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늄 / 유 진 서 - 제12회 청송객주문학대전 (금상)
제라늄이라 쓰고, 페라고늄(Pelargonium)이라고 읽는다. 이름이 달라지면 세상이 조금 달라 보이는 것처럼, 꽃도 나도 언어 속에서 다른 빛을 띤다. 그러나 향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다. 불리는 방식이 달라도, 햇살 아래 피어나는 생의 결은 같다. 제라늄이라 부르든, 페라고늄이라 부르든. 결국 흩어진 향과 빛 속에서 자신을 지켜 나간다.
엄마는 제라늄을 좋아하셨다. 장미나 국화를 키우면 좋을 텐데 왜 하필 제라늄일까 의아해했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곱고 정연해야 하기에. 그래서 꽃이란 고요하거나 화려해야 한다고 믿었다. 제라늄은 국화의 고요도 없고, 장미의 화려함도 없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고집스럽게 자기 빛을 내뿜는다. 늘 그 빛이 불편했다. 엄마는 그런 제라늄을 ‘불꽃’이라고 부르며 미소 짓곤 했다. 햇살을 머금은 붉은 꽃잎을 바라보면, 어린 날 창가에 앉아있던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바람에 흔들리던 초록 잎사귀는 엄마의 손길처럼 따뜻했다. 눈길을 끌지 않아도, 그 작은 잎과 향기 속에 묵묵한 온기가 깃들어 있었다. 차라리 화려하지 않기에 오래 바라보게 되고, 조용하기에 더 깊이 머물게 되는 꽃이었다.
제라늄은 쓴 향을 지녔다. 그것은 마치 풀숲을 헤친 듯하다. 장미의 달콤함과 허브의 서늘함 사이,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에 머무는 냄새다. 오래된 서랍 같다. 그 특유의 냄새는 겉으로 눈길을 끌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면을 지키기 위한 방패다. 속으로 울어내는 향으로 세상을 견뎌내는 것이다. 그 냄새는 어린 시절 부엌을 떠올리게 한다. 약탕기에서 피어오르던 쓴 약 냄새와 함께, 그 앞에 앉아있던 엄마의 굽은 등이 겹친다. 남들은 제라늄에서 밝고 화사한 빛을 본다지만, 내게 제라늄은 늘 고단한 삶을 감내하던 엄마의 그림자와 함께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그 쓴 향 속에서 오히려 더 깊은 사랑과 따스함을 배운다.
며칠 전, 길을 걷다 문뜩 발길이 멈췄다. 투박한 돌확에 담긴 제라늄이 눈길을 당겼기 때문이다. 햇살에 투명하게 빛나는 꽃송이,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는 마치 손짓으로 나를 부르는 듯했다. 그때 마침 주인이 나와서 말을 걸었다.
“한 포기, 드릴까요?”
주인은 커다란 봉지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흰 제라늄은 보기 힘들어요.”
주인의 목소리에 묘한 자부심이 섞였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반대편 구석에서 눈부신 흰빛이 번져왔다. 꽃잎 하나하나가 부드러운 눈송이처럼 쌓여 있는 듯한 제라늄이었다.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꽃들은 사뿐히 춤을 추고, 공기 속에 은은한 향을 흩뿌렸다. 주인의 자랑이 아니더라도, 그 풍성함은 스스로 뽐내듯 존재하고 있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제라늄을 한 아름 안고 왔다. 돌아오는 길에서 만난 지인에게 몇 포기 나눠주었다.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제라늄은 홀로 빛나는 꽃이다. 다른 꽃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고 스스로 자리를 지킨다. 아름다움이란 반드시 타인과 어울려야 빛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는 고요한 힘 속에서도 존재한다. 봄에도 피우고, 여름의 열기에도 꺾이지 않고, 가을과 겨울에도 잎은 질기게 푸르렀다. 그것은 화려하지 않았으나 꺼지지 않았다. 엄마는 그 생명력을 사랑했다. 삶은 찬란하지만 않았고 견디고 버티는 것이었다. 제라늄은 그 진실을 보여주었다.
