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걸어서 바다에 간다 / 성전 스님
나는 하루 두 번 바다에 간다. 새벽 예불을 마치고 어두운 새벽길을 걸어 바다에 가고 다시 저녁 예불을 마치고 저문 산길 걸어 바다에 간다. 절에서 바다까지 소요 시간은 40분, 왕복 1시간 30분 정도가 걸린다. 산길 돌아 마을을 지나 다시 황금 들녘을 지나 바다에 이른다. 새벽에는 별을 이고 가고 저녁에는 별을 거느리고 절에 돌아온다.
길을 걸으며 나는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만약 걸을 수 없다면 이 지척의 바다는 너무 먼 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지척에 있으나 가서 만날 수 없다면 그것은 곧 절망이 아니겠는가. 내게 가장 큰 슬픔은 아마 걸을 수 없게 되는 순간일 것이다. 나이가 들고 병들어 걸을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얼마나 슬픈 일일까. 손에 잡힐 것만 같은 저 풍경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봐야만 한다면 그것은 서글픈 일임에 틀림없다.
내게 소원 하나가 있다면 죽는 그 순간까지 걷다가 산사로 돌아가는 산길에서 죽는 것이다. 늙어 병들어 자리보전하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길을 걷다가 산사로 돌아가는 산길에서 죽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멋진 일일까. 그것은 운수납자雲水衲子라는 그 이름에도 어울릴 것만 같다. 구름처럼 물처럼 다 떨어진 옷 하나 걸치고 걷다 죽어야겠다는 치기 하나 없다면 우리 출가자들의 삶의 멋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요즘은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를 실감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나의 걷기도 꽤나 이력이 붙었다. 벌써 햇수로 3년이 다 되어 간다. 처음에는 그냥 운동 삼아 걸었다. 살도 좀 빼고 건강도 좀 살펴야겠다는 생각에서 시작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 나의 바다까지 걷기는 건강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는 걷는 것이 즐거움이고 그것이 순례의 의미까지 지니게 되었다. 걸으면 나는 맑아지고 경건해지기 때문이다. 걸음은 삶의 오만을 버리는 기도이고, 번뇌를 지우는 죽비이고, 평화를 건네는 풍경소리가 된다.
길 위에서 나는 또 하나의 사실을 깨닫는다. 걸으며 내가 만나는 모든 것들이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다. 나무나 새나 풀벌레, 그리고 하늘의 별과 바람이 모두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가슴으로 느끼고 있다. 그것들은 마치 식구처럼 나의 일상이 되고, 또 나의 마음에 식구처럼 자리하고 있다. 만약 걸어서 이 세상을 주유한다면 나는 감히 세상의 모든 존재를 나의 식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걷는다는 것은 다만 다리로 하는 공간 이동을 뜻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닫힌 마음에서 열린 마음으로의 이동을 의미하기도 한다. 걸으면서 풍경은 대상이 아니라 마음이 된다. 빠른 속도로 지나치면 풍경은 사라지는 대상이 되지만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면 풍경은 마치 꽃송이처럼 가슴에 내려와 새롭게 피어나는 것을 실감할 수가 있다.
산굽이를 돌 때마다 바다는 점점 넓게 드러난다. 바다가 길을 품었는지 아니면 길이 바다를 품었는지 이 길 위에서는 알 수가 없게 된다. 크고 작음에 대한 구별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고정되어 바라보면 바다는 넓은 것이고 길은 좁은 것이 되지만 길을 걸으며 바라보면 바다도 길도 더 이상 넓고 좁음을 드러내지 않게 된다. 바다로 내려가는 산길에서 나는 날마다 분별을 떠나는 자유를 만난다. 그러나 내 삶은 걷기를 멈추면 다시 분별에 속박당한다.
산길을 내려와 마을을 지나 더 낮은 곳으로 가야 바다를 만날 수가 있다. 바다는 이렇게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한다. 그러고 보면 나는 날마다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을 향해 걸어오는 셈이다. 바다는 스스로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해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스스로 깊어져 넘치지 않는다. 강이 제행諸行의 무상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면 바다는 열반적정涅槃寂靜의 모습을 내보인다. 바다에 서면 가슴이 트이는 시원함을 느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모든 물길이 이름을 버려 하나가 되는 곳에서 더 이상 벽은 없기 때문이다. 삶이 괴롭고 답답한 것은 수많은 이름을 가진 서로 다른 내가 서로 부딪히기 때문 아닌가.
어두운 밤바다에 별이 돋듯 나는 바다에서 진리와 진실을 향해 감았던 눈을 뜬다. 설혹 진리가 저 밤하늘의 별처럼 아득히 먼 것일지라도 그 별빛을 바라보기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설혹 진실이 저 바닷속처럼 깊어 이르기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물결 소리로 자신을 씻는 일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삶은 그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다를 뒤로하고 산사로 걸어서 돌아오는 길에 별빛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빛난다.
