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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목에 핀 꽃 / 김귀선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11. 8. 12.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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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목에 핀 꽃 / 김귀선

 

  마당에서 팔순의 두 노인이 빨래를 널고 있다. 옷가지가 빨래줄에 걸릴 때마다 할머니의 구부정한 허리가 쭉 펴지곤 한다. 목화솜처럼 부푼 할머니의 은색 파마머리는 봄볓에 옅게 반짝이고 몸에 걸친 헐렁한 런닝은 바람에 가볍게 일렁인다. 옆에서는 같은 연배의 할아버지가 빛바랜 파자마 바람으로 쭈구리고 앉아 통 안에 담긴 빨래를 꼭 짜서 할머니께 건넨다. 도란도란 얘기도 나누고 건네던 빨래를 맞잡은 채 쳐다보며 소리 내어 웃기도 한다.

   아버님 댁 대문을 들어서던 나는 그대로 멈춘 채 그 모습을 바라본다. 이성 간에 만나 숨길 것도 애써 드러낼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달관에서 우러나온 여유로움이 아닐까. 마주 보고 웃는 두 노인의 얼굴에선 편안함이 넘친다. 문득 일 년 전 그날 일이 머리에 떠오른다.

 

  홀로 지내시는 시골 아버님 댁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항상 활짝 열려 있곤 하던 현관문이 닫혀 있었다. 볼일 보러 가셨나 보다 생각하며 현관 열쇠를 넣어 두기로 아버님과 약속한 곳에 손을 넣어 보았으나 열쇠가 잡히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일에 난감해 하며 마당에서 서성이는데 창문 틈으로 집안에서 얘기 하는 소리가 흐릿하게 흘러 나왔다. 반가운 마음에 이층 계단을 단숨에 올랐다.

 그러나 현관문 손잡이를 잡다가 나는 얼른 계단을 다시 내려오고 말았다. 분명히 여자 목소리가 안에서 흘러 나왔기 때문이다. 집안에 있는 여자는 도대체 누구이며 문은 왜 잠가 두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퍼뜩 그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 머리에 스쳤다. 분명 그 일과 연관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삼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 아버님은 마음을 못 잡으셨다. 유언을 들먹이시고, 자신도 곧 쓰러질 것이라며 곡기마저 끊으셨다. 들를 때마다 본 아버님 댁 거실과 주방에는 당신의 속을 내 비치기라도 하신 듯 술병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미처 상상치도 못했던 홀아비 생활에 그 무엇도 삶의 의미가 되지 않는 듯 힘들어 하셨다.

 그런데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다. 아버님의 힘들어 하시던 모습을 생각하며 초조한 마음으로 시골에 들른 어느 날이었다. 어지럽던 집안은 깨끗하게 치워지고 아버님은 환안 얼굴을 하고 계셨다. 안방에는 그토록 애잔해하며 세워놓았던 어머님 사진 대신 다른 사진이 놓여 잇었다. 한복을 단정하게 입은 20세 전 후의 어여쁜 여인의 모습이었다.

 '아니! 이 연세에 왠 젊은 여자 사진을 머리밑에까지… 도대체 이 여자는 누구지?'

 불만이 가득하시던 전과는 달리 며느리에게 농담까지 하시는 등 너무도 달라진 아버님의 모습에 혹시 망령이라도 드신 게 아닌가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런 내 마을을 드려다보기라도 하신 듯 조금 미안해 하시며 아버님께서 먼저 말을 끄집어 내셨다. 사진 속의 여인은 당신에게 가끔 들러 많은 위로와 도움을 주는, 남편과 사별하고 외로이 지내는 동기생이라고.

 

 그날 안에서 들려나온 여자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그 여자분인 게 분명했다. 현관 계단 아래서 한참을 고민했다. 그냥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인기척을 낼 것인가를 결정 못한 채 이층 계단을  몇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했다. 되돌아 오려고 차에 시동까지 걸었다가 들고 온 반찬이라도 전해 드려야 할 것 같아 계단 아래서 전화를 했다. 도저히 잠긴 문을 두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휴대전화기에서 울리는 발신음 소리와 집안에서 나는 전화밸 소리가 양 귀에 들렸다.

 잠긴 현관문을 열어준 아버님은 사춘기 소년처럼 당황해 하셨다. 그리고 묻지도 않은 말을 순서 없이 늘어 놓으셨다. 진땀을 빼는 아버님의 모습을 보자 되래 내가 무안할 정도였다. 그 와중에도 여자 분이 궁금해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작은방 문을 잠근 채 아버님의 부름에도 대답이 없었다.

 두 분은 방문을 밀고 당기고 한참이나 승강이를했다. 아버님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어차피 한번은 닥칠 일이라 생각했는지 스스로 문을 여셨다. 모습을 드러낸 팔순노인네의 얼굴이 십팔세 소녀의 볼같이 발그레했다. 눈길을 어디 둘지 몰라 할머니는 안절부절했다. 그러더니 젊은 사람 보기에 부끄럽다는 말과 함께 별안간 나를 껴안아 버리셨다. 순간 할머니의 심장 소리가 내 가슴에까지 울리는 듯했다.

 

 대문 밖의 인기척이 들렸는지 할머니가 먼저 돌아보신다. 눈과 입을 동그랗게 하시며 두 팔을 높이 들었다 내리면서 합장을 하신다. 얼른 빨래 담긴 통을 밀치고는 내게 다가와 짐을 받는다. 사 들고 간 떡을 편한 자리게 펼쳐놓자 할머니의 펑퍼짐한 보라색 고무신과 아버님의 낡은 슬리퍼가 마주 앉는다. 목이 막힐 것이라며 두 분은 서로에게 음료수를 권하고 입가에 고물이라도 묻으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으로 털고 닦아준다. 고목에 핀 꽃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두 분의 눈빛에 밀려 그 자리를 슬그머니 빠져나온다. 두 노인이 널다가 만 통속의 빨래를 봄볓에 활활 털어 꽃잎처럼 줄에 건다. 행여 산들바람에 꽃잎이 떨어질세라 집게로 꼭꼭 집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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