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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 / 오 정 순 ( 창작적인 수필)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11. 7. 23. 0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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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 산 / 오 정 순

 

 비에 젖은 청담공원길을 걸으며 우산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는다. 그날의 빗소리와 닮았다. 진흥아파트 모퉁이를 돌자 모란꽃이 한창이다. 그때도 덕수궁에 모란꽃이 피었었다. 나도 모르게 40년 전의 시간 속을 걸으며 유행가 가락을 흥얼거린다.

 

 비 내리는 여름 날엔 내 가슴이 우산이 되고

 눈 내리는 겨울 날엔 내 가슴이 불이 되리라.

 

 '맞아 그때 그랬어, 누군가 여린 어깨에 빗물이 떨어지면 내가 우산이 되어 주고, 가슴 시린 누군가를 만나면 내가 불이 되어 준다고 그랬어. 내가 받은 대로 세상을 향해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하며 살자고 했어.'

 

 40년 전, 우리 집은 보증서류에 도장을 찍어주는 바람에 법정에 출입하는 일이 생겼다. 세상에는 사람끼리 해결되지 않는 일이 있고 서류에 도장을 찍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그때 처음 알았다. 어머니가 증언하는 날, 나는 어머니의 진실을 읽어 내지 못하는 새내기 판사가 답답하기만 했다. 그때는 인생의 경험이 짧아서 사건을 객관적으로 읽어야 하는 판사의 어려움까지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 그날도 역시 미결로 끝났다.

 법원을 빠져 나오자 안개비가 거리를 적시고 있었다. 햇볓이 쩅쩅 내리쬐는 날보다 차라리 위로가 되었다. 덕수궁 돌담길을 터벅터벅 걸어 나와 어머니를 먼저 보내드리고 다시 걸었다. 혼란스러움을 떨치지 못하고 시청 앞을 막 지날 때이다.

 "비켜! 이 미친년아, 죽으려고 환장했냐? 혼자 죽는 건 괜찮은데 나까지 잡지마, 이 미친년아."

 나는 그만 주눅이 들어 고개를 꾸벅하고 잠시 멈춰 섰다가 차가 미끄러지듯 지나간 거리를 힘없이 바라보았다. 거리는다시 휑해졌고 나는 그 길을 터덜터덜 다시 걸었다.

 몇 번의 신호가다시 바뀌었는지 의식이 없다. 남들이 움직이면 나도 따라 걸으며 광교의 건널목 앞에서 멈추었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 구두 앞 부리를 멍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한참 후에 우산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냥 두었다. 어깨에 닿던 찬 기운이 조금 줄었다. 누군가 우산을 받쳐주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였다. 그래도 그냥 두었다. 타인이 내 마음 자락에 닿지 않는 날이라 얼굴을 보고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움직인다. 나도 따라 길을 건넜다. 서서히 옆 사람이 마음 쓰였다.

 "저 이쪽으로 가야 하는 데요... 고맙습니다."

 사람을 보지 않고 인사말만 나직하게 흘렀다.

 "아 괜찮습니다. 가시지요."

 굵직한 남자 목소리다. 여전히 부담스럽다. 그래도 그냥 걸었다. 종각이 있는 사거리를 지날 때 다시 한번 사양하였다.

 "저 괜찮은데요."

 "가시지요. 저도 그리로 갑니다."

 조계사를 지나 견지동의 사무실 앞에 이르렀다.

 "저 다 왔는데요."

 "아, 예 들어가시지요."

 들릴 듯 말듯 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애써 그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는 내내 아무 말도 걸오지 않았는데 내가 빌딩 안으로 들어서자 오던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몸조심 하십시오."

 그는 어디서부터 나를 보았을까. 혹시 택시 기사의 말을 그 사람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른다. 진심을 담아 인사말을 남긴 그는 총총히 빗속으로 걸어갔다. 나는 빗속에 섞이는 그의 발소리만 잠시 듣고 있다가 계단을 터벅터벅 올라갔다. 그제서야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흐느껴졌다.

 

 7호선 청담 전철역의 계단을 올라 오면서 그날이 생각났다.

 같은 날 봄비 가운데서 만났던 여러 질의 사람들을 기억하며 내 인생은 변해갔다. 재판에 이기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해댄 사람은 훗날 후회하지 않았을까. 우중에 하마터먼 사람을 칠 뻔한 그 기사양반의 가슴 떨린 날을 어떻게 갚아 줄까. 인간에 대한 회의로 세상이 비극적으로 보이던 날, 바로 나에게 우산을 받쳐준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무엇하는 사람이었을까. 그래도 사람에게서 세상을 아름답게 보도록 희망을 남겨 준 그사람은 내 일생동안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산다. 나도그렇게 세상 사람을 없는 듯 있는 사람으로 조용히 다가가자고 하지만 다진만큼 쉽지 않다. 그래도 가끔 노랫말 기도를 흥얼거린다.

 "비 내리는 여름 날엔 내가내가우산이 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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