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수필

동강할미꽃 / 국경을 건너온 미소 ㅡ변 종 호

장대명화 2026. 3. 27. 10:39

                              동강할미꽃 / 변 종 호

 

전생의 업이 컸을까. 애당초 편안한 팔자가 아니었다. 깎아지른 흙 한 줌 없는 석회암 절벽의 바위틈에서 평생 견뎌야 할 운명이다. 그나마 가엾게 여긴 동강이 물안개를 내려주고 그 눈물로 연명한다는 이 꽃 앞에 서면 인간의 안온한 삶이 부끄러워진다. 암팡진 꽃망울은 세속의 원망 대신 깨달음을 구하는 굳은 수행자의 모습이다.

 

강원도 태백의 검룡소에서 솟구친 샘은 수만 년을 쉬지 않고 낮은 곳으로 임했다. 굽이치며 돌아가고, 여울을 흐르다 지치면 소에서 잠시 숨을 고르다 제 길로 흘러간다. 그 물줄기로 빚어낸 동강은 유난히 맑고 눈물도 많다. 전쟁의 포성과 막장의 붕괴로 돌아오지 못한 가장의 슬픈 사연을 보듬으며 흘러온 강. 그러니 가뭄에 타들어 가는 절벽 위의 가련한 생명을 어찌 외면하랴.

 

동강의 품속에서만 숨 쉬는 세계 유일의 한국 특산종 동강할미꽃이다. 석회암벽에 자리 잡고, 흑갈색의 굵은 뿌리로 수분을 움켜쥔다. 줄기를 낮추고 잎자루를 길게 뽑아 올리는 절제의 미학을 발휘한다. 3월 하순에서 4월 초, 밤낮의 기온차가 큰 곳의 동강의 절벽 위로 흰 털이 보송한 꽃대는 코트를 걸치고 모습을 드러낸다. 생존은 곧 절제임을 깨달은 작은 식물은 온몸으로 증언한다.

 

화창한 봄날, 꽃잎을 활짝 연 동강할미꽃과 마주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자식의 손을 잡고 눈물 글썽이던 어머니의 얼굴이 겹쳤다. 짙은 분홍과 연분홍이 포개진 색감은 포근했으나, 그 속살에는 혹독한 바람을 견딘 결기가 스며있었다. 묘지에서 한껏 고개 숙인 할미꽃의 공손함과는 전혀 다른 기품의 암팡진 짧은 꽃대는 고단한 삶이 길러준 강인함의 표식이었다.

 

카메라를 들고도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예전보다 줄어든 부쩍 줄어든 개체 수, 밤잠 거르며 밀반출을 막아낸 주민들의 고단한 노고가 떠올랐다. 인간은 소중한 것을 곁에 두고 싶어 하지만, 몽돌도 들꽃도 제 자리가 있다. 동강할미꽃을 검색하면 넘쳐나는 판매 광고를 보며, 거친 절벽과 물안개를 떠난 이 꽃이 과연 제 빛을 낼 수 있을지 묻게 된다. 아름다움은 소유가 아니라 자리에서 비롯됨을 우리는 왜 자주 잊는지.

 

1997년 사진작가 김정명 씨의 발견으로 이름을 얻었지만, 그 이전에도 이 꽃은 무쇠목숨으로 피고 졌었다. 꽃대의 길이와 잎의 수마저 조절하는 뿌리의 엄정한 통제는 오랜 세월이 빚은 지혜다. 한 방울 물을 아껴 쓰는 생의 전략, 그것은 곧 절벽 위에서 터득한 겸허의 철학이다.

 

찾아가야만 볼 수 있는 고고하고 청아하지만, 고단한 생의 내력을 알고 나면 속울음이 나는 동강할미꽃, 동강의 눈물로 천년만년 피고 지기를, 인간의 욕심이 아니라 동강의 눈물로 기억되기를.

 

                                  국경을 건너온 미소

 

진심 어린 선행에 감동한 것이 언제였던가. 갈수록 개인주의는 깊어지고, 타인의 일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세상이다. 만약 내게 같은 상황이 주어졌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고개가 절로 저어진다. 최소한의 예의는 지킬지언정, 그 이상의 마음을 내어놓는 일은 쉽지 않을 것 같다.

 

사단법인 한국예총 청주지회와 일본 오카야마 문화예술논단이 업무협약을 맺고 한일 문화예술 교류차 오카야마를 방문했다. 공항에서 처음 만났고, 나흘 동안 우리 일행을 정성껏 돌보던 한 사람에게서 깊은 울림을 받았다.

