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 / 이 방 주
마지막 봉우리에 올라설 때는 밧줄을 타야 했다. 수직에 가까운 바위는 높이가 20cm는 족히 되어 보였다. 고맙게도 누군가 손아귀에 꽉 들어찰 만큼 굵은 밧줄을 늘여 놓았다. 이렇게 갈라진 바위틈을 이른바 '침니'라고 한다. 갈라진 틈이 너무 좁아서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더구나 갈라진 바위틈에 발이 끼인 채 잘 빠지지 않아서 한 발 올려 디디기도 어렵다. 때로는 체중을 바위틈에 간신히 지탱하는 발끝에 싣고, 손아귀로 움켜쥔 밧줄을 있는 힘을 다하여 당기며 한 발씩 올라야 한다.
아차하면 바로 낭떠러지다. 밧줄을 놓치고 미끄러져 떨어진 다음에 낭떠러지가 의미하는 것은 뻔하다. 그건 죽음이다. 여기에 밧줄이 없다면 어떻게 오를 수 있을까? 그러니 자주색 밧줄은 생명줄이다.
어깨가 빠지는 것 같다. 가슴이 터질 듯이 숨이 가쁘다. 밧줄을 잡은 손에 불이 날 것만 같다. 그렇게 밧줄을 힘들게 당기면서 가까스로 침니로부터 벗어났다. 이런 순간에 생사를 달관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긴장감으로 온몸이 땀에 젖었다. 이마에서 솟은 땀이 흘러 들어갔는지 눈이 쓰리고 따갑다.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머리띠를 풀어 땀을 닦으며 내려다보니, 바위틈에 늘어진 자주색 밧줄이 신비스럽다. 생각해 보니 지나온 황정산 암벽에 늘여놓은 밧줄은 모두 자주색이었다. 자줏빛이라 더 튼튼해 보였다. 자줏빛이라 더 믿음직스러웠다.
<삼국사기>의 <탈해 이사금조>에 게재된 ‘김알지 신화’를 보면, 탈해왕 때 경주의 서쪽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나서 사람을 시켜 가보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하늘로부터 자줏빛 구름이 땅으로 뻗치고, 구름 속의 나뭇가지에 금궤가 걸려 있는데, 그 아래에서 흰 닭이 울고 있었다. 금궤를 내려 열어보니 아기가 있었는데, 그 아기를 태자로 삼고 ‘김알지金閼智’라고 했다. 그가 바로 경주 김씨의 시조이다.
이 이야기는 신화에 불과하다. 그러나 신화가 고도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허황한 이야기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신화가 상징성을 지닌다면, 여기서 자줏빛 구름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 구름은 생명의 원천인 하늘과 일상의 공간인 땅을 연결하는 탄생의 줄을 의미한다. 신화적 공간에서 일상적 공간으로 내려오는 생명의 줄이다. 우리나라 신화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들은 대게 구름을 타고 내려온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자줏빛일까? 사람들은 왜 구름을 자줏빛이었다고 생각했을까? 신화를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지닌 의식 세계를 보여주는 이야기 마당이라고 한다면, 자줏빛은 생명의 줄을 상징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진천 김유신 장군 탄생지 부근에 있는 태령산 장상에 올라가면 장군의 태실이 있다. 태를 소중하게 보관하는 풍습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우리나라만의 문화이다.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생명을 존중하는 문화의 일면이다. 태는 모체와 신생아를 연결하는 생명의 통로이다. 태를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가 오늘날 줄기세포를 연구하는 생명공학의 저력을 낳았는지도 모른다. 우리 민족이 이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탯줄이 바로 자주색이다. 자줏빛은 생명줄의 색이기에 황정산 자주색 밧줄이 더 믿음직스럽다.
