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 두 그루 / 박 금 아
분홍과 자주 꽃을 피워 올리고서 두어 달째 처음인 듯 서 있다. 두 그루가 언제부터 거기 그 자리에 있었는지, 어느 나무가 먼저고 나중 것인지 알 수 없다. 언제 보아도 말간 꽃 빛은 그 아침에 피어난 듯 싱그럽다.
어느 여름 저녁, 아파트 롤러스케이트장 구석진 자리에서 노을 속으로 꽃을 피우고 있는 배롱나무 두 그루를 보았다. 난만히 피어나는 꽃송이에 이끌려 우뚝 멈춘 채 한참을 올려다보았다. 그 후 그곳을 지날 때면 나무 아래로 가서 서 있곤 했다. 그러면 어디선가 소곤소곤한 이야기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육 남매의 장남이면서 서자였던 남자를 남편으로 두었던 어머니는 시할아버지 시할머니까지 층층시하 시집살이를 하는 내내 가슴앓이를 했던 것 같다. 건사해야 할 뱃사람들도 수십 명이어서 바람 잘 날이 없었지만, 시가(媤家) 어디를 봐도 하소연할 상대라곤 없었다. 그나마 한 살 아래 남편뿐이어서 어쩌다 의논이라고 털어놓을라치면 열아홉 살 부룩송아지 남편은 어머니가 하는 작은 넋두리조차 품어내지 못했다. 해결해 준답시고 어르신들에게까지 따따부따 뜸베질을 해대는 바람에 되려 어머니를 곤궁에 빠트리기 일쑤였다.
언젠가부터 어머니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분이 우리 집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떡집을 열고부터였는데 어머니는 처음 보는 그 분을 우리에게 '큰어머니'로 인사시켰다. 아버지에게는 낳자마자 떠나버린 생모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지만, 그 분에게 아버지를 낳기 전에 또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처음이었다. 이를테면 나의 아버지와 씨가 다른 형이 있었는데, 큰어머니는 그의 아내 되는 이였다.
처음 만난 큰어머니는 자그마한 체구에 뽀얀 피부를 가진 조용한 인상이었다. 웃음을 가득 담은 낯빛으로 이야기할 때면 여름 저녁 바람에 피어나는 배롱나무 꽃잎을 보는 듯했다. 큰어머니는 섬에서 텃밭을 일구며 혼자 살고 있었는데 장날이면 아침에 도선을 타고 나왔다가 오후에 배 시간에 맞춰 돌아가거나 어느 때는 우리 집에서 며칠씩 머물며 어머니가 하는 일을 도왔다.
그런 날 두 분은 경단을 만들 재료를 담은 양푼을 사이에 두고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머리를 맞대고 소곤거리다시피 하는 소리는 어찌나 작은지 당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귀를 쫑긋거려야 간신히 들을 수 있는 말이라곤 겨우 이런 정도였다.
"그랑께나예, 두 양반이 우찌 그리 타갰시꼬예"
일을 마칠 즈음, 그릇들을 챙겨 들고 일어나면서 어머니가 꼭 하는 말이었다. 두 분은 평소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던 집안의 비화들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당신들의 지아비에 대해 흉이라도 본 모양이었다. 형제가 하는 행동이 어찌 그리 똑 닮았는지, 그건 분명 내력에서 기인한 것이니 암만해도 고치기는 어려울 테니 체념하며 살아야겠다는 자기 다짐 같은 것이었는데 큰어머니는 늘 똑같은 말로 달랬다.
"그랑께나 우짜겄노. 니캉 내캉 참꼬 살아야지"
한마디면 알아듣는 사이였을 거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 같은 처지로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젊어서 혼자 되어 가장으로 살아가는 친정어머니를 더는 마음 아프게 해드릴 수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더욱 큰어머니에게 기대는 것 같았다. 그간의 일들을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큰어머니가 오시는 날, 어린아이가 되어 일러바치는 듯했다.
그러면 큰어머니는 한결같은 목소리로 "그랑께나 우짜것노" 하는 말만 되풀이했다. 가끔 까르르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했는데 그런 때 두 어머니는 분홍 배롱나무꽃인 듯, 자주 배롱나무꽃인 듯했다.
서얼의 아내라는 같은 처지의 동료의식 만으로도 두 분 어머니는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 힘든 시간을 조금은 덜 수 있었을 거다. 한 번 꽃이 피면 백 일 동안 지지 않고 피어서 백일홍이라고 부른다는 배롱나무. 두 분 어머니가 한 그루 나무로 서서 세상 땅에 꽃을 피웠던 날은 며칠이나 될까.
저녁답에 비꽃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밤이 되자 소낙비가 되어 내렸다. 배롱나무꽃이 걱정되어 나무 아래로 가보았다. 후드득후드득 큰비에도 나무는 꽃잎 한 장 젖지 않았다. 발치 아래로 흘려보낼 뿐. 몸피를 통과한 물줄기에는 맑은 꽃 빛이 서려 있었다. 맨드리한 나뭇결은 거친 세월의 더께를 다 벗겨낸 두 분 어머니의 속내인 듯했다.
생의 뜨거운 여름날, 단짝으로 서서 그늘이 되고 볕이 되어주었던 두 분은 이제는 집을 떠나 먼 곳에서 그리움으로 계신다. 배롱나무 꽃말은 '헤어진 벗에게 보내는 마음' 이라는데 두 분 어머니가 서로에게 전하는 사무침일까. 여름밤, 세찬 장대비 속에서도 배롱나무는 하염없이 꽃을 피워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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