엄마는 잎을 따서 서랍에 넣어두곤 하셨다. 옷에 스며든 향은 늘 새로웠고, 마치 햇볕에 마른 바람처럼 깨끗했다. 서랍을 열 때마다 번지는 잔향은 단순한 향기가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사랑의 흔적이었다. 어릴 적에는 그 향이 왜 옷마다 스며 있는지 몰랐다. 다만 서랍을 열면 밀려오던 은근한 기운 속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가족을 위해 반복되던 손길, 바람에 말린 빨래의 따뜻한 촉감, 그리고 잎을 따서 넣어두던 마음까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것이 사랑의 다른 이름임을 알게 되었다. 제라늄 향은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게 스며들어, 지금도 오래된 옷장 속에서 조용히 엄마를 불러낸다.
집에 와서 제라늄을 심었다. 흙 속에 뿌리내리는 모습을 보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섬세함을 느꼈다. 잎사귀 하나, 꽃잎 하나하나 속삭이듯 내 마음에 다가왔다. 작은 화분 속 세계가 하루를 비추고 있다. 붉게 핀 꽃송이마다 엄마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주름진 손으로 흙을 다지던 모습, 꽃을 바라보며 낮게 속삭이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엄마의 손길이 내 곁을 스친다. 그 손길은 부드럽고 따뜻했지만, 동시에 단단한 생의 힘을 품고 다가왔다.
그랬다. 그것은 엄마의 간절한 기도였다. 살아 있다는 증거를 세상에 남기려는. 제라늄은 물을 아껴야 오래 산다. 너무 많은 물은 뿌리를 썩게 한다. 사랑도, 기억도 마찬가지다. 너무 붙잡으면 상하고, 적당한 거리를 둘 때 오히려 오래 머문다. 화분에 물을 주며 엄마의 시간을 떠올린다. 그리움은 시들지 않는다. 다만 형태를 바꿔 내 안에서 다른 꽃으로 피어날 뿐이다.
다시 제라늄을 바라본다. 마음이 고요해진다. 이름이 달라져도 본질은 변하지 않듯 엄마의 마음도 언제나 한결같았다. 힘든 날들도 많았지만, 가족을 지켜내려는 노력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꽃잎은 떨어져도 향은 오래 남듯, 엄마의 시간도 내 안에서 오래 숨 쉬고 있다. 조용히 물 한 컵을 건넨다.
붉은녹 / 신 정 애 - 제12회 청송객주문학대전 (은상)
귀환의 문장을 본다. 붉음은 거역할 수 없는 어명과도 같은 단호함이다. 광택을 잃은 것들의 반란은 귀환의 문장에 서서히 진압된다. 들리지 않는 소리가 스며 있는 오래된 쇠락의 시간을 목도 한다.
막다른 골목 끝에서 두 번째 집. 페인트가 벗겨져 군데군데 녹슨 자국이 얼룩처럼 번진 대문이 주인의 오랜 부재를 말해준다. 여러 번 덧칠한 페인트는 감자껍질처럼 일어나 바스러진다. 어스름 해가 질 무렵이면 취객의 발길에 영문도 모르고 멍들었던 대문이다.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빈집은 폐허처럼 허물어졌다. 철문을 밀고 들어서니 혀 굽은 취객의 황성옛터가 기억 속에 가물거린다.
녹슨 철 대문에서 고난의 역사를 본다. 세상사 뜻대로 되지 않음을 한탄하며 거나하게 취한 아버지의 거친 발길을 묵묵하게 견디어 내던 시간이 있다. 속절없이 날아 가버린 문고리는 아침이면 망치 두드리는 소리에 다시 제자리에 매달렸다. 아버지의 연장통 안에 있던 찌그러진 문고리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좌절, 끝내 놓지 못했던 미래에 대한 희망의 연결고리다. 녹이 슬어 바스러지는 문고리가 당신의 절망과 희망 고문이었던 시간을 열어준다. 이제는 닫히지 않는 철 대문의 서사가 서럽다.
