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숙모의 비밀 / 이정란 (2025년 좋은생각 생활문예 금상)
열두 살 딸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더니 다짜고짜 '비밀 터놓기 게임'을 하자고 한다. 할 이야기가 많은 모양이다. 보따리를 풀어 놓듯 그간 숨겨온 것들을 내게 털어 놓는 아이의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났다.
"이제 엄마 차례야."
아이는 자세를 고쳐 앉고 두 귀를 쫑긋 세웠다. 비밀이야 얼마든지 있지만, 열두 살 아이의 키에 맞는 비밀이 딱히 생각나지 않아 머뭇거리는데 다행히 학원 갈 시간이 됐다는 알람이 울렸다.
아이가 나가고 난 뒤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앉아 비밀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비밀이라고 할 만한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외숙모가 떠올랐다. 30년도 더 된 나와 외숙모의 비밀! 이제는 외숙모가 세상을 떠났으니 슬쩍 누군가에게 털어놔도 되지 않을까 싶다. 공소시효라는 것도 있으니까 말이다.
외삼촌은 일 년 내내 술에 빠져 살았다. 한여름에도 코끝이 빨갛고 늘 갈지 자 걸음으로 동네를 누볐다. 그는 평생을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자유인의 삶을 살았다.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가르치고 살림을 꾸리는 일은 당연히 외숙모의 차지였다. 혼자서 밭도 갈고 소도 키우면서 억척스럽게 산 외숙모의 유일한 낙은 막내아들에게 매달 하숙비와 생활비를 부쳐 주는 일과 우리 엄마에게 남편 욕을 하는 것이었다.
억척스런 삶만큼 입도 걸었던 외숙모는 우리 집에만 오면 쉴 새 없이 남편 욕을 퍼부었다. 그때마다 엄마는 무슨 죄인인 양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고개 숙였다. 한참을 그렇게 퍼붓고 바가지로 물을 한가득 떠 마시고는 "그놈의 술을 하도 퍼 묵어서 간이 썩어 문드러졌을 것인디 왜 아직 안 죽고 사는 가 모르겠네. 나가 그 인간 죽으면 확 주둥이에다가 집에 있는 술이란 술은 다 모아다가 콸콸콸 쏟아 넣을 것이여." 하며 바가지에 남은 물을 마당에 흩뿌리고는 대문을 박차고 나갔다.
외삼촌은 외숙모의 말대로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상을 치르는 내내 하나뿐인 오빠가 죽었다며 곡하는 엄마 앞에서 외숙모는 잘된 일이라며 덩실덩실 춤추고 노래까지 불러 문상객들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외삼촌의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주말, 엄마의 심부름으로 밭에 있는 동네 할머니들에게 새참을 가져다 주러 가고 있었다. 찐 고구마와 물김치가 전부였지만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 걷다 보니 숨이 찼다. 잠깐 바구니를 내려놓고 쉬려는데, 바로 앞 콩밭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대낮인데도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한 맺힌 귀신의 울음소리 같아 오싹했다. 나는 땅바닥에서 돌멩이 두어 개를 집어 들고는 콩밭 쪽으로 서서히 걸어갔다. 발걸음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아 손에 든 돌멩이라도 던져 귀신을 쫓아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팔을 들었다.
"아이고, 아이고! 불쌍한 우리 영감! 나가 영감 없이 어찌 산다요. 아이고, 아이고! 나도 같이 데리고 가시오…."
돌멩이 든 손에 힘이 풀렸다. 외숙모였다. 침을 꿀꺽 삼키며 뒷걸음질을 쳤다. 누군가가 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난처해할까 봐. 새참 바구니를 들어 올리는데, 아뿔싸! 팔에 힘이 빠진 나는 그만 몸이 휘청해 엎고 말았다. 외숙모는 나를 알아채곤 흙 묻은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무섭게 쏘아붙였다.
"이거는 못 들은 것이다잉, 니랑 나랑만 아는 비밀이여! 꼭 지켜라잉. 느그 엄마나 누구한테도 말하믄 안 된다잉."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둘러 바구니를 챙겨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 이후 동네에서 외숙모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엄마처럼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푹 숙이게 됐다.
외삼촌이 떠난 그해 겨울, 외숙모는 화장실에서 쓰러졌다. 중풍이 오고 반신불수가 되어 어느 요양 병원에서 지내게 된 외숙모를, 엄마를 따라가 한번 봤다. 그 많던 농사일을 혼자 척척 해내고 우리 집에 와서 온몸에 힘을 줘 가며 외삼촌 욕을 해 대던 기운은 다 어디로 가고 비쩍 마른 나뭇가지 같은 외숙모의 모습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제 세상을 떠나고 없는 외숙모에게 아직 못한 말이 있다.
"외숙모, 살아 내느라 애쓰셨어요. 모든 것 털어 버리고 이제 편히 쉬세요. 그리고 그 비밀 오래 잘 지켰어요. 오늘 처음 꺼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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