줄이 없으면 우리는 살 수 없다. 생명은 줄로 이어진다. 피는 핏줄을 통하여 돌고, 몸 구석구석의 정보는 신경 줄을 통해서 뇌로 전해진다. 줄이 없으면 우리는 한순간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사회생활의 식량인 정보도 줄에 의해서 전해진다. 전화나 인터넷이 그것이다. 세상의 모든 정보는 줄을 타고 내게로 온다. 나에 관한 모든 정보는 줄을 타고 세계로 간다. 모든 에너지도 줄을 통하여 필요한 곳으로 흘러간다. 우리는 줄을 통해 받은 에너지로 삶의 세계를 밝히고 생활 터전을 확장하며 생명도 연장시킨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줄도 있다. 보이지 않는 줄이 나를 끌어주고, 내가 남을 이끌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줄이 있어서 내가 남에게 연결되고, 남이 나에게 이어진다. 나는 기대를 걸고 보이지 않는 줄에 서기도 한다. 내가 선 줄은 목련같이 미더운 우정이 되기도 하고, 백합같이 향기로운 연정이 되기도 한다. 줄은 때로 미움이 되기도 한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는 튼튼한 밧줄을 잡아 하늘에 올랐으나, 포악한 호랑이는 썩은 밧줄을 잡았다가 떨어져 수숫대를 피로 물들이고 죽었다는 옛날이야기도 있다. 내가 거는 기대는 포악한 호랑이의 뒤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줄은 길이다. 좋은 세상으로부터 내게 들어오는 길이고, 나로부터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세상에는 보이는 길과 보이지 않는 길로 가득하다. 나는 길을 타고 세상에 나아가 역사라는 그림을 그린다. 그러나 내가 그린 그림은 의미를 드러내지 못할 때가 더 많다.
방금 땀 흘리며 타고 올라온 자주색 밧줄을 또 한 번 바라본다. 저 줄을 타고 지금 이 세상에 올라왔지만, 언젠가 저 줄을 타고 다시 내려가게 될 것이다. 평화와 안락이 깃든 세계로 말이다.
반야로 가는 길 / 이방주
월류봉 광장에 우리가 모였다. 여기서 반야로 가는 길을 찾는다. 월류봉은 금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초강천에 감겨있다. 달이 경관에 취해서 머물다 간다는 월류봉 다섯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앞 오봉에서 바위 한 덩어리가 미끄러져 내려와 강 가운데서 불끈 일어섰다. 그 바위 마루에 월류정이 있다. 제 그림자에 취한 달도 편히 머물 수 있겠다. 정자까지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광이다. 월류정을 품은 광장은 풍류 마당이다. 시가 있고 향기로운 술이 있고 그리고 아름다운 것이 있고…. 달도 놀다 간다니 월류정은 놀이 마당이다. 예나 지금이나 색(色)의 공간이다. 반야사는 여기서 이십리 남짓, 우리는 투명한 참 지혜가 있는 반야(般若)의 세계로 찾아가야 한다.
초강천은 금강의 한 줄기이지만 성난 황소의 영각처럼 소리를 지르며 월류정 아래를 파고든다. 물안개가 자욱하다. 지름길은 보이지 않는다. 달이 머물던 오봉이 내려다본다. 오늘밤에는 달도 물에 잠겨 아름다운 제 그림자를 찾지 못할 것 같다. 이미 풍광에 취한 달도 우리도 반야로 가는 들머리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른쪽 강안으로 데크 길이 보였다. 그런데 ‘아니 그냥 큰 길로 가자’ 했다. 찻길로 들어섰다. 공사중인지 바리케이드를 쳤다. 갓길로 조심스럽게 걸었다. 시작점인 원촌교를 건너면서 쳐다보니 광장에서 돌아오는 데크 길이 보였다. 아까 그 길이다. 그 길로 왔어야 했다. 그러나 그 길을 안 것만으로 다행으로도 생각하자.
원촌교를 건너 반야사에서 내려오는 석천 강안을 따라 절벽에 붙인 잔도를 거슬러 오른다. 여울소리길이다. 물소리가 요란하다. 폭우가 아니었다면 맑은 여울에 햇빛이 곱게 부서지고, 여울의 울음소리가 하얗게 반짝였을 것이다. 여울소리길 오리 남짓은 순순하고 널찍하다. 바닥은 야자 매트를 깔아 부드럽고 편안하다. 반야사 쪽에서 넘어질 듯 튕겨지며 흘러내리는 흙탕물을 바라보면서 나의 나태를 다독인다. 오르막길이 나타난다. 나태해질 겨를이 없다. 앞을 가리는 안개도 마음을 가리는 나태도 걷어내야 한다.