오랜 침묵의 끝에서 쌓여왔던 녹이 손에 묻는다. 애먼 발길에 차이기만 했던 쪽문은 움푹 찌그러져 덧칠을 해놓은 듯 녹이 번져있다. 오래됨과 지나간 시간의 낡고 삭아가는 것들을 어떻게 기억할까. 붉은 것들의 사유가 여기저기 얼룩져 있다. 좌절과 분노, 원망과 미움으로 갈등하던 순간에도 서로가 놓지 못했던 마음에 쌓여가던 녹을 본다. 결코 한 문장으로 끝나지 않는 것이 삶이다. 녹은 붉게 진 얼룩과 함께 존재의 기록으로 남겨져 서로의 역사가 되고 추억이 된다.
붉은 녹은 흘러간 세월의 색이다. 마음 깊은 곳의 애환이 표면으로 드러나는 느리고 오래된 상처의 흔적이다. 흔적은 시간과 시간이 뒤엉킨 그리움의 색으로 붉게 물든 저녁노을처럼 번진다. 삐걱거리는 오래된 철 대문, 낡은 액자를 겨우 지탱하고 있는 벽의 못, 채울 것도 없는 창고의 문짝에 걸려 있는 녹슨 자물통에서 시간이 만들어 낸 붉은색이 마음을 건드린다.
먼지 내려앉은 연장통 속사정이 아버지를 말해준다. 작은 나사못과 대못, 망치와
가는 철사 뭉치 나부랭이 등이 붉은 녹에 엉켜있다. 뒤적이던 손이 붉게 물이 든다.
숙취가 깬 아침이면 발길에 떨어져 나가버린 민망한 문고리를 달면서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다시 삶을 추슬러야만 하는 못 질의 의미를 나는 이해하려고 노력이나 해 보았을까.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절규 같았던 망치 소리를 마음이 먼저 듣는다. 원망과 서러움의 날도 시간이 흐르면 퇴색되어 녹이 슬고 산화되어 삭아 내린다.
당신 생의 마지막을 보냈던 이 집을 허물고 나면 그 시간의 형체마저도 자연으로 돌아간다. 폐허에 달빛만 고고했던 허무한 노래는 더 이상 취객의 위로가 되지 못해 허공에서 맴돈다. 푸른색 페인트가 드문드문 남아 있는 철 대문의 고난도 붉음 속에 본연으로 돌아가고 치열했던 삶마저 붉은 흔적을 남기며 흙으로 귀환한다. 함께 했던 모든 존재의 무한하지 않음이 세월과 함께 풍화되고 붉게 녹슬어 소멸하면서 유한성을 일러준다.
녹을 보면 쇠락해 가는 아쉬움과 동시에 묘한 안도를 느낀다. 바스러지며 자연으로 돌아가는 철의 단단함도 흙으로 회귀하는 인간과의 동질감에서 평온을 얻는다. 사명을 다한 녹슨 문고리는 더 이상 단절의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 빛나던 삶의 정점도 강인한 철의 속성도 자연의 변화와 함께 처음으로 회귀한다. 퇴색하고 변형되어 가면서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질서의 순리가 녹슨 마음을 연다.
붉은 녹은 단호하고 아름답다. 쇠락하여 무너짐이 아닌 모든 것을 삭인 압도적인
본능의 색이다. 임종을 앞둔 수도자의 모습처럼 안식에서 오는 순종으로 고요하면서 평화롭다.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자연으로 돌아가는 귀향의 시간임을 보여준다.
자연이 인간의 창조물 위에 물들이는 귀환의 색이 경이롭다.
녹 앞에 서면 겸허해진다. 조금씩 내려놓고 삭아지면서 섭리를 거스르지 않고 수용하는 시간의 흐름이다. 지나간 시간과 지금 그리고 다시 자연으로 회귀하는 시간에 숙연해진다. 귀환의 시간인 저녁노을은 서서히 저물어가던 오늘 하루해의 녹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고단한 몸이 붉음에 물들며 하루를 놓는다. 하루의 끝은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이다.
쇠락의 시간인 붉은 녹은 끝이 되고 처음이 된다.