 

시라가기 카즈코 상. 오십 대 후반의 일본 여성이다. 160센티 남짓에 갸름한 얼굴, 짧은 커트 머리에 엷은 화장을 했고 옷차림은 수수하지만 단정했다. 살짝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인 채 밝게 웃던 미소는 더없이 부드러웠다. 비록 목소리는 여리고 가늘었지만, 그 속에는 따뜻한 진심이 묻어났다. 누군가 부르면 곧장 하고 대답하며 달려왔다. 우리 일행은 저 분은 세 걸음 이상이면 뛴다.”라며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무엇을 부탁하든 자신이 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망설임이 없었다. 그녀의 성실함과 친절함은 타고난 천성이자 오랜 습관처럼 자연스러웠다.

 

퇴직 전, 일 합자회사에서 22년간 근무하며 일본 여러 도시를 스무 차례 넘게 다녔다. 1990년대 초부터 일본의 제조 설비를 도입·검수하는 일을 맡아 그들의 생활과 의식 구조에 어느 정도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오카야마 방문은 또 다른 충격과 감동으로 다가왔다. 인천공항에서 70분이면 닿는 인구 15만 명의 소도시에서 나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진심이라는 단어를 새삼 떠올렸다.

 

한국무용을 전공한 조영희 단장이 일본에서 한국 전통문화를 전하기 위해 세운 단체가 오카야마예술논단이다. 그런 단체가 회원 천여 명이 넘는 ()청주예총과 예술로 교류하게 된 것은 큰 영광이었으리라.

 

시라가기 카즈코 상은 한국의 인기 드라마를 통해 한국을 사랑하게 되었고 이후 십여 년 동안 독학으로 한국어를 익혔다고 했다. 발음에는 일본식 억양이 남아 있었지만 단어의 선택과 문장 구사는 놀라울 만큼 정제되어 있었다. 조영희 단장의 중앙대학교 국악대학원 석사 논문을 한글 원문 그대로 일본어로 번역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정확히 짚어야 하는 논문 번역을 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의 노력과 성실함이 짐작되었다.

 

체류 기간 동안 그녀의 진지함과 한국어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행사 때마다 통역을 맡은 그녀는 회사원이자 가정주부로 바쁜 일상에서도 나흘 동안 차량 운행과 통역을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한 봉사가 아니었다. 사람에 대한 존중이었고, 예술에 대한 애정이었으며, 마음을 다해 건네는 환대였다.

 

그녀는 조부모와 부모, 두 오빠 아래서 막내딸로 태어났다. 맞벌이하던 부모를 대신해 조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고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결혼 후에도 고향 오카야마를 떠난 적 없는 토박이였다. 그러나 그녀의 가족 이야기를 듣는 동안 마음 한편이 저릿해졌다. 자녀 없이 남편과 둘이 산다는 말 때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환한 미소 뒤로 잠시 스쳐 지나가던 그늘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사실 누구나 말 못 할 사연 하나쯤은 품고 살아가지 않던가.

 

귀국 전날, 한국인 단원이 운영하는 작은 스낵바에서의 만찬 자리에도 그녀는 늦은 시간까지 함께하며 소통을 이어갔다. 단 한 번도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해맑은 웃음 속에는 서로 다른 두 나라의 마음을 잇는 따뜻한 다리가 놓여 있었다. 해방 이후 8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일본이라는 단어 앞에서 마음이 경직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녀를 보며 우리의 오래된 편견이 조금씩 녹아내리길 바라는 마음도 생겼다.

 

34일의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날, 우리 일행을 태운 여섯 대의 차량이 공항으로 들어섰다. ‘이별은 짧아야 한다.’라는 말이 무색하게 작별의 순간은 눈물로 번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본 단원들의 눈가가 젖었고, 그녀는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연출이 아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진심이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해 휴대폰을 켜자 며칠간 단절됐던 소식들이 요란한 알림으로 쏟아졌다. 그중 일본에서 보내온 영상을 보고 나는 다시 놀랐다. 그녀와 일행은 귀가하지 않고 장마철의 무더운 날씨 속에서 오카야마 공항 철제 펜스 밖에 서서 두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멀어지는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들며 안녕히 가세요.”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 영상을 보는 순간 눈시울이 다시 뜨거워졌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진정한 교류란 협약서의 서명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마음을 향해 열릴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비행기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던 그녀의 모습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진심은 소리 없이 건너와 사람의 마음 한가운데 조용히 머문다. 오카야마의 여름 하늘 아래서 오래된 진실 하나를 다시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