원정교를 건너니 물을 왼쪽에 두고 걷는다. 산새소리길이다. 흙길을 잠시 걷다가 다시 데크 길을 걷는다. 새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여울소리가 새소리를 삼켜버린 것인가. 물소리 속에서 돌 구르는 소리를 듣는다. 소망하던 새소리가 아니라 무섭다. 산이 내품는 기운이 바람이 된다. 시원하다. 나뭇가지가 머리 위를 가린다. 볕이 나면 그늘로 들어가고 빗방울이 떨어지면 우산을 편다. 풍광이 좋으니 사람들이 많다. 오른쪽으로 한 줄로 섰다. 수행의 대열이다. 조용히 말하고 조용히 웃고 조심스럽게 걷는다. 그렇게 살아온 날들이 하루이틀인가. 그것을 깨달으며 걸으면 반야의 세계를 만난다고 믿는다. 그늘이 가린 볕을 그리워하며 여울에 묻힌 산새소리를 찾으며 산새소리길을 걸었다.
데크길에서 나와 반야사로 넘어가는 나무다리를 지나쳐 둑길을 걸었다. 오리 남짓만 걸으면 드디어 반야사로 건너가는 징검다리를 만날 수 있다. 우리는 징검다리를 팔짝팔짝 건너 반야의 세계에 들어갈 꿈을 꾼다. 그때 구레나룻이 허연 노인장이 내려오다가 “더는 못 가유. 반야사 건너가는 길이 물에 잼겼슈. 내 말 들어유. 헛걸음 하지 말구.” 아, 그류? 그냥 가볼께유. 노인장 말씀을 어겼다. 아니 그럼 여성 회원들은 여기서 기다리고 우리만 가보자. 조금 더 걷다가 못생긴 강아지를 데리고 내려오는 처녀 두 명을 만났다. 자매이건 말건 상관없다. 반야사로 건너갈 수 있죠? 그래 그렇다고 해라. “그럼요. 물웅덩이만 지나면 징검다리가 나와요” 그럼 그렇지. 처녀들은 우리가 원하는 말을 했다.
신발을 벗고 물웅덩이를 지나 맨발로 걸었다. 야자매트는 촉감이 좋다. 그러나 토사가 쓸어 덮은 곳은 발바닥을 찌를 것 같이 아프다. 괜찮다. 반야사 가는 수행의 길이니까. 반야의 세계로 물을 건너가는 제도의 길이니까. 그러나 없다. 길은 물에 잠기고 징검다리 위로 물이 넘친다. 노인장 걱정이 파라미타를 바로 일러준 말씀이었다. 노인장의 말씀을 듣지 않았으니 괜한 소리를 한 처녀들을 원망할 자격이 없다.
되돌아와서 일행을 만났다. 맨발에 흙을 털고 양말을 신었다. 기다리던 이들과 함께 반야교를 건넜다. 하늘이 파랗게 벗어졌다. 우리는 다시 웃고 떠들며 걸었다. 일주문이다. ‘白華山般若寺’ 우리는 반야의 세계로 성큼 발을 들여놓았다. 마주치는 산기슭 너덜이 호랑이가 되어 포효로 우리를 맞는다. 산골물이 하얗게 쏟아져 내린다. 폭포수 아래 잔자갈들이 훤히 보인다. 여기가 반야이다. 참 지혜의 세계이다.
문득 월류나 반야는 둘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맞아, 일주문은 불이문(不二門)이잖아. 일주문 안이나 밖이나, 여울소리나 새소리나, 노인장이나 처녀애들이나, 중생이나 부처나 모두 하나이다. 성속(聖俗)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오백년 배롱나무를 지나 대웅전에 삼배를 올리니 부처님은 삼촌이 되어 하얗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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