청홍행진 / 김 애 자 - 제12회 청송객주문학대전 (동상)
춘흥에 겨운 꽃들이 망울을 부풀린다. 춥고 긴 날을 용케 견디고 눈을 틔우는 연초록이 눈물겹게 곱다. 숨 쉬는 생명마다 갈길 바쁜 실바람의 가랑이를 붙잡고 호객행위에 분주하다. 여린 듯 강한 소생의 힘이다.
향교에서 혼례가 치러진다. 유학 중인 친구의 딸은 전통 혼례를 하고 싶다고 신랑 될 사람과 함께 귀국했다. 말을 타고 입장하는 신랑은 연지곤지에 족두리를 쓴 신부의 모습이 신기한지 연신 눈알을 굴린다. 신혼의 단꿈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 둘의 입가엔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부부의 삶이 꽃길만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꼬리를 늘어뜨린 꽃샘추위가 신랑 신부를 들까불며 위세를 떨친다.
초례청 양쪽에 걸린 청사초롱이 불을 밝힌다. 송죽 같은 절개를 지킨다는 소나무와 대나무, 장수와 다남多男을 의미하는 밤과 대추가 초례상에 올려졌다. 청홍색 보자기로 싼 닭 한 쌍이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를 응시한다. 청색은 신부 쪽, 홍색은 신랑 쪽이다. 녹색 치마에 빨강 저고리를 입은 신부의 모습이 보자기에 싸인 닭들 같다는 뜬금없는 상상을 하다 소스라치게 고개를 흔든다. 수십 년 전 혼례 때 입었던 연두색 치마와 분홍저고리가 재빠르게 눈앞을 스친다.
예로부터 신부의 옷은 녹의홍상이다. 녹색 치마는 자연의 생동감을, 붉은 저고리는 인간의 생명력을 담아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움 나타낸다. 생명을 잉태하는 여인의 몸에 불길한 액운을 물리쳐달라는 소망도 함께 심어 두었을 것이다. 녹색과 붉은색의 조화로움에서 단아한 여인의 아름다움과 순결한 내면을 엿본다.
맏딸의 혼례복은 어머니가 손수 지었다. 미지의 땅으로 딸자식을 보내야 하는 불안과 아쉬움을 달래며 당신은 몇몇일 날밤을 지새웠다. 수많은 새댁의 예복을 지었던 당신이지만 자식이라는 이유로 몇 번씩 바늘침이 길을 잃고 손가락을 찔렀다. 시집살이의 고단함을 잘 알기에 아린 마음을 침묵 속으로 밀어 넣었으리라. 어미의 안타까움이 꼿꼿한 바늘 끝에서 청홍색 사각 이불과 치마저고리 위로 한땀 한땀 새겨질 때마다 점은 선이 되고 면으로 넓혀갔다. 새로운 세상에서 마음껏 꿈을 펼쳐나가라는 당신의 바람을 촘촘하게 그리면서.
친정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어머니는 한복의 고름을 조심스럽게 매주었다. 첫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입고, 잘 간직했다가 죽을 때 관속에 넣으라고 당부했다. 일부종사에 대한 징표가 담겼으니 가슴에 새기라는 당신의 말에 물기가 어렸다. 자주색 고름을 따로 챙겨주었다. 청과 홍이 합하면 타고난 색은 없어지고 자주색이 되는 것은 자기 생각과 고집을 죽여야 새로운 가정이 세워지는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자식이 태어나면 고름을 자주색으로 바꾸어 달아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땐 몰랐다.
신행하던 날 시댁 대문에 청사초롱이 걸렸다. 조상들은 우주 만물이 음陰과 양陽의 조화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청사초롱에 불을 밝히는 것은 부부의 화합과 새 출발을 훤하게 밝혀주라는 뜻이리라. 초롱의 은은한 빛이 불안하게 첫걸음을 내딛는 새댁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 것 같았다. 친정에서의 과거와 시댁에서의 현재, 새 가정에서의 미래를 기원해 줄 빛처럼 보였다.
