 티없이 곧게 자란 내 아들, 딸의 밝고 환한 얼굴을 본다.

 

 내가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오순도순 화목하게 살아가는 우리가족의 평화와 건강 아닐까. 풀 속에서 풀의 도움으로 살아온 나의 행복은, 이렇게 새 화분에 옮겨 심지 않은 축복 때문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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