이사 가는 날 / 성전 스님
숲이 어느새 녹음으로 물들어 간다. 연둣빛 숲의 여린 그 빛을 물들어가는 녹음이 가리고 있다. 봄인가 싶었는데 숲은 어느덧 이른 여름을 말하고 있다. 숲은 무상함을 이렇게 색色으로 말한다. 하지만 밉지가 않다. 연둣빛 숲도, 녹음이 짙어져 가는 숲도 내게는 모두 정답고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것 하나에 고정되어 있으면 변화가 마땅치 않은 것이 되지만 그 어디에도 고정되어 있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모두 좋은 것이 된다. 그래서 분별심分別心을 버리고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 된다고 우리 불가佛家에서는 말한다.
변화는 사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질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원히 젊기를 바라고, 부자이기를 바라고, 건강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것은 가능한 것이 아니다. 불가능한 것을 향해 가능해야 한다고 집착하는 것은 탐욕이다. 탐욕은 우리를 한 지점에 멈추게 한다. 그 순간 우리는 자유를 잃게 된다.
탐욕이 많은 사람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는 한 대상에 집착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가치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하나도 얻지 못한 채 전부를 잃는 것이 탐욕의 셈법이다. 이 막대한 손실의 셈법을 탐욕이 많은 사람은 끝내 알지 못한다. 좋은 사람들과, 사소한 기쁨과 행복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이 그 셈법의 결과라는 것을.
이제 나는 또 이사를 간다. 이삿짐을 싸면서 나는 탐욕에 대해 생각했다. 물건 하나를 쌀 때마다 내 마음의 탐욕 숫자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100번이 더 지나도 그 번호는 끝나지 않았다. 급기야 내 마음에 탐욕이 이렇게 많았나 하고 나도 놀랄 지경이 되었다.
안 되겠다 싶어 짐을 하나씩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하나씩 버릴 때마다 숫자도 하나씩 줄여 나갔다. 얼마나 숫자를 줄여 나갈 수 있었을까. 많지 않았다. 하나를 버릴 때마다 머뭇거리게 되었고, 그러다 마침내 버리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이것도 버리면 나중에 필요할지 모르는데 하는 생각이 손을 잡아 묶었다. 탐욕의 끈질긴 유혹이었다.
선방禪房을 다닐 때 나의 짐은 그냥 걸망 하나를 조금 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는 정말 짐이 없었다. 그리고 짐이 있어도 어디 둘 곳이 없었다. 입고 있는 옷과 걸망에 든 옷가지와 비품 정도가 전부였다. 필요하면 그때그때 샀고 남들이 입던 옷가지도 기쁘게 얻어 입고는 했다. 삶이 참 단출했던 시절이었다. 그때 느낀 것이 있다. 소유가 적으면 마음이 참 가벼워진다는 것이었다. 그때 내 마음은 내일에 대한 걱정이 없었다. 내일은 그냥 내일 가서 만나는 일뿐이었다. 시간의 하중이 없었으므로 사는 것이 편하고 자유로웠다.
이후 몇 번 짐을 샀다. 그때마다 자꾸만 늘어나는 짐과 만나게 되었다. 짐을 쌀 때마다 늘어나는 짐이 내 탐욕의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많은 짐이 과연 내게 꼭 필요한 것일까." 하고 물으면 내 안의 나는 "그렇다"고 답한다. 하지만 더 깊은 곳의 나는 "필요치 않으니 버리라"고 한다. 이렇게 이삿짐을 쌀 때마다 '탐욕을 쫓으려는 나'와 '탐욕을 벌리려는 나'사이에서 나는 갈등한다. 이번에 이삿짐을 싸면서도 이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어느 나를 따라야 하는가.
이제 나는 이사에 대해서 내 나름의 정의가 생겼다. 이사는 단순한 공간 이동이 아니라 마음의 이동이라는 것이다. 마음이 옮겨서 내 안에 있는 '탐욕을 버리려는 나'를 만나는 일이라고 나는 이사를 정의하게 되었다. 이사를 할 때마다 갈등을 겪지만 그것 역시 좋은 수행의 계기인 셈이다. 자꾸 이사를 다니다 보면 버리는 데 익숙해질 것이고, 그러면 다시 탐욕이 사라진 자리에서 삶의 자유와 기쁨을 만나게 될 것이다.
숲이 신록에서 녹음으로 이동하듯이 우리 역시 끊임없이 이동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질이다. 그리고 이동은 삶에서 다시 죽음으로 이어진다. 나는 삶에서 죽음으로 이사 가는 날을 자주 생각해 본다. 그때 나의 모습은 어떨까. 의연할까 아니면 두려워할까. 두려움에 떨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온다. 탐욕의 무게만큼 두려움이 따라온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탐욕을 버리지 못한다면 삶은 볼품없는 졸작拙作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제 나는 8년 동안 머물던 용문사를 떠나 이사를 간다. 그 이사가 단순한 공간 이동에 그친다면 탐욕을 버릴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마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셈이다. 이사를 가면서 내 안에 뿌리 깊게 자리한 탐욕 하나를 버려야 진정한 이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작은 암자로 가니 탐욕 크기도 작아져야 한다. 그것이 작은 암자로 가는 자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암자로 오르는 길, 새소리가 유난히 투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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