반가의 규범은 지엄하다. 남존여비가 서슬처럼 번뜩이는 시가에서 여인의 자유는 압사당한다. 완벽주의자인 남편의 주장은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 대쪽이다. 자신의 판단이 늘 옳다고 여기며 벼락이 떨어져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만큼 냉철하다. 앞뒤를 가늠하지 못하고 열정만 앞세워 설레발치는 아내의 생각은 늘 허공에서 버둥거렸다.
숨이 막힌다. 선후를 따지고 싶지만 막된 여자로 낙인찍힐까 봐 속만 끓인다. 집밖에서는 당당한데 대문만 들어서면 양처良妻의 족쇄가 발목을 조른다. 무시로 갈아엎는 남편의 쟁기질과 담금질에 본성까지 들먹거린다. 인내의 한계가 목 밑까지 치밀면 터지기 마련이다. 불꽃티는 전쟁에서 서로의 지원군을 불러 보지만 이부자리 송사에는 관여하기가 어렵다며 서둘러 철수해버린다. 긴 냉전의 시간이 짧은 생을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남자는 하늘이라는 법도가 펄럭이는 한 여자는 땅으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부부로 엮이면 서로의 영혼까지 소유하고 싶은가보다. 상대의 색을 자신의 색깔 속에 넣으려고 안달한다. 두 색이 엉긴다고 타고난 색이 없어지는가. 여자가 먼저 죽어야 가정이 세워진다는 법이 머릿속을 뒤흔든다. 한쪽이 다른 쪽에 완전히 굴복해서 하나 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홍이 없고 청만 있으면 둘이 함께라는 말은 허울 좋은 포장일 뿐인데.
태극기 중심의 청홍이 강렬하다. 두 색깔은 원안에서 서로 맞물고 바람개비처럼 회전한다. 붉은색을 위에, 청색을 아래에 둔 것은 하늘을 양으로 땅을 음으로 여기는 동양적 우주론에 기인한 것이리라. 무극無極의 동그라미 속에서 청과 홍은 둘이면서 하나고 하나면서 둘이다. 자신의 색깔을 버리는 게 아니라 음양이 서로 의존하며 조화를 이루라는 게 아닐까.
다투고 불편한 흔적을 남기면서 여기까지 왔다. 함께 뒤엉겨 애면글면하다가도 담장 밖으로 달아나려고 필사적으로 발끝을 세운다. 수십 년을 따로 살았던 세월보다 함께 산 흔적이 더 많은데 날마다 보면서 한뉘를 안 볼 것처럼 옆지기와 벋버스름하게 지낸다. 다른 색이 만나 서로 공존하기를 바라지만 반백 년을 싸우고 부딪쳐도 청은 늘 홍의 그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못마땅하다.
타고난 색깔이 고개를 쳐든다. 여인의 소리가 담장을 넘을까 조바심 내던 어머님도 가셨다. 어렵잖은 남편의 말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매사를 간섭하고 통제하려는 이성이라는 파수꾼을 보란 듯 내동댕이쳤다. 벼락이 떨어져야 하는데 어째 조용하다. 갑자기 당한 하늘이 혼비백산한 것일까? 암탉이 목을 빼고 고함쳐도 괜찮네. 남자는 하늘이니 순응하고 따라야 한다는 지론이 조금씩 허물어져 간다.
가슴이 설레어도 생은 찰나가 아닌가. 흐르는 세월에 올라앉은 청홍은 시간의 안팎을 드나들며 진종일 부는 바람을 맞는다. 청 속에 홍이 없고 홍 속에 청이 없다. 홍 곁에 청이 있고 청 곁에 홍이 있을 뿐이다. 삶을 나눠 가졌으니 서로의 어깨를 걸고 의지하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야 하리라. 시간의 켜를 뚫고 청과 홍은 한 곳을 향하여 새롭게 화음을 맞춘다. 남겨진 삶을 후리며 미래를 향해 뭉근하게 행진을 이어가리라.
보자기에 묶인 닭 한 자웅이 초례청 위에서 나래를 친다. 수탉의 새빨간 벼슬이 하늘을 향해 곧추선다. 골골거리는 암탉의 옹알이가 초란 낳을 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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