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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홀름에는 애인이 있다 / 이 용 옥

장대명화 2026. 3. 19. 23:17

                             스톡홀름에는 애인이 있다 / 이 용 옥

 

Jongga 11, str 163 22, kisStockholm, Stockholm, Sweden JinSub Pack

낡은 여행가방 속주머니에서 빛바랜 명함이 나왔다. 스웨덴? 스톡홀름? 이게 뭐라고 이렇게 깊은 곳에 꽁꽁 숨겨 놨을까? 낯선 글자들을 향해 물음표를 던지던 그녀는 살포시 웃음을 흘렸다. 아하, 그….

 

스톡홀름, 쪽빛 바다를 배경으로 내려앉은 도시는 아무렇게나 셔터를 눌러도 유명 작가의 예술사진 같았다. 날씨는 청명했고 햇살 받은 가로수의 연록빛 이파리들은 유리알처럼 반짝였다. 그해 5월, 그녀는 그 도시의 여행자였다. 직장생활 20여 년 만에 얻은 안식년을 그냥 흘려보낼 수 없다는 마음에 홀로 나선 여행. 다행히 아홉 명의 여성 팀을 만나 합류하여 그럭저럭 재미있는 여행을 하고 있었다.

 

바사 박물관을 돌아보고 한식당에 들러 식사를 마쳐갈 무렵, 커피 쟁반이 그들 식탁으로 배달되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그것을 마셔야 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식당 주인이라는 남자가 다가왔다. 그는 그녀의 일행 중에 본인의 이상형 여성이 있어 커피 대접을 하고 싶다고 했다. 여자들은 각자 ‘이상형 여성’으로 낙점되길 바라며 들뜬 마음으로 커피를 마셨다. 그런데 그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 도시에서 주무신다면 한 번 더 뵐 수 있을까요?”

 

당황하여 대답도 못하는 그녀에게 꼭 한 번 연락을 달라는 말과 함께 남자가 쥐여줬던 것이 그 명함이었다. 잊었던 기억이 살아나자 그녀는 살짝 가슴이 설렜다.

 

손거울을 찾아들었다. 그날 밥집 앞에 피었던 화사한 튤립꽃을 떠올리며 거울 속에 얼굴을 디밀었다. 그런데, 낯선 여인이 그녀를 쏘아보고 있다. 쳐져 내린 눈 밑 주름, 푸석한 머리, 윤기 잃은 피부….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손거울을 내려놓았다. 튤립은 고사하고 삭아가는 자신의 빛바랜 모습에 맥이 풀린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데이트라도 한 번 해볼걸, 부질없이 날려버린 기회가 새삼 아쉽기만 하다.

 

요즘 들어 그녀는 세월이 짧다는 생각을 부쩍 한다. 삶이 덧없다고도 느낀다. 이 짧고도 덧없는 인생에서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뭘 해볼까 생각한 적이 있다. 공부? 출세? 경제적 성공? 어이없게도 그녀가 선택한 것은 사랑이었다. 영화 같은 사랑.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 운명처럼 벗어날 수 없는 사랑, 비록 해피엔딩으로 끝내진 못할지라도 가슴 시린 그리움으로 남는 사랑. 든든한 남편에 다 자란 아들딸까지 둔 자신이 이런 어이없는 망상에 빠져있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헛웃음이 난다.

 

총량의 법칙이라 했던가. 그녀는 자신에게 로맨스 총량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라고 뭐 젊은 날에 대시해왔던 남자들이 없었을까. 대학 때 등교 시간마다 역에 나타나 가방 들어주겠다던 선배도 있었고, 학교까지 따라오며 연락처 좀 가르쳐 달라고 애걸하던 남학생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들을 외면했다.

 

어릴 적 고향 마을이 발칵 뒤집혔던 일이 있었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당고모가 애인을 달고 나타난 것이다. 연애란 자고로 부모의 검증 하에 결혼을 약속하고 나서야 가능했던 그녀 문중 풍토에서 그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함께 왔던 총각은 말 한마디 못하고 쫓겨 갔고 당고모는 죄인처럼 방안에 갇혀 온갖 박해를 견뎌야 했다. 그 강렬한 어깨너머 조기교육이 이 세상에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될 금기어 ‘연애’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그녀는 충실하게 ‘연애금지’를 실천했다. 그러기 위해 몇 가지 행동 강령이 필요했는데 첫째, 연애적 상황을 만들지 말 것, 둘째, 마음에 든 남자가 있다면 가차 없이 지워 버릴 것, 셋째, 눈치 없이 돌진하는 인간이 있다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돌려 세울 것…. 다행히 빼어난 미모나 특별한 매력의 소유자가 아니었던 그녀는 두 번째 강령을 지켜내는 선에서 사고 없이 청춘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부질없는 감정에 빠지다니,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천명이 지나면 그녀는 희로애락이나 오욕칠정에 거리를 둔 원숙한 인간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마치 미당의 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국화처럼. 그러나 젊음의 뒤안길이란 의무를 다하지 않은 그녀 같은 사람에게 돌아와 거울 앞에 설 권리는 없는 것인가. 이 나이에 요망하게도 낡은 명함 한 장에 흔들리다니….

 

그녀는 지난 모임에서 있었던 친구들과의 수다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비 오는 날 젊은 남자가 집 근처까지 따라와 참으로 곤혹스러웠다는 Y의 말에 이어, 퇴근길에 어떤 정신 나간 중년 신사로부터 사귀어보자는 프러포즈를 받았다는 L의 이야기까지. 겉은 ‘참으로 요상한 세상’을 성토하지만 속은 ‘나 아직 살아있어’란 허세가 실린 말들이었다. 부질없는 대화를 헛웃음으로 마무리했지만 그녀들은 알고 있었다. 놓쳐버린 것, 잃어버린 것들로 헛헛한 마음이 그렇게 드높은 웃음소리를 자아냈다는 것을. 허탈감과 아쉬움이 공기방울처럼 그녀들 사이를 맴돌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빛바랜 명함을 만지작거리다 여행가방 안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치워버리려던 낡은 여행가방도 도루 선반 위로 올렸다. 비밀이 없는 여자는 재산이 없는 것처럼 가난하다고 했던가. 좀 늦은 감은 있지만 나름의 비밀을 간직하려는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가난뱅이가 아니다.

 

그녀,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