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설악산 / 박영환

추천우수 수필

by 장대명화 2011. 6. 11. 07:57

본문

 

                                                                설악산 / 박 영 환

 

 

 '설악산(雪嶽山)'은 어떤 모습이 그의 참 모습일까?

 

봄에는 순잎에 새 생명이 열리고 여름엔 질펀한 녹색의 향연이 벌어지며 가을엔 별리(別離)의 가락 속에 애잔한 단풍들의 합창이 들린다. 그러나 아무래도 설악(雪嶽)의 '雪'에 유추해보더라도 설화(雪花)의 극치 속에서 신비의 절경을 이루는 겨울 모습이 제 모습일 듯하다. 설악의 겨울, 형형색색의 기봉마다 현란한 꽃송이를 가득 담고 있는 영산(靈山)의 신비스러움, 그가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 공간의 넓이만큼이나 따뜻한 호흡이 서려 있어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곳. 대청봉 마루에서 흘러 내린 눈발이 비룡폭포를 깨우고 계조암 무릎 위에 아기 눈사람이 되어 으밀아밀 재롱을 떠는 흔들 바위. 고드름 달린 권금성 천길 벼랑에 잿빛 전설도 청올치 노끈처럼 질기게 생명을 얻는다. 한계령 설경은 숫제 속진을 거부하는 피안(彼岸)의 경지가 되어 종교처럼 엄숙하다.

 

 설악 묏골은 형형색색 기봉들이 저마다 체취를 풍기고 있다. 일진 광풍의 포효 속에 말발굽이 우렁차고, 쓰개치마 속에 얼굴 붉히는 여인네의 사뿐한 연보(蓮步), 선비의 고고한 절조가 마지막 양심이 되어 카랑카랑하게 막아서기도 하고, 문고리 꼬옥 잡고 님의 목소린가 엿듣고 있는 규중 규수의 모습,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스님의 독경소리, 함성, 희열, 쾌재 등 각양각색의 환희가 있다. 이처럼 독특한 설향(雪香)을 머금고 현기증을 느끼게 할 정도로 사람을 매료시킨다.

 

 그러나 '설악(雪嶽)'이란 이름은 과연 웅혼한 그의 기상이 연출하는 신비의 체취와 현란(絢爛)한 설향(雪香)의 의미뿐인가? 눈이 쌓이면 꽃송이만 되는 것은 아니다. 무너질 듯 힘에 겨운 모습 - 화려한 박수의 뒤꼍에서 안으로만 삭이는 고독의 상 - 도 있다. 찌들어진 눈의 잔해를 안고 질척거리는 시름도 있다. 그때 설악은 풍상에 절어 골패인 가슴이 되어, 삭풍은 한을 담아 달린다. 이제, 설향(雪香)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고 오히려 설원(雪怨)을 안은 망부석이나 소박 맞은 여인의 모습이 된다. 누구도 쓸어낼 수 없는 한(恨)은 납덩이가 되어 업보(業報)로 가슴을 누른다. 이때는 비극을 안은 '雪惡'이 된다.

 

 울산바위의 전설만 해도 비극의 단면 중 하나다. 어미닭처럼 큰 둥지를 틀고 사랑이 겹으로 싸여 사위를 달래는 그에게 누가 돌을 던지는가? 왜 모두 그렇게 크게 웃으며 즐기는가? 봉우리도 그러하고 바다도 그러하고 사람도 그러하다. 몹쓸 장난이다. 악의에 찬 시기이다. 뭐라고? 금강산 일만 이천봉 시험에 불합격하여 영겁의 세월동안 울분을 달래지 못해 눈물 마를 날이 없다고? 하필이면 울산이 고향이냐? 울분을 참지 못해 울상을 지었다고 울산 바위인가?

 

 송강(松江)도 설악을 너무 푸대접을 했다. 관동별곡의 그 많은 구절 속에 한마디만 끼워 주면 어때. 그 인색함이라니. 산 따라 물 따라 관동의 풍물 - 명승지는 물론 주변의 호수, 심지어 작은 정자 하나까지.- 을 어루고 달래며 알뜰히도 다듬고 사랑하며 감회를 노래하면서도 이 설악(雪嶽)만은 이렇게 무시해도 괜찮은 것인가? 아무리 금강(金剛)에 홀려 취흥이 가시지 않아도, 잠시 말을 세워 지필묵(紙筆墨)은 찾지 않아도 박주일배(薄酒一杯)에 이름 한번 불러주었으면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을 걸.

 

 비단 자존심이 상한 일은 울산바위의 전설이나 송강의 푸대접만 아니다. 곳곳에 생채기를 안고 있다. 나목(裸木)처럼 외로운 산. 그러나 설악(雪嶽)은 이런 저런 사연을 원망하지 않고 오늘도 바람막이임을 자임하며, 한없이 덮고 덮인다.

 

설악(雪嶽)엔, 오늘도 쉬지 않고 눈이 와서 쌓인다. 번뇌가 서려 있는 그 어느 것도 모두 덮어버린다. 전쟁에 산화한 젊은 영혼이나 자신의 발등을 찍고 있는 쇠고리 철조망, 총성에 귀가 먹은 들짐승, 풍상에 할퀸 돌무덤, 이름 없는 풀뿌리까지. 좀 비약이 될지 모르지만 연전에 전직 대통령이 설악의 백담사를 찾았던 것도 우연이 아닌 듯. 아무튼 스스로도 감추고 남도 숨겨주는 자비(慈悲)의 산. 자신을 덮는 것은 겸손이며 남을 덮어주는 것은 관용이며 사랑이다.

 

 이처럼 여러 가지 모습 - 승경(勝景)의 신비 속에 현란(絢爛)하던 영산(靈山)의 체취, 진실이 왜곡되어 안으로 삭이며 고통을 앓는 업보(業報), 덮고 덮어 주는 승화된 자비.

 

 어느 것이 그의 참 모습일까? 소동파(蘇東坡)는 불식여산진면목(不識廬山眞面目) - 여산은 보는 장소에 따라 달리 보이므로 여산의 참모습을 알지 못하겠다.- 이라고 했던가? 참 모습을 모르는 것이 어찌 여산(廬山)뿐이겠는가?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