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산다 / 김 윤 지
하동군 고전면 작은 시골 마을은 권태롭고 평화롭다. 하지만 그곳에서 80년 넘게 살아온 나의 외할머니 일명 ‘잔너리댁’의 일상은 그렇지 않다.
할머니의 하루는 독서로 시작한다. 10년 전 배운 한글을 잊지 않고자 매일 새벽에 막내딸 미현이가 사준 책을 읽고 또 읽는다. 암탉이 마당을 나갔던 일들을 옮겨 적는 연습도 잊지 않는다. 하지만, 매번 연습해도 ‘탉’이란 글자는 어렵다. 새벽 6시에는 당신만을 위한 아침을 만드신다. 아침을 드시는 동안에는 이번 주말에 보러 갈 100일 된 증손주를 생각한다. 뽀얗고 포동포동한 볼을 상상하니 우리 큰아들 도성이, 그리고 우리 장손 성문이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 흐뭇해진다. 그 이후에는 집을 치운다. ‘할매 혼자 사는 집이라 쑥쑥타’라는 소리를 들으면 우리 자식들 욕보이는 것 같아 최대한 깔끔하게 청소한다. 그러고 나면 마을 회관에 갈 채비를 한다. 회관은 사랑방이다. ‘잔너리댁’처럼 바쁜 오전을 보낸 할머니들이 모이는 곳이며 ‘맥심 모카 골드’ 커피를 한 잔씩 마시며 드라마 재방송을 켜놓고 까무룩 한숨 잘 수 있는 공간이다. 개운하게 자고 일어나면 할머니들은 함께 점심을 차려 드시며 서로 음식 칭찬을 한다. ‘잔너리댁’은 마을 이장님이 당신의 김치가 제일 맛있다고 해줘서 오늘도 기분이 썩 좋다.
오후에는 김장용 무와 배추에 물을 주고 윤지가 좋아하는 홍시를 5개만 따고 나머지는 까치밥으로 남겨둔다. 해가 어스름하게 질 때쯤이면 저녁을 차린다. 윤서네가 준 실한 무가 생각나 냉장고를 뒤적이며 물메기탕을 끓이려다 우리 현성이가 집에 오면 해줘야지 싶어 냉장고 문을 다시 닫는다. 물에 밥을 말고 점심때 먹었던 김치를 다시 꺼내어 식탁에 놓는다. 그러다 갑자기 저녁도 혼자 먹는 것이 외로워 괜히 막내에게 전화해 ‘피죤’이랑 ‘다시다’가 다 떨어졌으니 사서 보내라고 말해본다. 저녁을 물리고 나면 얼른 씻고 몇 해 전 점자가 선물해 준 내복을 입고 침대에 눕는다. 저녁 8시 30분 <결혼하자 맹꽁아>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드라마가 끝나면 눈이 스르르 감기지만 그래도 내일 날씨 예보를 봐야 하니까 잠을 참고 또 참아본다. 문득 윤지가 돌게장을 좋아하는 것이 생각나 ‘오늘이 아흐렌께 보름 지나모 진교장에 가서 게를 좀 사야겠다’라고 혼잣말도 해본다. 어린 시절 ‘게는 보름달을 보면 꼼짝 놀래가 살이 쑥 빠져삔다’라고 했던 어머니 말씀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어매 생각을 하면 눈이 시려 눈을 감고 있었더니 결국 예보를 보지 못하고 다시 까무룩 잠에 든다. 고전면 권태로운 시골 마을에는 하나도 권태롭지 않은 ‘잔너리댁’ 할머니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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