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최승희 / 정 명 희
그것은 나에게 큰 기쁨이었다. 나이들어 예전에 읽었던 것들을 다시 읽게 되면서 얻은 소득이었다. 1968년 인본인 최초의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다야쓰나리(1899~1972) 전집에서 조선의 무희 최승희를 발견한 것이다.
망국의 슬픔을 이겨 내고 춤으로 승화한 정신적 강인함과 환상적인 여체미를 높이 평가한 가와바다는, 민족의 전통에 근거한 조선의 넔이며 얼이며 자신이 찾고자 한 예술 표상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고 극찬한다.
그녀의 춤은 크고 강하며 극적인 것으로, 조선의 애수와 통한이 숨어 있어 동양 유일의 무희라는 찬사를 얻고 구라파 밑 남아메리카까지 진출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가와바다의 소설 [무희] 전집 최승희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그것은 1935년 10월이었지, 어머니는 크게 놀란거야, 조선민족의 일본을 향한 분노가 말없는 무용 춤사위에서 전해지는 듯 격렬한 동작과 그 표정과 눈빛은 너무 섬뜻해서 무서울 정도였지요.
최승희는 한 때 만주땅에 도피했던 것 같다. 그녀는 북조선의 국회의원으로 평양 무용학교에서 후진양성을 하고 있다고 했지만...., 이것은 과거에 본 최승희 무용에 대한 감동들이다. 1950년 6 . 25 후 그녀의 안부를 걱정하는 글이지만 작품 속에 이와 같은 부분이 삽입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작가 가와바다의 최승희에 대한 관심과 애착은 대단한 것을 알 수 있다.
가와바다의 무용 예술관은 곧 그의 문학으로 이어지고, 무용의 모티브는 생명과 육체의 아름다움과 성이 테마가 되어 그의 문학의 미적세계에 용해 되어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창작의 비밀이다. 가와바다 문학에 있어서의 무용의 세계를 살펴보면,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설국]의 남자 주인공 시마무라의 서양무용 취미를 들 수 있다. 작가는 중학교 때부터 춤꾼 여자에게 접근하였고, 고교 때는 동경의 아사쿠사오페라단 무희에 관심을 가지다가 1929년 아사쿠사홍사단의 연재는 무용과의 인연이 큰 계기가 된다. 특히 우메소노 다츠코 와의 관계 등....
이렇듯 가와바다문학에 무용물은 간과할 수 없고, 무용의 세계는 그의 문학의 저변을 흐르는 지류라 할 수 있다. 무용은 그의 문학을 보다 풍요롭게 해준 요인이 된 것이다. 그는 무용을 주로 생명과 미의 상징으로 보고 있고, 특히 여체미는 무용의 극치로 정화나 구현의 힘과 성적인 마력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무희의 달력] [무희] [깊은 바다] [금수] [천마리 학]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아마도 예술성 완성이라는 면에서 무용을 택한 것 같다. 자기 완전 연소 결과를 몸으로 표현하는 무용은 그의 많은 작품에 등장한다. 그 모델로 여류 신진 무용가 중에서 일본 제일은 최승희라 했다. 그녀의 무용을 향한 열의와 정신력과 여체미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가와바다의 여체 탐닉은 여성상과 아울러 어린 날 어머니와의 사별로 모태를 향한 가없는 동경과 기대와 숭배 등을 작품 속에 구현한 결과일 것이다. 자신이 문단에 추천한 메가톤급 작가 미사마 유키오(1925~1970)의 할복자살의 충격으로 가와바다도 그 다음 해에 가스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해마다 문학 단체들의 일본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코스가 작가의 고향이나 문학관, 작품의 무대이다. 나는 이번에 그의 문학전집에서 최승희를 발견하고 얼마나 흥분했는지 모른다. 비운으로 끝난 세계적인 조선의 무희 최승희는 노벨문학상을 탄 가와바다의 소설 속에서 그 아름다운 여체와 강렬한 정신과 혼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아! 세계적인 무희 최승희는 이념이라는 사슬에 묶여 육체는 사라졌지만 그의 혼은 가와바다 문학 속에 살아남은 것이다. 이래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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